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낭] 더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면
언제나 그렇지만 슬픈 마음에 글을 씁니다.
불쾌하신 분은 스킵 부탁해요.
1.
어렸을 적 읽은 그리스 신화에는 유명한 이야기가 나왔죠.
판도라가 신들에게서 받은 상자를 호기심에 열고 말았는데, 그 상자에선 온갖 재앙-허무나 슬픔 등-이 튀어나와 세상으로 흩어졌다고 해요.
그러나 상자의 가장 밑바닥에는 희망이 남아있었다... 라는 이야기지요.
어렸을 적에는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했어요. 온갖 좋지 않은 것이 들어있는 상자에 난데없이 웬 희망인가, 어린 생각에는 좋지 않은 것만 들어있는 상자라면 좋은 게 섞여있는 건 이상했거든요.
뭐 좋게 해석하는 식으로는 이렇다지요. '그래도 희망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고통스런 세상을 헤쳐갈 수 있도록 한 배려였다'라는 둥.
하지만 요즘은 왠지 다르게 생각이 돼요.
희망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것,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지요.
희망은 절망보다도 더 고통스럽지요. 목을 죄어드는 올가미처럼, 덫에 걸린 짐승처럼, 벗어날 수 없는데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몸부림을 치게 되지요.
끝내 놓아버리질 못하게 하는 것. 그래서 상자 가장 밑바닥엔 가장 괴로운 것이 남아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2.
내가 이토록 슬프고 쓸쓸한 이유는 무엇일까.
하 많은 시간을 생각했습니다만 이렇다할 이유는 찾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그냥, 그렇게 생겨먹어서 그런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운명이라든지 숙명이라든지 그런 거창한 것은 아니고, 단지 새가 하늘을 날듯, 물고기가 물에서 살듯, 나는 이렇게 태어났는지도 모르지요.
자살에 대한 것을 찾아보다가 "어떠한 이에게는 서있는 것보다 앉아있는 것이 낫고 앉아있는 것보다는 눕는 것이 낫다. 또한 어떠한 이에게는 서있는 것이 앉아있는 것보다 낫고 사는 것보다는 죽는 것이 낫다."는 아랍 속담을 보았는데 퍽 동감이 되었어요.
나는 단지 슬픔에 이끌리게 태어났는지도 모르지요.
그렇지 않고선 도저히 자신의 이 모양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모두에겐 당연한 숨 쉬는 일조차, 가끔은 힘들어요.
모두 두 발로 서 계시는 일이 당연한가요? 전 가끔은 두 발로 서 있는 일이 너무나 힘겨워서, 쓰러지고 싶어요. 주저앉고 싶어요.
그냥 쓰러져서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2-1.
저도 알고 있어요, 자신이 얼마나 타인이 보면 이상한 모양인지.
남들 보기엔 늘 우울한 표정을 짓고, 슬픈 생각만 하고, 매사 부정적이고, 한숨쉬고 조금만 실수해도 눈물 뚝뚝 흘리는 여자.
써놓고 보니 정말 이상한 여자같네요.
(그러고보니 엘리자베스 1세의 일생을 쓴 책에서 메리 스튜어트를 묘사한 대목이 생각나네요. '메리는 병적으로 신경질적인 여자였다. 신하들과 다투면 하루종일 자실에 틀어박혀 울거나 드러누웠다.' 물론 메리 스튜어트는 여왕이니까 그러면 안 되는 거겠지만... 지금 생각하면 뭔가 동질감을 느껴야 할 것도 같고..)
누군가는 술에 취하듯, 누군가는 담배에 빠지듯, 누군가는 단 것을 좋아하듯, 누군가는 쇼핑에 빠져들듯... 저는 그냥 우울한 게 좋은가봐요.
물론 사람이니까, 살고 싶은 욕망도 행복해지고 싶은 바람도 있지요. 하지만 마음은 언제나 과거를 보고, 슬픔을 쫓고, 허무함에 기울어집니다.
이 모순된 욕구를 간단히 말하자면 그냥 바보인 거겠죠.
가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수많은 이야기-소설도 만화도 영화도 드라마도-가 삶의 찬가, 삶의 희망은 수없이 노래하는데 왜 죽고 싶다거나 죽어버리자거나 슬퍼해도 된다는 이야기는 이토록 적은가...
하긴 적극적으로 삶을 슬프게 살자거나 모두 자살하자거나, 자살을 정당화(?)하는 이야기를 쓰면 굉장히 큰 지탄을 받겠죠.
그래도 가끔은...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삶은 그저 잡지처럼 통속하다지만, 가끔은 슬픔 속에서 살아도, 죽어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3.
꽤 많은 시간을 여기서 일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모르는 게 너무 많아요.
사실은 제가 태만한 거겠지요. 정말 열심히 하려고 했다면, 자기 시간을 쪼개서라도 이것저것 묻고 더 공부했어야 하겠죠.
하지만 힘드니까, 쉬고 싶으니까, 자꾸 물어보면 다들 귀찮아하고 바쁘니까... 이것저것 이유를 대서 늘 회피해온 건 저였어요.
그래서 역시나 야단을 맞고, 넌 도대체 뭘 하는 거냐는 말을 들으니 역시 의기소침해집니다.
저 자신에게도 변명은 산처럼 있지요. 하지만 다 집어치우고 역시 태만했다는 건 부정할 수가 없네요.
요즈음은 쓸쓸함을 견디지 못하고 머리가 먹먹해지는 걸 감수하고 자꾸 약을 먹었습니다.
약을 먹으면 잠이 좀 오고 머리가 멍해져요.
그래도 화가 나지는 않는다는 게 큰 장점이에요.
먹으면 머리가 잘 돌아가지가 않아서 평상시라면 먹지 않았겠지만 최근 들어 피로하고 스트레스 받을 일이 늘어서 복용하고 있어요.
화가 나지는 않는데 심하게 우울해지는 건 역시 약의 부작용일까요.
어쨌든, 슬슬 돌아갈 결심을 하고 있습니다.
제 잘못으로 부장님의 이름까지 들먹여지는 건 견디기 힘들어요.
이 곳을 떠나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저 자신도 놀랄 정도로 그다지 동요하지 않았어요.
하긴, 줄곧 전부터 떠나야한다는 생각은 했었는걸요.
마음의 준비란 게 시간이 있으면 어느 정도는 되는 거였군요.
떠날 땐 눈물 흘릴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텅 빈 방을 보는 것처럼 별다른 생각이 나지 않아요.
내가 없어도 괜찮은 곳, 내가 없어도 아무렇지 않은 세상.
새삼스러울 것 뭐 있겠어요.
꿈을 꾸면 늘 정신이 없어요.
저에겐 딱 한 가지 이상한 징크스가 있는데, 행복하거나 좋은 느낌의 꿈을 꾸면 정작 현실에서는 안 좋은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에요.
어제는 꿈을 꾸었는데 토끼가 나왔어요.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모르겠는데 하늘에서 토끼가 뚝 떨어졌어요.
저는 깜짝 놀라서 달려갔죠. 토끼가 크게 다쳤을 줄 알았는데 흙먼지는 잔뜩 뒤집어썼지만 아파보이진 않더라구요.
그래서 살금 안아 들었는데 포근하고 무게감있고(...?) 정말이지 귀여웠어요.
왜 토끼가 꿈에 나왔는지는 모르겠어요. 전 어느 쪽이냐 하면 고양이파인데...
4.
행복한 상태는 어떤 것일까 생각했었는데...
어떤 의미로 만족에 가까운 것이겠지요.
이 상황이라면 만족할 수 있어, 지금은 마음에 들어.
그런 게 행복이 아닐까 했었지요.
누군가는, 더 이상 충족되지 않는 상태를 행복이라고 했던 것 같았는데.
행복해진다면, 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게 될까요.
편해질까요.
그건 마치, 포기와도 닮았네요.
포기하면 편해지잖아요.
사실 어느 정도는 다 비슷한 걸지도 몰라요.
지금의 상태에서 만족하지 않고, 더더욱 나아가면 더 큰 것을 잡을 수 있다...
욕망, 욕심, 그것들이 모여서 행복을 얻어내는 걸지도 몰라요.
하지만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지금 주저앉은 이 곳에 만족하면,
그것은 그것대로 행복한 것이겠지요.
더 큰 것을 얻기 위한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 그저 소소한 것들에 만족하면.
그것이 마음을 채워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은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난 지금 행복하지 않지만,
행복을 얻기 위해서 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면.
그럼 그것은 그것대로 좋은 걸까요.
적어도 지금, 살아가면서 얻은 수많은 상처와... 지금껏 들어온 수없는 비난들과, 혐오, 증오로부터 도망갈 수 있다면.
더 이상 머릿속에 메아리치는 듯한 비난의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면.
더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도 좋아요.
이젠,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도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