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인상깊었던 영화 리스트

일단 저에게 25년도는 살면서 가장 열심히, 많이 극장에 가서 영화를 봤던 해였습니다. 비록 내란 때문에 3월까지는 극장에 잘 가질 못했지만 4월부터는 극장에 열심히 다녔습니다. 올 한해 영화를 몇편이나 봤는지 체크해봤는데 정말 놀랍게도 딱 100편 정도더라고요. 아무리 3개월을 빼먹었어도 100편정도밖에 보지 않았다는 게 충격이었습니다. 올해는 극장을 다니면서 저 스스로 질릴 정도로 열심히 다녔다는 감각이 있었거든요. 지인들도 또 영화보러가? 하면서 질려했고요. 그런데도 100편이라니... 


작년 한해는 제가 씨네필이 아니라는 걸 실감하는 한해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시네마 천국]의 토토처럼 유년기부터 영화에 매혹되어 영화를 미친 듯이 보러 다니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연말에 영화를 취소하거나 예매하고 안간 일들이 은근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친구한테 '내가 이 컨디션으로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면 행복할까...?' 라며 자조적인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평론가들이나 씨네필들이 꼽는 최고의 작품들에서 큰 감흥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영화는 최초의 감상이 가장 온전하게 영화를 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고 생각하는데, 그걸 놓쳐버리고 이게 뭐가 그렇게 대단한건지 혼자 여러번 곱씹으면서 살짝 자괴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나 [그저 사고였을 뿐] 같은 영화들이 특히 제게 더 그랬습니다. [그저 사고였을 뿐]은 첫번째 볼 때 자다가 결말만 알아버려서 나중에 다시 볼 때 그 충격이 정확히 오지 않았고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제 안의 변혁에 대한 열망이 좀 소진되었을 때 봐서 그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극장에 간다는 게 꽤나 소모적인 일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일단 극장에서 두시간동안 앉아있어야하는데 이게 꽤나 피로한 일입니다. 그리고 정성일 평론가님의 해설을 들으면 거의 네시간 다섯시간까지 착석시간이 늘어나는데 이렇게 계속 앉아있는 게 나중에는 점점 고역이 되더라고요. 극장에 오가는 왕복시간은 아무리 짧아도 30분 30분 해서 1시간 정도 걸립니다. 그러니까 밤에 퇴근하고 영화를 보러가면 7시부터 11시까지 극장에 있다가 집에는 12시에 도착하고 이런 일이 꽤 있었습니다. 매일 야근을 뛰듯이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데 나중에는 몸이 안따라가더군요. 그래서 얼마 전 [사운드 오브 폴링]도 예매해놓고 일부러 안갔습니다. 집에서 뒹굴거리면서 유튜브를 보는데 너무 안락해서 좀 슬프기도 했습니다 ㅎㅎ 그리고 제가 가고 싶었던 기획전들(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은 인기가 왜 그렇게 많은지 보고 싶은 시간대는 막 매진이고 이러더라고요.


그런고로 저는 어떤 영화가 훌륭했고 명작이었는지 평가할 여건 자체가 안됩니다. 그저 올해 개봉작 중 저에게 인상깊었던, 지극히 개인적인 작품들만 추려볼까 합니다. 순위가 아니라 그냥 기억나는대로 순서를 작성한 것이니 편하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2025 한국영화


올해 저에게 인상적인 한국영화들을 추리기 전에, 먼저 상업영화의 실패부터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25년에 가장 경쟁이 치열하고 대중들을 극장으로 유인시킬 분기점으로 보였던 게 [좀비딸], [악마가 이사왔다], [전지적 독자시점]의 3파전이었는데요. 이 세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정말 실망했습니다. 세 작품 다 안이하게 찍힌 티를 감출 수가 없더군요. 특히 [악마가 이사왔다] 같은 경우에 저는 스피드 쿠폰으로 봤는데도 도저히 못버티고 20분쯤에 나왔습니다. 그냥 재미가 없는 수준이 아니라 이걸 내가 왜 보고 있어야 하는지 심각하게 자문하고 있었습니다. 이 세 영화를 연달아 보고 나서 한국 상업영화에 대한 흥미가 뚝 떨어졌습니다. 그나마 [좀비딸] 같은 경우 장애아동을 돌보는 부모나 장애아동과 공존하는 사회에 대한 은유로 읽을 가능성이 있었지 나머지 두 작품은 보면서 내내 괴로웠습니다.


저는 이제 한국영화들이 대중적으로 흥행한 웹툰이나 웹소설 IP를 무턱대로 영화화하지 않기를 바라게 됐습니다. 애초에 이 원작들은 진입장벽이 낮고 특정 장르층에만 수용도가 높은 특징이 있습니다. 이를 현실의 인간과 공간으로 구성해서 영화로 만드는 게 쉽지 않습니다. [전지적 독자시점]은 게임의 세계와 이를 동시송출하는 플랫폼 중계로 본인의 전지전능을 뽐내고 싶어하는 유아적 욕망만이 그득했고 오리지널 각본인 [악마가 이사왔다]는 제가 참고 본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배우의 차력쇼로만 버틸려는 게 황당했습니다. [좀비딸] 역시도 느슨한 장르의 인용으로 중간중간 코메디만 넣었는데 초반에는 정말 나가고 싶었습니다.


25년 개봉한 한국 영화들 중 인상깊었던 작품들은 전부 다 독립영화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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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지나가면] 


오죽하면 저는 이 작품을 교육부가 강남 쪽 학부모들에게 강제관람을 시켜야한다는 생각마저 했습니다. 이 작품이 풀어놓는 것은 단순히 부잣집 아이와 가난한 집 아이의 갈등이 아닙니다. 내신을 위해 잠깐 '농어촌' 지역으로 내려온 기준이, 부모 없이 살아가는 영준과 영문 형제를 만나 갈등이 시작됩니다. 오로지 성적이 최고이며 모든 걸 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기준의 부모, 그런 부모 아래에서 자라난 기준, 어떤 경제적, 사회적 지원도 없이 도둑질과 갈취를 동원해 살아나가는 영문 형제, 이들에게 무관심한 지역사회의 어른들... "나쁜 친구랑 놀지마"라는 부모의 충고는 얼마나 알량한지, 그리고 그 나쁨이라는 도덕적 실패가 어떤 사람들에게 얼마나 필연적인지 영화를 보면서 돌아보게 되죠. 살벌한 분위기를 내뿜는 영문 역의 최현진 배우가 강렬하지만 같은 반 친구를 은연중에 깔보는 기준 역의 이재준 배우도 눈도장을 찍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기준을 도련님이라 비웃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 지 모르겠습니다. '나쁜 친구'들과는 적당히 거리를 둬야했던 중산층의 도련님, 아가씨 출신들은 좀 서늘해져야 맞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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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고기]


폐지줍는 노인의 이야기를 영화로 찍는다고 하면 누구나 상상하는 그런 드라마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 예상을 보기좋게 다 깨부숩니다. 폐지를 줍는 노인이, 꽤나 근사한 양옥에서 혼자 살고 있는 설정부터 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이 영화가 주제를 던지기 위해 택한 코메디의 전술은 그 자체로 유효하면서도 이들이 인생을 받아들이는 해학적 태도도 반영합니다. 이 영화는 형식이 주제를 이끌고 나가는 모범적 사례가 될 것입니다. 처참한 삶 속에서도 이 노인들의 유쾌한 분투는 멈추질 않습니다. 그렇지만 역시 질문해야합니다. 왜 고기를 사서 먹지 않고 훔쳐먹는가? 왜 이들은 보다 착한 노인이 되지 않는가? 안그러면 이들의 일화에 악플부터 다는 그런 평범한 시민으로 전락하고 말겠죠. 웃기면서도 투쟁적인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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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학년 2학기]


대한민국의 평범한 고등학생들은 대학교를 갑니다. 아무리 공부를 못해도, 아무리 학문에 뜻이 없어도 일단 수능시험을 치르고 갈 수 있는 대학을 골라서 갑니다. 그리고 아예 다른 선택지를 고른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처음으로 발을 들인 사회는 차갑고 어른들은 종종 강압적이며 비겁합니다. 무엇보다도 현장은 위태롭습니다. 이 모든 것을 자신의 삶으로 묵묵히 받아들이는 과정을 찍은 것이 이 영화입니다. 그 안에서도 누군가는 적응을 하고 차근차근 성장해나갑니다. 죽음이 도사린다는 문장과 평화로운 일상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분명한 건 이 고등학교 3학년들의 그 어떤 선택도 응원하게 된다는 겁니다. 자칫하면 노동자 프로파간다를 주인공의 삶이 소모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떤 노동자들의 일상이라는 걸 담담하게 보여주는 이란희 감독의 절제력에 은은하지만 가볍지 않은 감동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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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70]


탈북자인데 게이라면? 혼재된 정체성은 영화적 설정이 아니라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내부인과 이방인의 시야를 장착시킵니다. 철준은 게이들의 모임에 나가지만 그 안에서도 탈북자라는 정체성으로 또 다른 소수자의 위치에 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이내 그 안에 녹아들며 자신을 도와주는 영준과 함께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자신감도 찾습니다. 그리고 대입도 차근차근 준비해갑니다. 연애도 하고 싶고 커리어도 쌓아나가고 싶은 철준의 모습은 남조선 청년들과 하등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 같음과 다름 사이에서, 설렘과 실망 사이에서, 차가움과 뜨거움 사이에서, 탈북자 친구들과 남한 친구들 사이에서 영화는 헤매고 또 어지러워합니다. 25년 봤던 한국 영화 중 제가 가장 "취했던" 기분이 드는 영화를 꼽으라면 단언코 [3670]을 뽑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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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주인]


저는 '주인'과 같은 여고생을 한국영화에서 만난 적이 없습니다. 괄괄하고... 씩씩하고... 싹싹하고... 이런 쾌활 똑순이만으로는 이 캐릭터가 설명이 안됩니다. 저는 서수빈이 연기하는 주인의 그 생명력에 압도당했습니다. 키스와 이별, 연대와 저항, 트라우마와 현재의 행복을 온 몸에 가득 담은 채로 모든 증상을 발현시키며 주인은 살아나갑니다. 정체성이라는 관념에 맞서 이 영화는 보다 정확한 관념과 해석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를 그 답으로 내놓고 있습니다. 영화는 행복할 수 있어야한다는 이 명제를 당위로 풀지 않습니다. 이미 주인이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디테일에 대해 여러 이야기들이 오가지만 저는 그 논쟁에 딱히 말을 얹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완전히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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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서사]


[세계의 주인]과 이 영화를 한 해에 나란히 보게 되면서 제가 한국 영화의 어떤 흐름 안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서울예대 황금폰 사건의 주인공들이 사적으로 기록한 이 영상은 관객들을 웃기고 질겁하게 합니다. 인간의 삶은 사건에 집어삼켜지지 않고 투쟁의 시간은 그 가운데 가운데 잔잔바리의 행복한 순간들이 보석처럼 박혀있습니다. 이 영화는 시간과 기억에 대해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괴로운 시간 속에서 행복한 것들을 기록하고 남기기로 했다면, 그는 어떤 시간을 살아온 것이 되는 것일까. 존엄을 지키는 가장 유효한 수단은 아무튼 즐겁고 행복하(려고 하)기일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영화가 제가 남긴 것은 단순한 연말 버프가 아닙니다. 저는 이 영화를 어떤 사람들에게 증거로 제시하고 싶습니다.


2025년의 해외영화


작년 한해 가장 인상깊었던 외화들은 영상자료원이나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기획전으로 개봉했던 작품들이었습니다. 특히 25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씨네바캉스라고 여름에 했던 기획전의 작품들은 제게 굉장한 감흥을 남겼습니다. 그동안 숱하게 제목만 들었던 고전 명작들을 볼 수 있었던 게 정말 큰 수확이었습니다.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펑쿠이에서 온 소년]과 [동동의 여름방학], 호금전의 첫 영화 [대취협], 장철의 [금연자], 하세베 야스하루의 [길고양이: 폭주 여보스], 마이클 허즈와 로이드 카우프먼의 [톡식 어벤저], 홍상수의 [강원도의 힘]... 그 어느 하나도 예사롭지 않은 작품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가 사랑해 마지 않는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초기작 [브루드]를 볼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초기작은 좀 아쉽고 어설픈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은 호흡이 최근 작품보다 살짝 길긴 하지만 육신의 변형과 폭력이라는 크로넨버그 특유의 개성이 그대로 살아있더군요. 영화를 보면서 몇번이나 전율했습니다. 저는 이 감독에게 받는 정신적 상처가 황홀하기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25년 한 해 개봉한 외화들 중 인상깊은 작품들을 뽑아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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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5일 위험한 특종]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검은 9월단의 뮌헨 올림픽 테러 사건을 다룬 영화입니다. 특징이 있다면 티비 보도국의 입장에서 계속해서 사건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면서 이걸 어떻게 내놓아야하는지 외부자의 위치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방송국에 모인 사람들은 다 나름의 프로페셔널들이고 자신만의 원칙이 있습니다. 한참 내란이 진행 중이던 25년 2월에 이 영화를 봐서 그런 것일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영화의 긴장감과 속도감은 언제 보아도 진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언제쯤 되어야 한국영화는 뻔뻔하고 악랄한 악당에 맞서는 신파적 정의가 아니라 이렇게 모두의 협의와 혼란 속에서도 뭔가를 해내고 실패하는 이런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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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맨]


저는 이 영화를 완성도로 뽑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너무 착하려고 용을 쓴 것처럼 보일 것이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슈퍼맨의 위엄과 신성을 모독한 영화처럼 보일 것입니다. 영화는 종종 제임스 건 특유의 자기연민에 빠지기도 하고 '보통 사람'을 강조하는 슈퍼맨이 너무 땅에만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제가 팔레스타인 집회의 행진을 할 때마다 던지던 질문에 기꺼이 몸을 던졌습니다. 슈퍼히어로들이 세상을 구하는 존재라면, 그들은 이 팔레스타인 학살의 참사에 왜 이리 조용한가. 저는 극장에서 이 질문에 답을 하는 슈퍼히어로를 극장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영화 속 슈퍼맨은 이 현실의 폭력에 분명한 답을 했습니다. 이 우직함을 외계인의 품성이 아닌, 캔자스의 어설프고 흑역사 투성이인 클락 켄트에게서 찾을 수 있다고 영화는 말합니다. 물론 무지하게 미국적이죠. 그리고 이 영화가 어필하는 '평범한 미국스러움'에 희망을 품게 됩니다. 미국인들이 이 영화를 흥행시키며 화답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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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년 후]


어떤 시리즈의 후속편이 오랜 시간 후 돌아올 때는 그만한 내재적 명분이 있어야 합니다. [28년 후]는 [28일 후]를 너무나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그 걸작의 뒤를 이을만한 자격이 있는지 기대 반 걱정 반의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을 보면서 이 작품이 다시 태어나야 할 이유를 납득했습니다. 이 영화의 세계는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된 자체가 아예 태어날 때부터의 기본적 세상이 되어있습니다. 이 내적 설정은 청년 세대에게 '좀비'라는 장르물이 너무 익숙해지 현재의 영화 시장과도 맞물려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진지한 질문을 던집니다. 흉포하게 달려들고 서로 전염을 시키는 사람들을 "뛰는 좀비"로 통칭해서 배제하면 되는 일인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영화는 그 질문을 계속 던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호로 꼽는 후반부의 장례 장면도 저는 투쟁 후의 다정한 시간으로 충분히 받아들였습니다. 후속작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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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비아의 사막]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주인공인 카나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영화 직후 정성일 평론가의 지브이를 듣고 나서야 이 인물의 행동과 심리를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영화는 주인공을 계속 쫓아다니는데 이 주인공의 내면이 전혀 들여다보이지 않습니다. 카메라도 그를 해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보고 있는데 알 수도 따라갈 수도 없는 이 인간이 괴물처럼 보였습니다. 이 영화는 도덕에 관한 영화가 아닙니다. 주인공 역시도 딱히 도덕적인 인간은 아닙니다. 현대 사회에서 낯선 존재로 남아있기를 계속 자처하는 인물과 카메라의 태도에 놀랐습니다. '엉뚱한 MZ 소녀' 따위의 문구로는 다가갈 수도 없는 이 영화에 압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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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티리얼리스트]


셀린 송의 전작인 [패스트 라이브즈]를 그렇게까지 인상깊게 보지 않아서 적당히 기대를 내려놓고 갔습니다. 웬걸,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저는 이제 셀린 송의 무슨 작품이든 다 챙겨본다고 결심했습니다. 전작에서 이야기하던 운명론은 현대 사회의 물질적 게임인 연애, 즉 현대인들의 짝짓기에서 유쾌한 사회실험으로 그려집니다. 모든 조건이 완벽한 남자에게 끌리는 것이 당연한가, 무일푼에 앞이 안보이는 전남친에게는 왜 끌리는가. 수많은 연애 관찰 프로그램이 범람하는 이 시대에 셀린 송은 로맨스 장르가 왜 필요한지 증명했습니다. 초반 30분간 저는 이 영화에서 그려내는 "썸"에 완전히 취해있었다는 걸 고백합니다. 패를 감추고 허세를 부리는 연애 사짜들의 일반적인 패턴입니다. 이 영화는 진정한 고수들이 자기 패를 다 까놓고도 품위와 매력을 계속해서 발산합니다. 솔직하지만, 은밀할 수 있으니 그게 연애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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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마]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기획전으로 틀었던 루크레시아 마르텔의 작품 중 하나입니다. 영화는 스페인 식민지에서 도시로 발령이 나길 기다리는 판사 자마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는 도대체가 정을 붙일 수 없는 인간입니다. 영화 시작부터 나체의 원주민 여자들을 보다가 걸려서 도망가고, 이내 자기 지위를 내세우며 여자의 뺨을 때리고 적반하장으로 구는 파렴치한이니까요. 그는 내내 다른 공작 부인에게 음란한 시선을 던지고 아니면 자신의 전근을 위해 상사에게 감언이설만 던지며 부하들에게는 쓸데없이 자존심만 부립니다. 그리고 영화는 이 추접한 인간의 권태를 담습니다. 이 영화의 기괴한 나른함과 마비된 듯한 감각은 보는 사람을 아리송하게 만듭니다. 권태는 내 자신이 세상의 무자극에 느끼는 내부의 반응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세계에 녹아들지 못한 채 겉도는 소외감의 한 종류일지 모릅니다. 



26년에는 제게 더 정확한 인연이 되는 영화들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지난주 28년 후를 봤습니다. 함량 미달이라는 얘기가 많고해서 잊고 있다가 연말에 시간이 되어서 봤어요. 
      중간 지점까진 잘 치고 나갔는데 닥터 켈슨이 나오는 부분부터 진전이 없더군요. 
      3부작이라 하더라고 뭔가 더 발전시켰어야 하는데.. 역시 기대감을 낮추고 봐서 그런지 그런대로 흥미있게 감상했습니다. 
      2편, 뼈의 사원은 다음주 미국 연휴 주말을 기해 개봉하는군요. 
      • 그런 지적이 많더군요. 영화 중반부까지 보여주는 좀비 액션물의 장르적 완결성에서 그렇게 느낄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영화 초중반까지 이어지는 호러 장르가 단순히 장르적 게임이 아니라 아이인 주인공의 입장에서 굉장한 스트레스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고 아버지의 세계에서 폭력성을 체득하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중후반부 어머니의 세계와 대비되는 구조에서 크게 이상하지는 않다고 느꼈습니다. 죽거나 죽이거나 하는 그 스트레스에서 좀 벗어나 죽음이라는 상태 자체를 보다 객관적으로 받아들이라는 하나의 의식처럼 느껴졌습니다. 대니 보일이 일부러 의도했다고 생각했고 거기에 수긍했네요. 이 영화가 일반적인 '좀비 장르'에서 불러오는 서바이벌의 흥분과 쾌감을 더 고찰해보자고 하는 게 계속 느껴졌기 때문에...

    • 글 잘 읽었습니다. 100편을 극장에서 보셨다니 업으로 하지 않는 일반인인데 엄청난 편수라고 생각합니다. 


      언급하신 한국 영화들은 그 동안 좋은 평을 많이 봤지만 글을 읽으니 꼭 챙겨봐야겠다는 마음이 다시금 생기네요. 지난 해 한국 영화를 거의 안 봤어요. 외국 영화는 리스트 중에 '9월5일 위험한 특종, 28년 후, 머티리얼리스트' 세 편을 봤는데 Sonny 님 만큼은 아니라도 괜찮게 보았고 그 중 '28년 후'가 제일 인상적이었습니다. 시각적인 즐거움도 있었고 뭔가 이어질 시간에 대한 희망도 심고 있고요.

      • 주변에는 일년에 150편 200편씩 보는 분들이 많아서 좀 적게 느껴지더라고요. 올해부터는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제 추천으로 좋은 영화들과 인연이 되면 제가 굉장히 기쁠 것 같네요. [28년 후]를 재미있게 보셨다니 또 반갑습니다.

    • 저도 이 리스트에서 본 작품 수는 많은데 나중에 집에서 감상한 게 대부분이라 좀 부끄럽군요. 하하;; 저같이 극장 자주가던 사람도 이런 현실인데 100편이나 보신 게 대단합니다.




      국내는 참 좋은 독립영화는 많이 나왔는데 상업영화 쪽이 너무 빈약하네요. 현재 촬영중인 극장용 영화가 없는 수준이라던데 말이죠.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김초희 감독 신작이 정유미, 변요한 캐스팅까지 완료됐는데 투자 안되서 엎어졌다는 소식도 들렸구요.




      해외는 슈퍼맨 꼽으신 이유가 재밌으면서도 충분히 공감이 됩니다. ㅋㅋ

      • 한국 상업영화는 거의 전멸입니다. 이제 다시 20세기의 '방화' 시절로 돌아간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더더욱 고전명작들이 수없이 재개봉을 하는 이 시기에는 더 그런 것 같아요.


        [슈퍼맨]이 담고 있는 그 정의로움이 한국에서 잘 전달이 안된 것 같아 아쉽습니다. 저는 트럼프 시대에 이런 영화를 대놓고 찍는 제임스 건의 배짱을 다시 봤네요. 영화 시작부터 울컥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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