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희'(약스포?)/ 타인이 나를 알 거라는 환상에 대한, 플러시 안 하는 글.
1.
홍상수 영화에 되게 자주 나오는 장면들인데, (특히 여자들이) '자기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질문하고 그에 대해 남자들이 그럴 듯한 말로
발라두면 '정말요? 제가 정말 그래요? 그런 사람이에요?' 하더랍니다.
우리 선희에서는 선희가 추천서를 써달라고 하네요. 아예 대놓고 '저는 어떤 사람이에요?' 물어보고 써달라고 하죠.
사실 사람들이 나이들수록 점점 민망하고 면구스러워서 못/안 그러는거지,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날것으로 듣고 싶어하는 욕망은 대개에게 내재된 욕구인 듯해요.
선희는 재차재차 확인합니다. '그래요? 제가 정말 그런 사람이에요? 이게 맞아요?'
아마 걔는 추천서를 갖고 유학을 가고 싶었던 것보다도 이십대 끝무렵의, 뭣도 아니게 되어버린 듯한 자기 자신을 타인에게 확인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자기를 예뻐하던 교수님과, 자기를 계속 맘에 두는 남자친구와, 매력있는데 관계의 책임은 안 둬도 될 듯한 유부남 선배, 셋을 통해.
2.
요즘 자꾸 나이드립을 뇌까리고 엄한 상상을 하곤 하는 스스로를 발견했어요.
너무 많이 해서 주변인들은 지겨울 지도 모르겠는데, 저는 그때그때 진심이어서 한 얘기니까 간단하게 또 하자면
'나는 내년에도 너무 어리네'
였어요. 아 이정도면 할 만큼 한 듯한데, 나는 꽤 피곤한데, 우와 내년에도 스물아홉이면. 120세 시대라매. 90년 더 뭐하고 살지.
아무도 안 걱정하는 걸 혼자 사서 생각하며 끄웡끄웡할 만큼 그냥 이상한 상태였지요.
생에 더 겪을 게 안 남아있다고 단언했던 건 아니고, 여지껏 뭘 많이, 한 듯한데 아아, 까마득하게 남았네. 아득하고 지겹네. 라는 '지침'의 자각 같은 것.
이릏게만 이야기해 두면 또 별 거 아닌 것 같은데, 요는 '피곤하고 지쳤다'입니다. 무언지 모르겠는 것에. 전 이런 걸 못 견뎌요 또.
피곤을 느끼는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니, 엄살을 부리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스스로가 여러 모로 이상지수를 호소하고 있음을 주지했지요.
아까 애인님과 술잔을 기울이며 '저번에 상담하고 두어 달 괜찮았었는데, 지금 또 온 것 같다. 조만간 상담 받으러 갈 거다'
라고 이야기했더니, 몇 달 전 처음 상담받고 나서 사실을 고지했을때랑 비슷한 반응이었어요.
'너같이 안팎 투명하게 감정 고지하는 애가 세상에 또 있냐. 나는 네가 늘 여지없이 감정을 소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모르는 뭐가 더 남아서 상담까지 받아야 한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굳이 니가 받아야 한다고 하니 그래야 너는 속이 풀리겠지, 그래라.'
지금 적고 나니 이 말이 틀린 건 없는데, 5년간 루이죠지(제 고양이)를 제외한 최측근으로 못 만나도 일주일에 세 번은 만나 생활을 나눠온 사람의 입에서
이런 종류의 말이 나오니 좀 많이 그것도 꽤나, 별로였어요.
그때부터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3.
예전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이 자나쳤거나, 궁금했어도 보니까 모르겠으니 넘어갔을 사람의 일들이 최근에는 꽤 궁금하곤 합니다.
이를테면 이 게시판의 몇몇 인간군상들이 그래요. 궁금해한다고 뭔가 실제적인 컨택트를 해 변화를 보고 싶다는 오지랖돋는 이야기는 아니고;;
요 몇 년간 스스로 오만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 중이에요. 가장 거칠고도 명징하게 예를 들어보면, '나는 이만큼이나 해봤는데 넌 해봤냐'식의.
그간 막 엄청 대단한 걸 클리어해 왔던 건 아닌데, 이만했으면 저마만큼 그마만큼 크따만큼 제가 다 알고 이해하고 카바치고 그럴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던 것.
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이 들기 시작했죠. 그 시작이, '앞으로도 이렇게 까마득한 날을 살아야 하는데. 지금 이걸 가지고. 안 변하고. 왜때무네 으뜨케?'부터.
아까 집에 가는 동안. 저보다 이십 년쯤 더 산 애인님에게 꼰대질에 대해 물었습니다. 일하면서 만나는 한참 어린 사람들, 경험이 부족한 사람들에 대해
얼마만큼의 확신을 갖고 있는지. 나는 나보다 십 년쯤 어린 애들을 가르치면서, 걔들이 손금 보듯 보인다고 생각하는데, 당신도 비슷한가?
이걸 지금처럼 문자화시켜 들이밀면 사실 어느 쪽이 바보인지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가 아닌데, 실제로는 몹시 빠지기 쉬운 함정인 듯해요.
애인님은 좌석에 뒤통수를 대고, (간단히 요약해) '그냥 다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무엇이든 내가 아는 것 그 이상임, 심지어 때로는 자신조차.
그가 지혜롭든 아니든, 저 말이 진리이든 아니든, 그 말을 듣는 순간
저 사람이 나랑 얼마간 을마나 붙어있었건 나를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에 섭섭함을 느끼지 말아야겠다 생각했어요.
사실 저는 그간 이 사람을 되게 많이 속속들이 알고 있고 장악하고 있고 컨트롤할 수 있다고 자신했는데,-그게 어느 정도 사실일지라도-부질없어졌죠.
그리고 그 다음 순간부터는, '상담이 필요해'가 아니라,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냥 여기 있는 나'를 보았습니다.
그게 어떤 느낌인지, 이렇게 말한다고 전달되진 않을 거예요. 이건 치유도 깨달음도 뭣도 아닌, 그냥 자연히 다다랐어야 마땅할 생의 어떤 단계인 듯.
4.
이게 딱히 상담비 아끼자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그간 해본 결과 저는 이렇게 제 얘기를 밖에만 해도 어느 정도 괜찮아지는 종류의 사람이라는 걸 깨달아서,
불가피하게 블로그도 일기장도 아닌 여기다 합니다. 별 얘기 아니니 누가 똥 싸고 플러시 안 했나부다, 드럽다 하고 가시면 딱일텐데.
사실 이러고도 뭐가 좀 부족하다 싶고 막 잔변감각;;남고 그러면 마저 싸러;;; 상담갈지도 모릅니다. 근데 이게 (저한텐)일기는 아닌지라, 어찌할 도리가 음써써요.
5.
시마이는 클리셰로. 메리추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