라이카 씨네마의 폴 토머스 앤더슨 기획전 '펀치 드렁크 러브' 보고 왔습니다.

 


전 폴 토머스 앤더슨을 PTA라고 쓰는 게 왜 이렇게 닭살이 돋을까요.. ㅋㅋㅋ

그냥 편하게 쓰는 줄임말인 건 알겠는데 뭔가 오그라들어요. 제목도 PTA라고 썼다가 지우고 다시 아득바득 폴 토머스 앤더슨이라고 썼습니다. ㅋㅋ


뻘말을 덧붙여봅니다. R.I.P는 꽤 많이 거슬리는 게... 고인의 명복을 비는 메세지에 나머지 글자를 다 쓰는 게 그렇게도 귀찮은가? 그런 말을 줄여쓰게? 명복을 빌긴 하는 거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


라이카 시네마에서 PTA(퍽!) 기획전을 한다는 정보를 지난달 말에 인스타에서 보게 돼서 '가야지, 가야지...' 했는데, 처음 봤을 땐 한 달이나 남아있었던 기획전이 정신 차리고 보니 어느새 이번 주 일요일이 마지막 상영 날이었고, 처음 봤을 때랑은 다르게 불어난 개인 일정들 때문에 못 보고 지나칠 위기에 처했습니다.

PTA 작품들 중에 좋아했던 '펀치 드렁크 러브'랑 '매그놀리아'를 극장에서 꼭 보고 싶었고, 못 봤던 작품인 '마스터'도 보고 싶었는데, 오늘 오전 9시에 '펀치 드렁크 러브' 상영이 있어서 이걸 보고 일을 하러 넘어가야겠다는 야심만만한 계획을 어제 세웠습니다.

무슨 계획 씩이나, 그것도 야심만만하게 세우는 게 웃기긴 한데, 라이카 시네마라는 곳이 연희동에 있고 저희 집에서는 50분 정도 걸려서 아침 7시 반에는 출발해야 했거든요.

평소에 오전 10시에서 12시 사이에 일어나는 게 보통이라, 아침 7시에 일어나는 게 저한테는 꽤 두려운 미션이었습니다. 돈 버는 일처럼 강제성이 있는 일이 아니면, 아무리 하고 싶었던 일이어도 알람에 깼다가 포기해버리고 더 잤던 경험이 99%여서.. ㅋㅋ

오늘은 다행히 포기 안 하고 제 시간에 극장에 도착해서 영화를 볼 수 있었습니다. 휴...


요즘 한국 영상자료원에서는 홍상수 전작전을 하고 있는데요. 워낙 다작을 하는 감독이라 '강변호텔' 이후로 잘 안 챙겨봤더니 몇년 사이에 안 본 영화가 11편이 쌓여서 ㅋㅋ 새 영화들은 OTT에도 잘 없고 해서 진도 따라잡으려고 최근에 영상자료원을 몇번 갔었어요.

새로 본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 중에 '소설가의 영화'라는 영화가 있었는데요. 이 영화 후반부에 '라이카 시네마'가 등장합니다. 극중 이혜영이 김민희를 데리고 만든 영화를 라이카 시네마에서 상영하고, 건물 옥상에서 담배도 피고 하는 장면이 나와요.

최근에 다른 영화 속에서 본 장소를 직접 가서 보니까 재밌더라구요. 영화 시작 10분 전에 극장에 도착해서 옥상도 올라가보고 괜히 건물 전층을 돌아다녀봤습니다.


저는 2013년? 2014년쯤에 군대에서 '펀치 드렁크 러브'를 처음 봤습니다. 대학교 동기가 자기 최애 영화 중 하나라고 해서 찾아봤었어요. 그 친구랑 같이 들었던 '영화의 이해' 교양 수업에서 강사 분이 '펀치 드렁크 러브' 속 장면들을 보여주며 영화 속 미장센과 연출을 설명해줬던 기억도 나네요.

이젠 꽤 오래 전이라 기억도 희미하지만 영화가 좋았어서, 그 기억 때문에 이번에 극장에서 챙겨보고 싶었던 거 같아요.

그리고 결과적으로 극장에서 보길 정말 잘했고, 너무 행복하고 좋았습니다!

집에서 컴퓨터 화면으로 본 것과는 역시 차원이 다르더라구요. 큰 화면과 소리가 주는 힘이... 이미 봤던 영화이지만 처음 보는 것처럼 영화에 빨려 들어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워낙 잘 만든 영화여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요.

제목도 참 잘 지었어요. 펀치 드렁크... 갑자기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 없고 몰아치는 영화가 너무 너무 재밌었습니다.

그러면서 또 드는 생각은, 요즘 영화들 반성해라... 늘 똑같은 이야기인데 쓸데없이 스케일만 키우고, 돈 쏟아붓고, 몸값 비싼 배우들 모셔다가 CG 떡칠하고, 기계적으로 좋은 영상 때깔에, 웅장한 척 쿵쾅거리는 음악 발라서 전에 없던 대작인 척하는 영화들이 스크린을 낭비한 게 몇년째인지 모르겠어요.

영화를 보는 순간, 내가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로 초대해서 그 안의 인물들과 같은 감정을 생생하게 느끼고 체험하게 해주는 게 영화지, 생각이 듭니다.

요즘 영화들은 기술의 제약만 없어졌을 뿐이지, 하는 이야기들은 오히려 확 좁아져버린 거 같아요.

끝이 빤히 보이는 이야기에, 온갖 똥폼 잡으며 심각한 척 했던 갈등과 문제들은 그저 러닝타임상 해결되어야 할 타이밍이기 때문에 싱겁게 해결돼버리죠.

액션이 스토리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스펙타클한 장면이 목적이고 스토리는 그를 위한 도구처럼 느껴지는 영화들이 수두룩한 것 같아요.

기술의 발전이 작가들의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도와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게으르고 대충 넘어갈 수 있게 만든 것 같달까요?

평범한 남자가(사실 들여다보면 평범하진 않습니다만ㅋㅋ)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어쩌다 말려든 소동에서 헤어나오려고 노력하는 일상의 이야기가, 마약에 범죄에 히어로에 카 체이싱 나오는 범죄 스릴러 액션 영화보다 훨씬 스펙타클하네요.

그리고 영화가 한없이 로맨틱합니다. 그런 경험 해본 적 있으세요? 슬픈 내용도 아닌데, 엄청 예쁜 걸 봤을 때 눈물이 찔끔 나는 거요. 오늘 영화를 보면서 그런 순간이 몇번 있었어요.

나이가 들면서 영화를 습관처럼 보게 되는데, 이런 감흥을 주는 영화를 가끔씩 오랜만에 만날 때면 그 경험이 참 소중하고 행복합니다.

전 혼자 봤지만, 썸타는 분들이 이 영화를 극장에서 같이 보고 나오면 서로 사랑하게 될 거 같아요. ㅋㅋ


영화 내내 흐르는 음악들도 참 좋았고 그 힘이 컸습니다.

PTA 감독 작품들에는 음악이 잠깐만 쓰이는 게 아니라 오랫동안 끝나지 않고 지속되면서 들뜨고 텐션 높은 분위기와 긴장감을 주는 장면 연출이 많이 나오잖아요. 이런 장면들을 볼 때마다 참 흥미진진하고 신나고 너무 좋습니다. ㅋㅋ


영화 보고 나와서 OST를 계속 듣고 있습니다. 몽환적인 멜로디와 조율 안 된듯한 피아노 소리가 참 사랑스럽고 예쁘네요. 

칵테일을 마셔서 기분 좋게 취한 것 같은 '존 브라이온'의 음악이 참 좋고, 영화의 개성을 만들어준 일등공신인 것 같습니다.

이분 이름을 오늘 처음 알았는데 평소에 자주 들었던 '이터널 선샤인' OST도 이분이 작곡하셨군요. 또 다른 작품인 '레이디 버드' OST도 좋아서 플레이 리스트에 넣었습니다!


지금은 거장이 된 감독의 유명한 명작이지만, PTA 감독이 젊었던 시절에 이 영화를 최신 개봉작으로 만났던 관객들은 얼마나 신선한 충격을 받았을지 잠깐 상상해봤어요. ㅋㅋ

오랜만에 아주 신나고 행복했던 극장 나들이였고, 오늘은 하루 종일 영화의 여운에 젖어있을 것 같습니다. '매그놀리아'와 '마스터'도 어떻게든 극장에서 봐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됐어요. ㅋㅋ

    • 한 번도 생각을 안 해본 부분인데 듣고 보니 그렇네요. 다른 것도 아니고 돌아가신 분에게 평안히 쉬소서... 라는 말을 굳이 줄임말로. ㅋㅋㅋ

      "액션이 스토리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스펙타클한 장면이 목적이고 스토리는 그를 위한 도구처럼 느껴지는 영화들이 수두룩한 것 같아요.

      기술의 발전이 작가들의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도와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게으르고 대충 넘어갈 수 있게 만든 것 같달까요?"

      이 말씀은 사실 이십 여년 전부터 쭉 나오던 얘기지만 저도 대략 십년 전부터 이런 생각을 많이 하긴 합니다. 아주 옛날엔 그런 볼거리 위주의 영화들도 그냥 재밌게 보고 그랬는데 점점 생각이 달라지는 게 영화계의 변화 때문인지 저의 변화 때문인지 아직은 모르겠어요. 하지만 결국엔 공감한다는 얘기가 되겠구요. 최소한 cg의 발전은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경이로움이랄까. 이런 걸 엄청나게 깎아 먹은 요소임이 분명하다는 개인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얼마 전에 OTT로 집구석에서 봤습니다만. 이렇게 괴상하고 미친 놈 같은(?) 이야기를 어떻게 이렇게 로맨틱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라고 감탄했던 기억이 있어요. 이런 게 예술적 재능이라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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