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 감상

문학 속 사랑이야기] 클레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 < 문학 < 뉴스 < 기사본문 - 문학인신문


< 이처럼 사소한 것들 (Small Things Like These) >


작가 : 클레어 키건 

번역 : 홍한별 



짧지만 그 어떤 대하소설보다 긴 여운을 남기는 클레어 키건의 걸작,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는 내내 흑백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킬리언 머피 주연의 동명 영화도 티빙에서 볼 수 있네요. 

겨우 114쪽, 앉은 자리에서 한두 시간이면 완독할 수 있는 이 얇은 책은 읽는 이의 양심을 베어내는 서늘한 칼날입니다. 


1985년 아일랜드의 겨울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막달레나 세탁소'라는 역사적 비극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거창한 역사적 심판이나 고발 대신, 그저 묵묵히 석탄을 배달하며 가족을 건사하는 한 가장, '빌 펄롱'의 내면에 집중합니다. 

거대한 시스템의 폭력 앞에서, '사소한' 선의를 지키기 위해 고뇌하는 펄롱의 모습은 우리가 잊고 지내기 쉬운 인간성의 본질을 건드립니다. 


이 소설의 미덕은 '절제'에 있습니다. 

작가는 감정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대신 아일랜드의 살을 에는 추위, 검은 석탄 가루, 차가운 강물, 그리고 수녀원의 높은 담장과 같은 엄혹한 풍경을 치밀한 묘사로 쌓아 올립니다. 

이러한 미장센은 독자에게 펄롱이 느끼는 심리적 압박감을 간접적으로 체감하게 합니다.

소설은 시각적 이미지가 매우 강렬합니다. 

펄롱이 다루는 '검은 석탄'과 크리스마스의 '흰 눈', 그리고 수녀원의 '어두운 복도'와 마을의 '따뜻한 불빛'. 이러한 시각적 대비는 펄롱이 처한 도덕적 딜레마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특히 펄롱이 강물을 바라보며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중첩 시키는 장면들은 문장으로 쓰인 몽타주 기법처럼 유려합니다. 텍스트를 읽는데 머릿속에 선명한 영상이 그려지는 필력입니다. 


펄롱이 수녀원 석탄 광에서 방치된 소녀를 발견했을 때, 거대한 비명이나 액션은 없습니다. 오직 펄롱의 거친 숨소리와 수녀원장의 싸늘한 미소만이 오고 갈 뿐입니다. 

"못 본 척하면 내 가족은 안전하다"는 유혹과 "이걸 보고도 모른 척한다면 거울을 똑바로 볼 수 있나"라는 양심 사이의 줄타기. 이 내적 갈등을 다루는 작가의 솜씨는 스릴러 영화의 긴장감을 능가합니다. 

클레어 키건은 불필요한 문장을 단 하나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문장은 마치 펄롱이 나르는 석탄처럼, 투박하지만 불을 붙이면 뜨겁게 타오르는 에너지를 품고 있습니다. 

작가는 아일랜드의 어두운 역사를 다루면서도 선동적인 어조를 피합니다. 대신 독자에게 카메라 렌즈를 쥐여주듯, 상황을 응시하게 만듭니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말하는, 문학이 줄 수 있는 최상의 경험입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빌 펄롱'은 마블 영화의 히어로가 아닙니다. 그는 다섯 딸을 키우는 평범한 가장이자,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콤플렉스를 가진 인물입니다. 

펄롱은 말이 아닌 행동과 눈빛으로 서사를 이끌어갑니다. 수녀원장이 건네는 뇌물(크리스마스 보너스 봉투)을 받아 쥐고 갈등하는 그의 손 떨림, 추위에 떠는 소녀에게 자신의 코트를 덮어주는 투박한 손길. 

그는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발을 내딛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그의 선택은 그 어떤 초인적인 활약보다 더 위대하고 숭고하게 다가옵니다. 

작가는 펄롱이라는 인물을 통해 "악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눈을 돌리고 침묵할 때 완성된다"는 한나 아렌트적 통찰을 문학적으로 완벽하게 구현해 냈습니다. 

배우 킬리언 머피가 왜 이 역할을 원했는지 이해가 갑니다. 


소설은 펄롱의 선택 직후 멈춥니다. 우리는 그 선택으로 인해 펄롱과 그의 가족이 겪어야 할 고난을 역사적 사실을 통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권선징악의 명쾌한 사이다 결말을 원하는 독자에게는 이 열린 결말이 불안하고 무책임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라고 묻고 싶어지죠. 

하지만 작가는 그 대답을 독자의 몫으로 남깁니다. 결말 이후의 현실을 상상하게 될 때 오는 먹먹한 두려움, 그 불편함이야말로 작가가 의도한 바일 것입니다. 


소설 속 펄롱은 자문합니다.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제목 그대로 '사소한' 친절과 용기가 어떻게 한 사람의 영혼을, 그리고 세상을 구원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책을 덮을 때 가슴 한쪽에 묵직한 통증이 느껴집니다. 그것은 슬픔이 아니라, 얼어붙었던 양심이 녹으면서 생기는 선연한 감각일 겁니다. 

이 책은 분량은 짧지만 가벼운 소설이 아닙니다. 춥고 어두운 겨울, 촛불 하나를 켜는 마음으로, 인간으로서 우리가 지녀야 할 최소한의 품위가 무엇인지 묻는 가장 엄숙하고 고통스러운 질문입니다. 

펄롱처럼 문 앞에 섰을 때 나는 과연 그 문을 열 수 있을까 깊이 고뇌하는 당신에게, 이 책을 추천합니다.

    • 영화는 잘 보았는데 소설까지 읽을 생각은 못했네요. 적어주신 글을 보면 소설을 꽤 충실하게 영화화한 느낌인데 둘을 비교해도 흥미로울 듯 합니다. 클레어 키건은 영화 '말없는 소녀'의 원작 단편만 하나 읽었지만 언젠가는 다른 책들도 보고 싶습니다.    

      • 짧은 소설이지만 문장을 하나하나 곱씹어 읽게 되는 무게가 있습니다.


        클레어 키건은 언젠가 노벨문학상을 받을 것이라는 예측에 동의가 됩니다.

    • 작품의 장점을 세밀하게 잘 적어주셨어요. 이 소설은 짧은 분량 안에 다듬고 정제된 전개가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덧붙이는 식이 아니고 빼는 식으로 내용을 채우는 게 아주 공들인 느낌이 들고 여운도 남게 하는 작품이었어요. 후기 잘 읽었습니다.  

      •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글을 읽고 '나 이거 올해 영화로 봤는데!!!' 하고 검색을 했는데 아무리 검색해도 안 나와서 왜 그런 걸까 좌절하다가... 가까스로 깨달았습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 하하;




      그때 소감 글에도 적었지만 참 깝깝하고 우울한 이야기이면서 결말도 밝지 않은데, 그 결말을 해피 엔딩으로 받아들일 것이냐 말 것이냐... 를 두고 관객을 시험에 들게 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최소한 영화는요. ㅋㅋ 엄연한 현실의 무게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해피 엔딩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게 아닐까 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야 우리 사는 팍팍한 세상에 일말의 희망이라도 품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엄머? 떡하니 제목 오타가... 너무 자연스러워 오타인지도 몰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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