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과 극장에 가기

레이디버드님의 글을 보니 제가 부모님과 극장에 갔던 기억들이 떠오릅니다. 그 중에서도 제일 기억에 남는 건 이준익의 [사도]를 봤던 일입니다. 영화 자체가 좋기도 했지만 어머니, 아버지, 저 이렇게 세명이서 각자 다른 인물들에 이입해 눈물을 흘렸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아버지는 영조에, 어머니는 영빈에, 저는 사도세자에 이입해 각기 다른 장면에서 울었습니다. 인물들의 입장이 서로 다른데 비통함이라는 공통된 감정을 동시에 공유할 수 있던 것도 흥미로웠습니다. 아버지의 아들 살해라는 권력행사가 공정하게 그려진 것인지는 따져볼 수 있겠으나 각 가족에게 개인적인 이입 포인트를 나눠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이 영화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애석하게도 이후에는 이런 경험을 거의 하지 못했습니다. 조인성이 나왔던 [더 킹]에서 정우성과 조인성과 배성우가 뮤지컬처럼 춤을 추는 장면을 두고 부모님과 저 모두가 어색해 죽을 뻔했다는 이야기를 나눴던 것만 생각나네요. 다른 영화들은 보긴 봤고 집에 와서 밥을 먹었다는, 하나의 의례를 통과했던 순간으로만 남아있습니다. 윤석열의 집권과 계엄 이후 저희 가족의 최대 화두는 정치사가 되었고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 부모님께는 별볼일 없는 돈낭비가 된 것 같습니다. 저희 부모님이 이 압도적인 현실을 두고 굳이 픽션을 보며 일희일비를 추구할 이유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가족이 함께 영화를 본다는 표현은 조금은 부정확한 것 같기도 합니다. 부모님이 이 영화를 보고 싶다고 어필한 적은 한번도 없었으니까요. 부모님을 모시고 극장에 간다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부모님께 어떤 영화를 소개하는 것과 같은 것인데, 결국 가족의 공동영화관람은 저 개인의 욕망이 더 클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영화들을 보여주면 좋을까 이런 주선자의 고민도 이따금씩 하게 됩니다. 저에게는 류승완의 영화들이 꽤나 괜찮은 작품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모가디슈]를 보면서도 이걸 가족이랑 같이 봤으면 정말 좋았겠단 생각을 했으니까요. 그 영화는 극장산업이 허덕이던 때에 개봉해서 제대로 빛을 못본 감이 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정확한 재평가를 받게 될 것이라 기대합니다. [밀수]도 부모님과 보기 괜찮았을 것 같단 생각이 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조금 진중한 성격이라 쌈마이 감성이 넘쳐나는 그 영화를 조금 껄끄러워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가족들이 다 같이 보고 감동할 수 있는 영화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새삼 실감이 됩니다. 거의 모든 세대와 연령을 아우르는 보편성을 띄되, 그것이 뻔하지 않고 리드미컬해야합니다. 그러면서 한국영화 특유의 단짠맵, 눈물 코믹 감동 액션이 막 다들어가야합니다. 안그러면 저희 부모님 같은 분들은 영화보다가 졸거든요. 저희 엄마는 특히나 극장 가면 거의 인셉션 상태에 빠져버리기 때문에 이런 관객들이 안졸고 영화에 집중하게 만드는 건 정말 녹록치 않은 일입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런 영화가 근래에 하나 있어서 저희 부모님이 자발적으로 보러갔다 오셨네요. 장재현의 [파묘]입니다. 결국 어르신 세대관객을 잡기 위해서는 단순한 레트로나 소시민적 휴머니즘이 아니라 그보다 더 큰 테두리의 집단적 정체성을 자극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파묘]와 [서울의 봄]을 떠올리니 집단적 피해자 정체성을 도화선으로 삼는 게 더 유리해진 것 같기도 합니다.


가족이 영화를 보니 '가족'을 테마로 한 영화를 보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 같은 것들이요. [동경 이야기]를 같이 보는 게 어떨까 생각도 했는데요. 지 생각만 하는 자식들이 부모 고생도 몰라준다는 내용이라 자식이 부모에게 보여드리기는 좀 그렇더군요. 오즈의 다른 영화들도 생각을 해봤는데 여동생이 결혼할 때 결혼식장에서 엉엉 운 아버지를 생각하면 안보여주는 게 좋을 것 같단 생각을 했습니다. 같은 이유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들도 추천하기가 어렵더군요. 부모님이 가족영화는 그래도 집중해서 볼거라는 게 저의 순진한 기대이기도 하겠지만요.


만약 가능하다면 극장에서 부모님과 함께 구로사와 아키라의 [란]을 같이 보는 게 관객으로서 제가 가진 작은 야심입니다. 이 영화는 정말이지 저희 부모님이 한번도 졸거나 흐트러지지 않고 푹 빠져서 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고흐를 떠올리게 하는 그 진하고 화려한 색깔들과 씨지없이 움직이는 엄청난 인원의 군대들, 불타서 쓰러지는 성, 미쳐서 날뛰는 왕, 버림받은 아비(부모)... 물론 이건 제가 부모님의 취향을 파악한 것이라기보다는, 아무리 영화에 심드렁해도 이것만큼은 감동하지 않고서는 못배길거라는 자부심 같은 것입니다. 막상 보시면 또 어떻게 느끼실진 미지수지만요.


저희 부모님이 가장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는 무엇일까요... 영화에 큰 관심이 없는 저희 모친은 예전에 티비에서 틀어주던 [아포칼립토]에 넋을 뺏기고 봤습니다ㅎㅎ 정말이지 대상화로 가득찬 언피씨의 상징 같은 영화인데, 그게 또 저희 어머니께는 그렇게 흥미로웠나봐요. 평소에는 밤 아홉시면 곯아떨어지던 분이 그날에는 아주 12시까지 초롱초롱한 눈으로 [아포칼립토]의 원시적 이미지에 매료되어있더라고요. 아버지도 다큐멘터리를 좋아하시고요. 결국 서양중심적 시선으로 점철된 원시적 내용의 영화를 보는 수 밖에 없는 것일까요. 이번 설날에 저희 부모님과 저는 집에서 그 조건을 정확히 충족시키는 영화를 봤답니다. 그 영화는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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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직까지 부모님과 영화를 보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받은 일입니다. 아버지가 영화든 TV든 영상 매체에 관심이 멀어졌다 싶더니 알고보니 청력 문제였고요. 보청기를 끼고도 의사소통이 어려워진 지금은 극장 관람은 생각하기도 어렵습니다. 아직 TV시청을 즐기는 어머니는 또 다르긴 하지만, 본인 취향이 맞는 조선TV 탈북자 컨텐츠나 영성 관련 다큐멘터리만 좋아하시고요. 픽션의 세계에 관심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고 스스로 이야기하십니다. 두 분과 함께 영화관에서 마지막으로 본 영화가 뭔지 정확하게 기억이 안나는데, 너무 반응이 시큰둥해서 앞으로는 부모님과 영화 볼 일이 없겠다고 느꼈던 것만 생각납니다;;; 

      • 그렇겠군요. 그냥 영화좋아하는 자식에게 부모님이 어울려주는 걸 감사하게 여겨야겠습니다. ally님의 부모님께서 다큐를 좋아한다고 하는 걸 보니 어르신들은 어느 정도 논픽션으로 취향이 수렴하긴 하나봐요.


        나중에는 무엇을 공유하고 함께 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도 고민되네요.
    • 아버지와는 잘 안갔지만 어머니와는 비교적 자주 극장에 가는 편입니다. 어머니와 대한극장에서 비틀즈 영화 Hard day's night도 보고 그랬지요. 근데 그렇게 같이 보는 편인 것치고는 어머니와 취향이 제법 달라서 말이죠 ㅎㅎㅎ 하여튼 어머니가 기동이 불편해지시기 전까지는 최대한 같이 하려고 생각 중입니다. :DAIN_

      • 오 그래도 서로 다른 취향의 모자가 극장에 함께 가는 것 또한 멋진 일입니다 극장이라는 여행지를 최대한 자주 가실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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