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두 잡담

어느날 서점에서 잡지를 뒤지다 동공이 확 벌어지는 기사를 봤습니다. 버추어파이터가 PC용으로 나온다는 거였어요. 그것도 곧 나올 예정인 윈도우 95용으로. 윈도우 하면 게임에는 꽝이다라는 게 일반적인 인식이었는데 신버전 윈도우는 단순히 이전 버전에 비해 게임이 더 잘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오락실 게임중에서도 정점이라 할 버파가 된다는 겁니다.

그때 오락실엔 이미 버파2가 돌아가고 있던 때니까 버파1이 나온다는 건 뒷북이긴 하지만 그래도 오락실 게임과 pc 게임 사이엔 넘사벽이 있다고 생각하던 시절이라 놀라지 않을 수 없었죠. 하지만 자세히 읽어봤더니, 윈도우 95의 성능이 마법같이 좋아서 그런건 아니고(그럼 그렇지...) 특수한 하드웨어를 추가로 장착해야 가능하다는 거였습니다.

그 특수한 하드웨어라는 게, 엔비디아라는 듣도보도 못한 회사에서 만든 신형 그래픽카드였습니다. 단순 신제품이 아니라 pc 사용자들에게는 신개념의 제품이었죠. 이름하여 3D 가속기. 그런 놀라운 물건이었지만, 그 엔비댜의 첫 작품은 사람들 관심도 못끌어보고 조용히 망했습니다. 아마 지금은 그런게 있었다는 걸 아는 사람도 별로 없지않을까 싶네요. 버파는 뭐 1년인가 뒤에 가속기 없이 시퓨발만으로 돌리는 PC 버전이 나왔고....

엔비댜의 첫 작품은 시장에선 망했지만 그래도 업계사람들한테는 깊은 감명을 주었나봅니다. 여기저기서 그 3D 가속기란걸 내놓기 시작했습니다. 하기사, 그래픽과 사운드가 딸려서 그렇지 그외 다른 성능은 늘 PC가 게임기 같은 걸 압도해왔거든요. 사운드쪽은 사운드카드가 장착되면서 그때 이미 따라잡은 상태고, 그래픽도 별도 그래픽 카드가 보조해 준다면(IBM에 기본 그래픽인 VGA는 단순히 비트맵 표시만 되는 물건이었으니까....) 어쩌면 오락실 기계까지 넘어설 지도...(당시엔 그게 그냥 상상이었습니다만.)

전통의 그래픽카드 명가및 신생 벤처기업들에서 이런저런 상품들이 나왔지만 다 시장에서 고전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어머 이거 꼭 사야돼!"라는 확신을 준 물건은 없었거든요. 그래도 게임업계에선 조금씩 3D 가속을 지원하는 게임들을 패치 형식으로 내놓기 시작했고, 97년 쯤에 고만고만하던 3D 가속기 시장에서 드디어 강자가 나왔습니다. 3DFX라는 듣도보도 못한 회사에서 내놓은 부두였죠.

부두를 알린 킬러 소프트는 퀘이크였습니다. 당시 PC 게임 기술의 집대성이었던 퀘이크는 가속 여부와 상관없이 이미 화제성으로 탑을 찍고 있었는데, 이 퀘이크의 3D 가속 버전이 단순히 '가속'만 된 게 아니라 소프트웨어로 돌리는 버전과는 천지차이의 모습을 보여준 거죠. 그리고 이런 저런 3D 가속기들 중에 부두에서 돌렸을 때 속도와 이런저런 시각효과등에서 압도적인 차이를 보였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툼레이더 역시 부두용으로 패치된 버전이 최상의 퍼포먼스및 화면을 보여줬습니다. 당대 최고의 화제작들의 인기를 등에 업고 부두는 순식간에 게이머들이 너도나도 가지고싶어하는 동경의 대상으로 등극합니다. 그전까지는 PC용의 수많은 추가장비들이 그래왔듯이 3D 가속기란 물건도 사람들이 굳이 있어야할 필요성을 못느끼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3D 가속의 시대, 아니 부두의 시대가 왔습니다. 일단 사람들이 가속기의 필요성에 눈을 뜨게 되자 게임업체들이 너도나도 3D 가속을 지원하는 게임을 내기 시작했고, 부두는 그와중에 계속해서 선두를 지켰습니다. 부두의 성능은 그만큼 압도적이었죠.

나왔던 당시로서 부두의 또다른 장점은 이게 온전한 그래픽 카드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메인 그래픽 카드는 따로 있는 상태에서 3D 그래픽만을 전문으로 처리하는 보조장비였죠. 그게 왜 장점이냐면, 아직 2D의 세상이었으니까요. 당시 부두 뺀 나머지 가속기들은 전부다 2D 그래픽 처리까지 하는 그래픽카드들이었는데, 그 2D 성능이 소수의 몇을 빼면 그저그랬거든요. 지금 쓰는 그래픽 카드 성능에 불만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비싼 신상인 3D 가속기를 남들보다 먼저 살 사람이면 이미 2D 그래픽도 고오급으로 맞춰놓은 사람일테죠) 그래픽 카드를 바꾸는 리스크 없이 3D 그래픽만 전문으로 처리해주는 부두가 이득이죠. 컴퓨터를 새로 사는 사람이라면 2D,3D 따로 사야해서 부담이 되겠지만....

3DFX가 어느날 하늘에서 뚝하고 떨어진 회사는 아니고, 원래 오락실에 그래픽 기판 납품하는 업체였다고 하네요. 부두도 원래 오락실용으로 쓰던걸 PC에서 쓸수 있도록 만들어 시장에 내놓은 거였는가 봅니다. 그러니 기술력이 앞서갔었던 거겠죠. 3DFX의 또다른 장점은 게임 개발/실행 환경을 남들보다 더 잘 닦아놨다는 겁니다. glide라는 이름의 독자 환경으로 그래픽을 관리했죠. 어쩌면 3DFX나 부두보다 glide가 더 친숙한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겠네요.
다른 회사들은 DirectX의 일부인 D3D를 쓰거나 OpenGL에 의존했는데, 초기의 d3d는 그닥 쓸만한 물건이 못되었고, opengl은 애초에 PC에서 쓰라고 있는게 아니었으니까요. opengl 지원은 게임에서 쓸만한 것들만 모아 간략화시킨 minigl을 쓰고 있었는데 minigl도 부두가 최고의 성능을 보여줬습니다. 애초에 퀘이크가 minigl을 쓰는 게임이었죠. 

이렇게 남들보다 앞서간 기술력도 있지만 glide와 d3d이 차이는 결국 맥과 pc의 차이와도 비슷한 면이 있죠. 온갖 제품들을 다 관리해야하는 d3d와 달리 3dfx는 부두 하나만 관리하면 되니까.

어쨌든 이렇게 glide가 월등한 성능을 보이자 게임회사들도 부두를 편애합니다. 도스 게임이 3d 가속을 하려면 glide말고는 뭐 방법이 없고요.(powrvr 같은 몇몇 물건이 도스 패치를 내긴 했지만 세력도 성능도 딸려서...) 윈도우 게임들도 glide만 지원하거나 d3d는 마지못해서 '실행은 되게 해 줄게'에서 그친 경우가 많습니다. 같은 게임을 돌려도 d3d에서 할때와 glide에서 돌릴때 다른 화면이 나왔죠.

하지만 부두의 천하는 오래는 못갔습니다.
시장 지배자가 된 3dfx가 자만심에 빠져서 판단실수를 거듭했고, 처음엔 앞서나가던 기술력도 남들이 죽어라 따라오는 동안에 제자리걸음을 해서 결국 추월당해 버렸죠. d3d도 버전을 계속 올리다 보니 glide를 따라잡았고, 그래서 대충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부두는 게임회사들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고 좀 지나고 나면 그냥 지원목록에서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엔비댜의 세상이 와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죠.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3D 가속이란 걸 알린게 부두였으니 그걸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그 임팩트는 아직도 여전합니다. 그리고, 회사 망한지 한참 지났지만 부두는 여전히 현역입니다. 아니 부두 보다는 glide가.
엔비댜가 그래픽카드 시장을 휘어잡고, 2D 그래픽이란게 걍 소멸하고 모든 그래픽 처리를 3D로 다 하게 되면서 3D 가속기란 개념조차 사라졌고 이젠 d-X 버전이 몇이냐로 그래픽 성능을 논하고 있지만, 그 d-X의 호환성이 그지같아서요. 부두가 전성기이던 시절의 게임들을 요새 돌리면 D3D 호환성 문제로 거진 다 안돌아갑니다. 그런데 glide 모드로 돌리면 잘 되거든요. 실물 부두는 없으니 glide 래퍼를 쓰죠. glide 명령을 d3d 명령으로 바꿔서 돌리는 거.

부두가 아무리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던 물건이라 해도 30년 전 이야기고, 지금은 똥컴에 달린 최악의 그래픽 카드/칩이라 해도 부두의 성능은 아득히 추월했으니까요. 그래서 원래 부두에선 못하던 이런저런 기능개선을 해볼 수도 있고 뭐...
그리고 그렇게 부두를 에뮬레이트(?)하던 프로그램들은 부두만 처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부두 이후 시대의 d-X 호환성을 에뮬레이트하는 용도로 확장되어 이제는 고전게임을 돌리는데 필수품이 되어 여전히 수많은 컴퓨터에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확장되었어도 이름은 여전히 무슨무슨glide/ 무슨무슨부두 이렇게 붙어있죠.(scumm 지원 프로그램으로 시작했다 지금은 걍 만능 게임에뮬이 되어버린 모 scummvm처럼...)

도스박스에서도 부두 에뮬레이션이 최종목표로 거론되고 있나봅니다. 부두도 일단은 도스가 현역이던 시절에 나온 하드웨어이고 부두를 지원하는 도스 게임들도 여럿 있으니까. 하지만 사실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도스박스 안에 윈도우 9x 깔아놓고 윈도우용 glide 게임을 돌리겠다는 게 본심이죠. 도스박스 자체 내장 부두 에뮬레이션은 아직 속도문제로 갈길이 멀지만 래퍼와 병행해서 돌리면 대략 90년대 게임들은 예상외로 잘돌아갑니다. 실은 제가 요즘 한동안 도스박스에서 부두 돌리는 거에 빠져있었어요. 딱 제가 최신 게임에 관심을 끊기 직전의 시기가 부두의 전성기였어서....ㅎㅎ





3dfx 로고. 게임 시작할 때 저게 뜨면 뭔가 뿌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전 아래쪽 신로고보다 윗쪽  구로고가 더 좋은데 glide 래퍼들은 전부 아래쪽 로고만 보여주더군요.



    • 적어주신 내용들 중 기술적인 부분으로 이미 알고 있었던 건 절반도 안 되지만 부두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죠. 하지만 돈 없어서 못 썼습니다. ㅋㅋㅋㅋ


      돌이켜 보면 처음으로 구입했던 외장 그래픽 카드는 라데온이었네요. 그때도 '3D 가속' 같은 표현은 남아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요즘에야 뭐 3D가 디폴트이고 2D 게임이 적을 지경이니 별 의미는 없겠지만요.

      • 저도 돈 없어서 부두는 못사고 다운그레이드 버전인 부두러시를 중고로 사서 썼습니다. 하지만 사고난 뒤에야 부두러시의 악명을 알게되었죠ㅎㅎㅎㅎ


        그래도 일단은 부두라고, 잘되는 거에 한해서는 잘되었어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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