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진, 고아성이 주연한 [바냐 삼촌] 보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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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고아성, 이서진이 나오는 [바냐 삼촌]을 봤습니다. 안똔 체홉 극장을 일년동안 다니면서도 이 작품은 놓쳐서 아쉬웠는데 이제서야 보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의 첫번째 감상을 엘지아트센터에서 이 배우진으로 하게 되니 뭔가 묘했습니다.


이 작품을 처음 본 거라고 말하기는 약간 애매합니다. 원전이 되는 [숲귀신]을 체홉 극장에서 이 전에 봤었기 때문입니다. 그 작품에서 바냐에 해당하는 이고르는, 옐레나를 사랑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자살해버렸습니다. 그 우울과 좌절을 [바냐 삼촌]에서 어떻게 극복하는지 더 집중해서 보게 되었습니다.


엘지아트센터는 이번이 두번째인가 세번째인가 그렇습니다. 작품을 보면서 안똔 체홉 극장이 자꾸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아마 그곳이 제게 연극의 고향 같은 곳으로 자리잡은 것 같습니다. 엘지아트센터는 무대가 저에게는 너무 크고 높습니다. 그래서 [바냐 삼촌]의 사람들이 집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것 같지 않고 실내에서도 사람들이 각자 소외되거나 방황하는 것 같았습니다. 작은 무대에서 보면 각 사람들이 타인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갇혀있는 그 느낌을 보다 확실히 줬을 텐데요. 물론 이 커다란 무대에서 개개인이 동떨어져있는 효과가 더 강할 것입니다.


이번 작품에서 의사 아스트로프가 제게 크게 와닿지는 않았습니다. 이 전에 체홉 극장에서 이 작품의 초안에 속하는 [숲귀신]을 봤을 때, 염인섭씨가 연기했던 의사의 그 몽상가적 기질이 엄청 인상깊어서 기억하고 있거든요. 그 의사는 온통 시니컬하고 지쳐있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유일하게 먼 미래를 보고 숲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과거에도 자연파괴를 감각하며 그걸 막아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좀 신기하기도 하고, 이게 꽤 보편적인 문제라고도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본 작품에서 아스트로프는 좀 건들거리는 한량에 더 가까웠습니다. 이 부분은 심은경씨가 연기하는 국립극단의 [바냐 아저씨]와 체홉 극장의 [바냐 삼촌]을 봐야 좀 온전한 비교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스트로프와 옐레나의 로맨스도 좀 갑작스러웠단 느낌이었습니다. 의사의 캐릭터가 쏘냐와 옐레나의 설명처럼 뭔가 신선하고 재미있는 구석이 관객에게도 보이면 좋을텐데, 이 캐릭터는 이 집구석(?)에 있는 다른 캐릭터들과 크게 다를 것 없는 한량처럼 느껴졌거든요. 생각할수록 아스트로프는 뭔가 더 순수하고 세상 때가 덜 묻게 보여야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극 초반에 말했던 '자기 불평이 이뤄져서 환자가 죽어버렸더니 잠을 이룰 수 없었다'의 대사가 이 캐릭터의 말투와 좀 따로 노는 느낌이었습니다.


이서진의 바냐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서진의 연기를 많이 본 적은 없고 예능에서 툴툴대는 모습으로 기억하는데 그게 바냐를 표현하는데 잘 어울렸습니다. 고아성의 쏘냐도 꽤 적역이었습니다. 이 배우의 이미지가 시골 촌구석에서 그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못하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캐릭터와 잘 맞아떨어지더군요. 참 신기하게도 심은경의 쏘냐 연기는 이렇지 않을까 하는 청사진이 갑자기 그려지더군요. 어느 정도 중성적이고 약간 맹하면서도 체념과 해맑음으로 무장한 쏘냐를 또 다르게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고아성이란 배우가 이렇게 말을 하는 배우구나 싶어서 그 말맛을 즐겁게 감상했습니다.


워낙 고전이니 따로 스포일러는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옐레나는 아스트로프와 키스를 하다가 바냐에게 딱 걸립니다. 물론 아스트로프를 향한 쏘냐의 짝사랑도 당연히 물거품이 됩니다. 바냐의 누나의 남편이자 이제 다른 젊은 여자랑 결혼해 그 집에 얹혀사는 노교수 세레브랴코프는 이 영지를 팔아치우자고 합니다. 바냐는 격분해서 자신과 가족들이 아무것도 없는 이 늙은 교수의 뒷바라지를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냐면서 소리칩니다. 분이 안풀린 그는 총을 가지고 와서 쏘지만 아무도 맞진 않습니다. 노교수와 옐레나는 이 마을을 떠나게 됩니다. 바냐는 쏘냐와 함께 남겨집니다.


이 부분에서 저는 좀 심란해졌습니다. 나이만 뒤집으면 완전히 제가 저희 부모님한테 해왔던 짓과 똑같기 때문이죠. 한국의 많은 부모들은 좋은 성적을 통한 입신양명을 꿈꾸며 자식들에게 끝없는 지원을 해줍니다. 저희 부모가 바냐이고 제가 노교수 세레브랴코프와 똑같습니다. 부모님이 저에게 소리를 지르며 너에게 얼마를 갖다바치고 모든 걸 다 해줬는데 너는 아무것도 이룬 게 없고 예술이나 떠드는 한량이라고 한다면 제가 변명거리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한편으로는 학벌주의가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에서 아주 유효한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체홉 극장에서는 [순우 삼촌]이란 제목의 로컬라이징 작품이 나올 예정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노동자'라는 계급은 결코 생략될 수 없습니다. 특히나 육체노동자의 단순하고 무미건조한 생산작업에는, 단지 돈이나 시간의 투자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지독한 무엇이 깔려있습니다. 육체노동자가 그 노동으로 번 돈을 누군가에게 보낸다는 것은 그 사람의 가장 원초적인 육체노동 자체를 바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더욱이나 그 육체노동자가 자신도 예술과 학문의 꿈을 꿨던 사람이라면, 육체노동이 천시받는 사회에서 그렇게 시간을 흘러보낸 자괴감이란 어마어마할 것입니다. 자기 인생을 육체노동에 다 바쳤는데 정작 그 육체노동의 결실은 타인의 지식인 자리에 다 가져다 바쳤습니다. 이것은 타인이 단순히 말 몇마디 보태고 위로한다고 없는 프라이드가 채워지진 않을 것입니다.


동시에 바냐가 40대 중후반의 사람으로 겪는 절망도 묘하게 공감이 됐습니다. 그저 희미한 꿈과 희망으로 육체노동에 자신을 바치며 살다보니 이룬 것도 쌓은 것도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제 무엇을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합니까? 지금부터라도? 혹은 울분에 차서 새로운 도전을? 현실적으로 너무나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40대 중반에 깨달았을 때 그것을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을까요. 앞으로도 남은 인생은 이 고된 노동과 미세한 보람으로만 이어진다면, (그리고 자신이 위안을 얻을 배우자와 자식이 딱히 없다면) 이 삶의 가혹함을 어떻게 잊어야할까요.


이 극을 보기 전에는 작은 걱정도 했습니다. 중년 남성의 슬픔을 위로해주는 기능을 하려고 젊은 여자 캐릭터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요. 그렇지만 극 전체를 보니 쏘냐의 강인함이 먼저 들어왔습니다. 바냐처럼 자기 운명에 좌절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쏘냐처럼 숙명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매일 감내하는 사람도 있는 거겠지요. 요새 살아갈수록 '강하다'는 것을 계속 고민하게 됩니다. 그 강하다는 것은 어떤 힘이 대단히 세고 뭔가를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취가 없음에도 하루하루 주어지는 삶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그 수용력 자체가 아닐까 하고요. 굳건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주변의 사람도 구해주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입니다.


쏘냐가 바냐를 위로하는 대사는 한편 참혹하기도 했습니다. 살아있는 내내 큰 행운이나 행복은 없고 죽어서 천국에 갈 때 다른 이들에게 위로와 인정을 받는다는 내용이니까요. 영광없는 삶, 영광을 꾸며내야하는 삶이란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 그렇지만 이 진실을 쏘냐가 말하며 죽음 이후의 안식과 평화를 이야기할 때 제 옆옆에 앉은 어떤 나이든 남자분께서는 흐느끼시더군요. 아마 제가 쏘냐의 위로를 가슴깊이 받아들일만큼 혹독하게 살지 않아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의 성공은 투자와 테크놀로지로 증명됩니다. 그래서 바냐 삼촌의 이 노동자 계급 이야기가 더 와닿았습니다.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반드시 단순한 노동을 해서 무언가를 만들고 나르고 그것을 쓸 수 있게 합니다. 바냐와 쏘냐와 다른 노동자들이 없으면 이 세상은 어떻게 유지가 될까요. 어쩌면 이 극 자체가 예술의 아름다움에 젖으려는 사람들에게 부드럽게 날리는 꾸중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고된 나날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만큼 더 다정한 위로의 말이 될 것입니다.



    • 예술을 보기위해 한껏 치장하고 우아한 맘과 몸으로 가는데 가서 보는것은 시궁창인 우리네 일상이라는거 

      모든 예술이 그런건 아니겠지만 그런걸 느꼈던 예술 작품들이 있었습니다. 시궁창인 우리네 일상은 아름답습니다. 

      • 저는 체홉의 작품들에서 채찬님이 말씀하신 시궁창 인생의 아름다움을 늘 볼 수 있어서 좋은 것 같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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