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글 주의] 저희집 할머니 개님이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원래는 이번주 월, 화, 수 3일 연차를 쓰고 친구와 2박 3일로 전주와 남원에 놀러 갈 계획이었어요.
처음엔 셋이 갈 생각이었는데 친구 하나가 못 갈 사정이 생겼고 아쉬운대로 둘이서라도 가자 이렇게 됐는데
토요일 밤부터 만으로 12살 된 저희집 할머니 개님이 설사를 심하게 하고 음식도 먹질 않더군요.
일요일에도 계속 상태가 안 좋았지만 근처에 여는 병원이 없었고, 또 설사는 자주 하는 편이었기에 일단 지켜보다가 월요일 아침에 병원으로 갔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단순한 배탈이라고만 생각해서 여행 가방을 차에 실은 채 집이 동물병원 근처인 친구한테 리지 병원 갔다가 갈테니까 조금 늦게 출발하자고 했고,
병원 진료가 끝나면 엄마는 개님 데리고 택시 타고 집으로, 저랑 친구는 남원으로 출발할 계획이었고요.
그런데 의사선생님이 보시더니 자궁축농징인 것 같다고 초음파를 하자고 하셨고 초음파 결과 수술을 해야 한다시더군요.
이때까지도 괜찮았습니다. 수술 하면 되니까요.
그런데 수술 전 혈액 검사 결과 간 수치랑 신장 수치가 말도 안되게 나쁘게 나왔고, 수술을 한다해도 살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황이라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다른 식구들 얼굴이라도 보고 오후에 수술을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씀하시는데 이때부터 눈물이 막 쏟아졌습니다.
근무 중인 동생은 중간에 나올 사정이 안되고 퇴근해서 병원에 오면 7시, 그럼 수술을 내일로 미뤄야 하는 판이라 일단 그냥 수술 해달라고 했어요.
휴가는 당연히 날아간 거고, 병원으로 찾아온 친구는 역시 할아버지 개님과 함께 사는 사람인지라
그래도 휴가라서 리지랑 같이 있어줄 수 있으니까 다행이다-라며 저를 위로해주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수술을 시작해서 배를 열고 보니 자궁축농증 자체는 그리 심한 상태는 아니었고 난소와 자궁은 성공적으로 적출했지만
간에 종양이 있고 내출혈이 있는데 원인은 못 찾겠고, 이유를 알려면 의사가 여럿 달라붙어 수술을 하는 큰 병원에서 늑골까지 열어서 살펴봐야 한다더군요.
물론 그렇게 큰수술을 한다고 해도 원인을 못 찾을 수도 있고, 원인을 찾는다해도 치료를 못할 수도 있고요. 결국 그냥 덮었습니다.
리지가 회복실(인큐베이터 비슷하게 생긴 산소 농도 높은 공간)에서 그래도 무사히 마취 깨는 걸 봤고,
일단 오늘은 저녁까지는 병원에서 상태를 지켜보자고 하셔서 리지를 두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혹시 혼자 죽으면 어떡하냐고 물었더니 그럴 정도로 상태가 나쁘지는 않다고, 위독해지면 바로 연락주겠다고 하셨고요.
집에 와서는 엄마랑 둘이서 대성통곡을 하다가 울다지쳐 자다가,
혹시나 안락사를 하더라도 병원보단 집에서 마지막을 맞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옆동네 사는 공중방역수의사(=군복무 중인 수의사)한테 만일의 경우에
우리집에 안락사하러 와줄 수 있냐고 했다가(아는 병원에 물어봤더니 약을 안준대요 위험해서 병원 밖으로 나가면 안된다고),
리지 줄 생각으로 아침에 끓였던 흰죽을 엄마랑 둘이서 꾸역꾸역 나눠먹고 병원 마칠 시간 즈음에 리지를 데리러 갔습니다.
리지는 생각보다 너무나 멀쩡하게 네발로 회복실 바닥을 딛고 서서 저희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의사선생님 말씀이 당장의 경과는 좋고, 대학병원에 물어보니 리지 같은 경우가 거기도 있었는데 그 개는 희한하게도 내출혈에도 불구하고
수술후 멀쩡히 회복해서 몇달째 잘 살고는 있다지만 너무 낙관은 하지 말고 마음의 준비는 해놓는 게 좋다더군요.
어쨌거나 눈앞에서 멀쩡히 정신 차리고 있는 개님을 보니 아까 쏟아지던 눈물만큼이나 마구잡이로 희망이 솟아오르는 걸 어쩔 수가 없었어요.
집에 와서 개집을 거실로 옮기고, 그 앞에 이불을 깔고 엄마랑 둘이 붙어 앉아서 약을 먹이고 수술 부위 소독을 하고 물을 먹이고 간병을 했습니다.
밤에도 중간중간 깨서 토하면 닦아주고 비척비척 일어나서 화장실 가겠다고 하면 데리고 가고 계속 상태를 살폈고요.
간이 안좋아서 진통제를 못 준댔으니 얼마나 아플까 싶었는데 리지는 의외로 잘 참았어요.
우리 리지가 이렇게 사투를 벌이는데 내가 질질 짜면 안되지 이러면서 마음을 다잡았지만 자꾸 눈물이 났고,
긍정적인 척 앞으로 리지 먹일 신부전 처방식을 찾아봤지만 별로 눈에 들어오진 않았습니다.
여튼 리지는 무사히 어젯밤을 넘겼고, 아침 8시쯤에 의사선생님이 리지가 좀 어떤지 전화가 왔습니다.
특별한 이상은 없지만 뭘 먹질 못하고 자꾸 토한다고 하니까 어제처럼 병원에 놔두고 수액 맞히면서 경과를 좀 보자고 하셔서
병원 여는 시간에 맞춰서 리지를 데리고 갔더니 호흡이 좀 안 좋은데 일단 지켜보자시길래 리지는 다시 회복실에 들어갔습니다.
엄마랑 저는 마트에 갔다가 엄마 의견으로 빵이랑 우유랑 바나나를 병원에 좀 사다드렸습니다.
잠시 딴 얘기지만 시골 수의사들은 왕진 가면 밥 먹고 가라, 고추 따줄게 상추 따줄게 이런 소리 많이 듣겠다 싶었어요.
그러다 소 죽으면 할아버지 술 좀 돼서 쌍욕 하면서 병원 찾아와서 깽판도 좀 치고요.(이런 생각 하는 걸 보니 내가 제정신이 좀 돌아왔구나 싶었어요)
저는 병원 앞에 잠깐 차 대놓고 기다리고 있었고 엄마만 잠깐 들어갔다 왔는데 리지는 링거 꽂고 꼿꼿이 꼭 안 아픈 개처럼 앉아있더랍니다.
그리고 집에 와서 밥도 먹고 청소도 하고 샤워도 하고 이렇게 듀게에 글도 쓰고 있습니다.
신기한 게 저희집 고양이들은 에어컨을 싫어해서 거실에 에어컨을 켜고 사람들이 모이면 푹푹 찌는 방안으로 기어들어가는 이상한 성향을 가졌는데
어제 저녁에 리지를 데려온 후로는 첫째 고양이 꼬마가 꼭 뭘 아는 것처럼 리지 집 주변에서 식빵을 굽고 거실에서 계속 어슬렁 거리더니
심지어 잠도 거실 컴퓨터 책상 위(여긴 만짐만짐 받기 위해 오는 곳인데 말입니다)에서 자더군요.
그리고 다시 리지를 병원에 데려다놓고 오니까 꼬마는 코빼기도 안 보이고 쾌적한 거실을 놔두고 더운 제 방에 들어가 있네요.
방금 전화가 울렸는데 혹시 병원에서 연락 온 걸까봐 가슴이 철렁한 걸 빼면 저도 개님도 그럭저럭 잘 버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