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자와 아키라/도프토예프스키의 백치(스포일러~)
백치는 구로자와 아키라 작품 중에서 높이 평가되는 영화는 아닙니다. 지난번 구로자와 아키라 100주년 영화제 때 그간 보기 힘들었던 많은 작품이 공개되었는데 그중에서도 백치는 없었던 것도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싶습니다.
그러나 도프토예프스키 <백치>를 인상깊게 본 사람으로서 구로자와 아키라가 원작소설을 영화로 만들었다는데 호기심이 동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인을 끌고가서 영화를 보고 나니 너무 길고 지루하다는 기존 평가가 어느 정도 이해는 갑니다. 영화사에서 절반길이를 쳐 냈다고는 하지만 원작 소설에 나오는 내용을 너무 많이 담으려 했다는 인상이 들고요. 10부작 미니시리즈 내용을 영화 하나에 우겨넣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원작소설을 읽고 본 입장에서는 그 정신없는 내용을 이정도면 잘 편집했다고 보고요. 제정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 1951년 일본 훗카이도가 된 데 비해서 문화적 이질감도 거의 없었다고 봅니다.
소설로 읽던 내용을 영화로 보면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역시 각각의 인물들을 배우들이 어떻게 연기하는가였느데요. 예상했던 대로 주인공 므이시킨 공작-카메다는 약합니다. 라쇼몽에서 무사역을 맡았던 배우-마사유키 모리가 연기한 인물의 어색하고 연약한 부분은 그럴듯 하지만 결백하고 사람을 끄는 매력은 없습니다. 사실 현대판 예수라는 인물을 연기하기 얼마나 어려울지 생각하면 배우만 탓하기는 어렵긴 하지만, 동행이 불평한 것처럼 주인공이 턱아래 주먹을 모으는 특유의 소심한 동작을 할 때마다 꾸민 티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참, 책에서는 므이시킨이 이야기로 전하는 처형직전 사면받는 사형수 이야기-도프토예프스키 자신의 이야기를 2차 세계 대전배경에 맞추어 주인공 자신이 전범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살아남았지만 그 충격으로 '백치'가 되었다는 설정은 그럴 듯 했습니다.
다소 약한 남주인공에 비해 여주인공인 나스타시아-또는 타에코 나츠 역을 맡은 세츠코 하라는 아주 좋습니다. 어린 나이에 부자의 노리개가 되었다가 비극적인 최후를 맡은 팜므파탈을 세츠코 하라가 이렇게 잘 할 줄은 몰랐습니다. 도쿄이야기같은 오즈 영화에서 조신하고 차분한 모습만 보다가, 그 큰 눈동자가 광기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모습을 보니 같은 사람이라고 못 믿을 정도입니다. 1부의 하일라이트인 생일파티에서 책에 묘사된 대로 검정 망토를 걸치고 창백한 얼굴에 눈만 빛나는 모습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멋집니다. 2부의 하일라이트로 라이벌격인 아글라야와 대면하는 장면에서 이 사람의 눈이 타오를 때 바로 뒤 난로에서 불길이 일어나는 묘사같은 건 영화에서만 가능한 멋진 연출이었습니다.
또 다른 여주인공인 아글라야-아야코도 소위 '타락한 여인'인 나스타시아와 대조되는 조숙하고 되바라진 영애역으로 그럴듯 했습니다. 굳이 우겨서 나스타시아를 찾아갔을 때 눈을 못 맞추고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나스타시아가 뚫어지게 바라보는 장면 같은 건 소설 속 묘사와 똑같으면서도 엄청난 긴장감이 있어서 놀랍기도 했고요.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없는 건 로고진-아카마 역의 토시로 미후네입니다. "늑대"라는 배우 별명이 아쉽지 않게 동물적인 욕정과 폭력으로 가득한 로고진 역을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작은 역을 맡은 이분이 얼마나 잘했는가를 보았을 때 (나중에 라쇼몽에 같이 출연하게 될) 남주인공이 그만큼 못한 것은 정말 아쉽네요. 기차역에서 만나 친해진 두 사람이 역앞 사진관에 걸린 나스타시아의 사진을 보는데 유리진열장에 반사된 모습에 하나는 동정을 하고, 하나는 욕망에 불타는 장면의 대조같은 건 참 인상적이었는데 말이죠.
책으로 읽었을 때도 참 막장드라마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영화가 되니까 소설의 통속성이 두드러집니다. 생일파티에서 나스타시아가 자기를 돈으로 포장해 떠넘기려는 갑부와 돈을 보고 결혼하려는 신랑감을 욕보이려고 돈다발을 난로에 던지는 장면이나, "진실되고 착한 사람이 나타나서 당신은 죄가 없다고 말해주기를 기다렸다"는 독백을 영화로 보니 정말 재미있네요.
다 적고보니 제가 소설을 좋아해서 영화가 맘에 들었다는 생각이 더 드는데요.
이 기회에 백치나 다시 제대로 읽어봐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