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나는 대로 쓰는 설국열차 얘기(스포)

- 바퀴벌레가 원료라지만 저 정도로 가공되어 나온다면 단백질 블럭 잘 먹을 수 있을 거 같아요. 제가 궁금했던 건 바퀴벌레가 많이 필요할텐데 따로 키우나 하는 거였어요.

- 게시판에서도 본 얘기같은데, 화면이 가로로 두배 정도 되었으면 좋았겠다 싶었어요. 수백칸이 되는 기차 전체를 한눈에 보여주기에도, 개별칸의 모습을 보여주기에도 좀 아쉬운 너비 아니었나 싶습니다.

- (가본 적은 없지만) 아이돌 팬미팅 하는 기분으로 봤어요. 제가 좋아하는 배우들이 잔뜩 나와서 이 분들이 처음 등장할 때마다 꿈틀꿈틀 했었네요. 다행히 탄성을 지르지는 않았습니다. 배우들에 정신이 팔려 영화를 좀 덜 본 건 아닌가 싶어요. 대부분 연기도 좋았고, 이들의 배역이 소품처럼 쓰이고 버려지는 것도 좋았습니다.

- 그런데, 감정이입할 구석이 묘하게 없다 싶어요. 아이를 빼앗기는 부모들에게도, 꼬리칸의 비참한 생활에도, 단백질 블럭의 정체에도, 길리엄의 죽음과 그의 정체에도, 커티스의 고백에도, 윌포드의 자기포장(?)에도 어디 하나 감정이입이 되지 않았어요. 재밌는 건 관객의 마음을 흔들만한 요소들은 빠짐없이 들어가 각 장면을 잘 구성하고 있는 것 같은데 뭐가 없어서 안 움직인 거 같진 않고 제가 호흡을 놓친 건가 싶기도 했구요. 아니면 관객을 관망자의 시선에 묶어두려고 한 건가 싶기도 했구요.

- 윌포드는 난이도 있는 시뮬레이션 게임을 억지로 하고 있는 조물주/신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무신론자이지만 평소 만약 창조신이라는 게 있다면 이런 거 아닐까 하고 제가 여겼던 신의 모습에 가까웠어요. 시작할 때는 잘 해봐야지 하다가 나중엔 키운 게 아까워서 개선이나 다른 방법을 찾기 보다는 현상유지에만 집중하는. 여기선 이게 최선이라고 스스로를 위하지만 사실은 이 판을 깨버리는 수준의 새 설계를 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 그래서 길포드는 그 신의 대리인 같았습니다. 즉 성직자요. (모든 성직자들을 묶어 후드러치는 건 아니구요) 당장 눈 앞에 벌어지는 참상은 막아보고는 싶고 그래서 극단적인 자기 희생도 마다하지는 않지만, 결국엔 좀 덜 끔찍한 수준에서 지금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고통을 관리하는 역할을 하는 거 아니었나 싶어요. 실제 그 이론이 목적하는 바가 무엇이었나와는 상관없이 윤회론 같은 게 결국 보다 나은 다음 삶을 위해서 현세에 만족하고 충실하라는 이야기가 되어 그 사회를 유지하고 안정시키는데 기여하는 것 처럼요.

- 윌포드와 길리엄의 관계는 거대자본과 3세계 ngo와의 그것처럼 읽을 수도 있겠죠.

- 송강호에게 좀더 이야기를 더 넣어줬으면 했어요. 그가 왜 문너머 더 앞쪽이 아닌 문밖의 더 넓은 곳을 향하려고 했는지 어떤 식으로든 설명이 좀더 있으면 어떠했을까 싶습니다. 기차의 설계자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 체제의 한계를 알고 있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저 밖을 향한 동경이었을 수도 있지만...

- 송강호를 알아온 십수년 만에 처음으로 이 사람이 남자사람이 아닌 남자로 느껴졌습니다.

- 어벤저스를 봐서 눈에 익은 배우임에도 커티스를 볼 때마다 낯설었어요. 좀만 화면에 작게 잡힐 때면 로스트의 남자주인공 얼굴로 상상하고 있더라구요. 흠...

- 결론은 재밌었습니다. 애초애 이걸 sf물로도 액션물로도 기대하지 않았고(또 그게 아니라고 생각했고) 사실 장르에 대해 짐작 못하겠다고 여기고 있어서인지 그 기대에서 멀리 있어 생길 법한 아쉬움같은 건 없었어요. 뭔가 뻔하게 잘 쓰여진 논술시험지를 본 기분입니다. 그래서 감동은 없지만 이것저것 생각할 건 많네요.
    • 오, 지금까지 읽은 설국열차 감상 중에 제일 공감가요. 저는 너무 1:1 비유로 '그래서 이게 무엇을 비유하는 거고 계급과 체제와 기능론과 갈등론이..'하는 무수한 비유와 해석보다 그냥 느슨하게 보고 느슨하게 떠올리는 쪽이 더 마음에 들어오네요. 저역시 마지막 줄과 같은 생각입니다. 봉준호 감독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아서 그런가 걸작을 기대하지 않아서 그런가 그냥 보는동안 재밌게 보고 나왔다는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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