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예상은 하고 봤지만 생각보다 더 심하네요(스포 포함)

미야자키 하야오의 은퇴작이라는 바람이 분다를 봤습니다.

좀 지루한 구석이 있긴 했지만 이야기 자체가 못 견딜 정도로 재미가 없다거나 돈이 아깝다거나 그렇진 않아요. 

몇몇 부분에서의 화면은 역시 지브리답게 참 아름다웠고 애니메이션의 장점을 잘 살린 상상과 현실이 교차하는 장면들도 좋았어요.


그런데 제가 우려했던 부분은 예상보다 더 심하네요. 영화 보고 나오는데 이 할배 노망 났나, 싶었다가 화가 났다가 슬펐다가 그랬습니다.

이제 센과 치히로는 어떡하나 싶을 정도예요.(원령공주는? 하울은? 빨간머리 앤은?)

몇년 전에 콘라트 로렌츠라는 동물학자의 책을 세권쯤 소장하고 이 아저씨 좋아, 글도 재밌게 쓰고 늙어서 환경운동도 했고! 이러면서 즐거워하다가

어느날 이 아저씨가 나치정권에 영합해서 우생학을 펼친 학자였으며 평생 그 점에 대해 제대로 짚고 넘어가거나 사과하지 않았단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기분이랄까요.


전 아인슈타인이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시기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놓고 일본에 떨어진 원폭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알게 된 아인슈타인이 

단순히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했다네요-라고 담담하게 소감을 말한다면 응? 사람이 그렇게 죽었는데 안 괴롭나? 자기가 한 일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나? 라고 생각할 겁니다.

아인슈타인이 유태인이고, 연합국을 위해 맨하탄 프로젝트에 임했고, 그 덕에 우리가 독립을 했더라도, 아무리 원대한 꿈과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였다 하더라도

원폭으로 인해 엄청나게 많은 희생자가 생겼으니 우울증에 걸려 자살 시도를 해도 납득이 갈 거 같거든요. 


그런데 마치 귀를 기울이면에서 바이올린을 만들겠단 꿈을 꾸던 소년처럼 묘사되던 주인공(심지어 사생활에서 정의롭고 안경을 껴도 잘 생기기까지 했음)이,

2시간 내내 주변의 상황을 돌아보지 않고 침묵하며 아름다운 비행기만 만들어대다가 마지막에 조용히 말하는 "한대도 돌아오지 못했어요"라는 소리는 뭔 뜻인지도 모르겠어요.

그 아름다운 비행기가 다 부서진 게 아깝단 소린지, 자살 특공대를 보낸 일본의 광기가 원망스럽단 건지, 죽은 조종사들이 불쌍하단 건지 어떤 심정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아인슈타인도 회한을 느껴야 하는 마당에 일본이, 미쓰비시에서 일한, 자살특공대를 태울 비행기를 만든 사람이 반성의 기미조차 없이 그냥 살아가겠다니요.


욕을 하더라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욕을 하잔 심정으로 보러 가긴 했습니다만 이렇게 쉴드 칠 구석조차 안 보일 줄은 몰랐어요.

그래봤자 여전히 이 우생학자 자식! 이러면서 콘라트 로렌츠의 책을 끼고 사는 것처럼 이 변절자(?) 할배! 이러면서 센과 치히로를 보겠지요.

미야자키 하야오는 뭐가 어찌됐든 비행기를 만들고 싶었던 주인공처럼 자신의 경력을 걸고 이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던 걸까요.

이 할배한테는 이게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였을까요.

    •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주인공이 근시라는걸 강조하고 시작하더라구요. 작품 자체도 표면적으론 꽤 근시적이죠.

      왠지 중의적인 뜻 아닌가 싶으면서도 다른 뜻 없이 진지한거 같고,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에서 살아라라는 말이 종종 나왔던거 같은데 이것처럼 그 말이 겉도는건 처음인것 같습니다.

      그래도 말없는 연출로 끈임없이 표현한 것도 있어서 나쁜 의도만은 아닌것 같아요.

      가볍긴 가볍지만요.

      전 미야자키 하야오가 자연이나 그런 좀 커다란 얘기를 할때는 재밌게는 봐도 그러려니 하는 편이라 좀더 개인적인 이야기로 느껴지는 이 작품이

      좋았습니다.
      • 끊임없이 폭격기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그 누구도 그에 대해서 고뇌를 하지 않아서 놀라웠어요. 감독이 보여주고자한 건 그 시대에 일본인들의 집단 마비 상태였을까요.
    • 이 애니를 둘러싼 리뷰들을 보며 짐작하건데,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의 전형이 떠오르더군요.
      과거의 잘못을 아예 외면하거나, 혹은 전쟁의 참담함을 비극이라며 이야기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자신이 쏙빠져있는 그 모습 말입니다.
      남들이 '책임'에 대해 이야기하면 자신의 책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게 아니라 '전쟁은 비극이다'라고 이야기하는 자신을 내세우죠. 비겁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의 리뷰나 패러디 게시물을 보고나서 드는 생각은, 짜증날것 같아서 안봐야겠다...쯤 됩니다.
      • 이 할배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그랬겠지만, 이 주제 얘기가 나오면 늘 등장하는 반딧불의 묘보다 이 작품이 훨씬 불편했어요.
    • 전 최악의 감상을 각오하고 봐서인지 생각보다 불편하진 않았어요. 영화 본 뒤 호리 다쓰오의 바람 불다를 다시 읽었더니 감독이 어떤 정서를 전하려 했던 건지 막연하게나마 이해도 됐고요. 쉴드까진 못 쳐도 영감님 마지막 작품으로 간직할 순 있을 듯해요.
      • 저도 내심 이렇길 바랬는데 안되더군요. 그냥 또 한사람 가버렸구나 이런 마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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