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립미술관, 고갱전이 끝났네요.

마지막 날 허덕허덕 달려가서 보고 왔습니다.

아, 이미 한 번 봤는데 또 본 거였어요. 어쩌면 세 번도 볼 수 있었는데 이래저래 꼬여서 두 번만.

 

그만큼 훌륭한 작품이었나? > yes

그만큼 훌륭한 전시였나? > ...

 

고흐와 고갱은 참 많이 헷갈리는 작가들이죠.

같은 고씨(;;)에다가 둘다 뭔가 미친(;;;) 사람이라는 점에서.

또 우리나라에서 인기도 많고요...

딱히 야무지게 조사를 한 건 아니고 그냥 인상입니다만, 우리나라에선 고갱보다 고흐가 더 인기가 좋다는 느낌이에요.

고흐의 해바라기, 별이 빛나는 밤에, 같은 작품의 대중적 유명세/인기에 비해,

고갱의 작품은 그만 못 하다는 느낌. 고흐처럼, 제목이 딱 나오는 작품이 없는 듯.

 

어쨌거나 두 번 반복해서 시립미술관을 다녀오고 느낀 것은- 아니 처음부터 느꼈지만,

고갱은 인간적으로 정말 상종 못할 인간이며, 진즉에 죽어서 다행인 것이, 만약 살아서 그와 내가 마주치기라도 할 일이 생긴다면, 눈 질끈 감고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쳐야지, 까딱하다간 난 소위 말하는 '헌신하다 헌신짝' 만신창이가 될 거야, 그래도 사랑했으니 후회는 없어 하고 찌질대겠지... 하는 망상이 불쑥불쑥 치밀었고요.

 

어쩌면 이렇게 잘 그릴까... 끕이 다르구나. 세계가 다르구나. 하는 생각.

어떻게 여기다 이런 색을  칠했을까. 아니 어떻게 여기다가 이렇게 선을 쭉 그었을까.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어린 장금이가 "홍시 맛이 나는 걸 어쩌라고."라고 하는 걸 보며, 아니 어떻게 그걸 알았을까 어떻게 어떻게... 그냥, 답이 없는 기분.

 

이번 전시를 처음 봤을 때도 두 번째 봤을 때도,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것은 3층의 '우리는 어디서~' 앞에 놓인 벤치였어요.

그 풍경이 첫눈에 들어왔을 땐, 어둑어둑한 밤의 모습 같았는데. 지긋하게 앉아서 보니 하늘은 푸르르고 바닷물은 에메랄드 빛으로 빛나는 것이

밤이 아니라 뜨거운 열대 섬, 한낮의 풍경이더구만요. 어둠이 물러가고 빛이 나는 것을 볼 수 있어서, 참으로 좋았습니다.

지긋하게 앉아서 보는 것이 가능했던 게, 제가 처음에 갔을 때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그러니까 평일 저녁 8시 쯤이었으니 말이죠-

저는 벤치에 앉은 채로, 그 거대한 그림 앞에 서성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나와 그림이 온전히 마주하는 감상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거든요.

마지막 날인 오늘은 택도 없었습니다만...

- 독보적인 크기/아우라에다 <어린왕자>에 나오는 전형적인, 어른들이 좋아하는 설명까지 더해졌으니.

"이번 전시가 1조 5천억! 그중에서 이 그림이 제일 비싸요!"

 

비단 '우리는 어디서~' 뿐만 아니라 다른 그림들 앞에서도 꽤나 북적였어요. 특히 자녀를 데리고 온 부모님들...

몇몇 분들은 애들에게 더 보여주고 싶어서, 애들이 더 보게 하고 싶어서 애타하는 모습도 있었죠. 뭐랄까, 쑤셔넣고 싶어하는 느낌?

그게 막 싫었던 건 아니예요. 이해가 됐어요. 그 마음이.

물론, "아이 참, 배고파 죽겠네!" 하는 애들의 마음도 이해가 되었고요.

 

두 번째 감상하는 거라, 전시장 몇 군데에 뜬금포처럼 설치된 현대 작가들의 작품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쉭쉭 지나쳤지요.

처음에는 대체 왜, 저런 부조화를 만든 거야? 하는 의문/짜증을 터뜨렸지만, 이런저런 얘기(가설?)들을 듣고는,

뭐 아주 이해가 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쳇!' 하고 넘기기로 했어요..

 

아무튼 아무리 기다려도, 폐관 시간까지 버틴다 해도 '우리는 어디서~'와 내가, 저번처럼 온전히 마주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해서.

보스턴 미술관에 가지 않아도 될 만큼 실컷 보고 나서 미련없이 미술관을 나왔어요.

 

해가 져서 깜깜한데 날씨가 쌀쌀해질 것 같으면서도 쌀쌀하지 않아서, 자꾸만 쌀쌀할 듯 말 듯 해서 겉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다보니

어느새 길을 잘못 들었는데.

그래서 형광 노랑 police 자켓을 입은 청년(...)에게 광화문 가는 길을 물었는데,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깜짝 놀랐어요.

뭔가 더 얘기를 이어가고 싶을 만큼;;

하지만 좋은 목소리로 길을 잘 설명해줬는데, 여기서 못 알아듣고 서성대면 그건 그것대로 부끄러운 일이라, 아쉽게 고맙다고...

그가 가르쳐준 대로 시청 광장 쪽으로 나와서 광화문으로 걸었죠.

일요일 밤, 9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라 한적했어요. 한 켠에서 벌어지는 작은 집회와 그 주변을 서성이는 경찰들을 곁눈질하며 종종 걸었죠.

어제, 토요일에 여기에 나왔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하며.

 

어땠을까,

단지 그 정도밖에 생각하지 못했어요. 금세 코리아나호텔과 문을 활짝 연 폴 바셋이 나왔고 

파이낸스 센터, 그리고 동화면세점의 거리에 도착해버렸거든요.

 

 

 

    • 고갱의 삶에 대해선 이번에 처음 관심을 가졌는데(달과6펜스도 안 읽었지요) 자아에 대한 굉장한 믿음과 어느 정도의 환상까지 있는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편으론 그게 부럽기도 했구요. 이번 전시엔 유난히 어린이들이 많이 보이네요. 주의력 떨어지는 미취학 아동들에게까지 굳이 대가의 그림을 보여주는 게 감성발달에 효과가 있을까 싶었어요. 북적이지 않는 소규모의 전시 구경도 좋을텐데 싶구요. 제가 갔을땐 유치원에서 단체로 왔던데 제대로 보는 친구들이 많이 없어 보이던데ㅠㅠ
    • 고갱의 그림은.. 생각보다 그렇게 감흥이 크지 않아요.
    • 저랑 비슷하시네요. 저도 그 의자에 아주 오래 앉아 있었거든요. 고갱 작품의 백미로 꼽는 그림들이 와서 좋았어요. 고갱의 그림은 참 향긋했어요. 노아노아, 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지만 타히티의 여성들이며 꽃까지 아주 단순하게 그렸는데도 그 색채만으로 충분히 향긋했어요. 깊이감에서 자유로워져서 오히려 더 환상적인 느낌도 들고요. '마나우 투파파우'는 판화작품으로 밖에 안 와서 아쉬웠어요. 습작기의 작품인 '꿈꾸는 소녀' 같은 작품도 좋았고 골고루 참 즐겁게 봤습니다. 전보다는 확실히 이번 전시를 보고 고갱의 작품을 많이 좋아하게 되었달까요..그런데 우리나라 뿐 아니라 다른 곳들도 대개 고갱보다는 고흐가 더 인기좋지 않나요. 너무 다른 타입들인데 서로가 함께 있을 때 고흐가 고갱의 그림에 감탄하면서도 틀렸다고 생각했다는 걸 생각하면 재미있어요.
    • 목소리가 좋은 경찰 청년이라. 경찰 홍보단이 경복궁쪽에 있어서 그런걸까요.
      • 아 그런가요? 토요일의 집회들 때문에 비상근무중인가 했는데...
    • 이방인으로서의 고독함을 그렇게 화려하게 표현할 수 있다니 예술가는 예술가구나 싶었어요. 근데 전 그림보다는 몇 점 안되는 조각들이 더 좋더라고요 ^^
    • 전시 보기에 좋은 계절, 정확히는 전시 보러 돌아다니기에 좋은 계절이죠. 그래야만 할 거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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