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아닌 사담] 스토커를 보고..
* 기왕이면 영화를 본 사람만 읽어줬음 하는 글입니다.
스포일러가 많단 표면적인 이유도 있지만 이 글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정보보다 관람 후 개인의 감정 및 해석에 중점을 둔 사담이란 까닭이 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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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영화를 보고 글을 써야겠단 기분이 든게 너무 오랜만이기도 하고 오랫동안 각 잡은 글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관람 후 지인에게 신나게 썰을 풀어 말.. 말.. 말을 하고 싶다!는 욕구가 푹 꺼진 상태기도 해서 사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지금의 심정이 매우 심드렁합니다. 처음 스토커 관람을 했을땐 어디든 쏟아내고픈 욕구로 빵빵해 있었는데 말이죠, 관람후 느낌이 딱 그랬죠. 나의 둔한 뇌가 이 영화의 몇몇 부분을 충분히 캐치하지 못했어! 전후 사정을 섞어 놓는 편집에서 전반부에 깔아 놓은 밑밥을 깔끔히 기억할만큼 내 머리는 좋지 않아!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찜찜함이 남더라도 큰 줄거리를 이해했음 된거지 좋은게 좋은거여 대충 눙치고 지나는 사람이기 때문에 재관람따위 해본 역사가 없지만 이번엔, 최초로, 영화가 매우 흡족했기 때문에 이례적인 재관람을 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두번 봐도 재밌더그만요. 푸히힛,
각본의 구멍?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각본의 구멍은 일관성을 잃는 것 이거든요. 이를테면 남자와 여자가 만났다. 두 사람의 케미와 상관 없이 영화의 흐름 상 이때쯤에서 둘의 감정이 가까워졌단 점을 관객이 알아야 함으로 함께 물을 튀기며/음식물을 서로에게 묻히며 장난 치고 크게 웃는 장면을 보여준다. 짠, 이제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어요. 라던지 전쟁이 났다. 이쯤에서 전쟁의 비극성을 관객이 느껴줘야 하기 때문에 여리여리한 여자가/아이가 얼굴에 땟국물 분장을 하고 오열하며 소리지르는 모습을 넣어준다. 짠, 지금 울면 되어요. 라던지 영화의 중반부에 접어들었다. 이쯤에서 주인공에게 고난 미션이 주어져야한다. 지금껏 합리적인 성격을 쌓아온 조연이 갑툭튀한 열등감을 표출하며 주인공이 빠질 함정을 짠다 or 차분하고 이성적인 모습을 보이던 조연이 주인공이 함정에 빠지자 비열한 광소와 침을 수반한 열연을 펼친다. 짠, 주연의 스토리 흐름은 조연의 일관성 있는 캐릭터 설정보다 우선하니까요. 와 같은 것들을 구멍이라 느낍니다. 이런 개인적 기준으로 보자면 스토커는 사건 흐름, 각 캐릭터의 감정선, 절정까지 가는 속도와 완급 조절, 모두 더할나위 없이 매끈했기 때문에 각본에 구멍이 있단 의견에 동의할 수가 없더군요.
캐릭터의 일관성과 영화의 시점
먼저 영화의 시점에 대해, 이 영화의 가장 큰 불친절함이 여기 있다고 봅니다. 폭 넓은 사람에게 편안하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선 폭 넓은 사람이 갖는 감수성과 감정으로 이야기를 바라봐야하지 않겠어요. 스토커는 인디아와 찰리의 기준으로 흐르고 있죠. 특정 부분의 감정이 거의 없단 점이 사건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보게 합니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찰리와 인디아가 인사 후 처음으로 대화를 나누는 계단씬에서 그 점이 설명되죠. 네가 지금 왜 불안함을 느끼는지 아니? 라는 찰리의 질문에 인디아는 글세요, 삼촌이 있단 사실을 방금전에 알게 되어서? 라고 답합니다. 인디아의 이 대답이 보통사람이 떠올릴 수 있는 통상적 이유죠. 감정에 의거해 추론하는게 인간관계에서의 당연한 규칙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후 이야기가 그런식으로 흘러가지 않을 거란 점을 못 박죠. 아니, 네가 불안한건 나보다 아래에 있기 때문이란다. 라는 단순 상황에 대한 찰리의 답으로요. 찰리는 정신병원에 수감되어 있었지만 가정부를 통해 그 집에서 벌어지는 일들, 특히 인디아가 어떤 특성을 보이며 자라고 있는지를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디아가 자신과 같은 동류임을 확신하고 있었죠. 그들에게 감정적인 추론은 의미가 없습니다. 반면 인디아는 삼촌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그간 학습한 일코(일반인 코스프레)의 방편으로 대답을 했던거고 사실은 감정적 불안감을 느꼈던게 아닙니다. 찰리의 대답으로 인디아는 그가 자신과 같음을(다른 이들과 다름을) 인식합니다. 암묵적인 룰이 정해진 셈이고 이후 두 사람의 대화에서 감정에 대한 부분을 확인하는 씬은 다시 등장하지 않아요. 두 사람이야 말하지 않아도~ 알~ 아요. 겠지만 관객에겐 설명이 제거된, 불친절한 전개가 되는 셈입니다. 관객이 생각하는 중요한 점이 둘에겐 사족이고 둘이 집중하는 부분은 관객에게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다시 첫 만남으로 돌아가서, 찰리의 대답을 들은 인디아는 즉각 계단을 올라 (찰리보다 한 계단 더 올라가 부족한 키를 채우고) 동등한 눈 높이에서 대화를 이어가죠. 전 이 장면에서 찰리의 목적이 드러나고 이후 이어질 인디아의 각성이 암시되었다고 봐요. 찰리의 목적은 핏줄이자 동류이자 앞서 간 선배로서 인디아의 수준을 끌어 올리고 공감과 동질감을 느끼는 것이었을테고 인디아의 각성은 그간 느껴왔던, 남과 다르지만 정확히 본질을 파악할 수 없던 자신의 특성에 관한 것이죠. 이질감을 느끼며 살아왔을 인디아에게 찰리는 매우 친절한 역활표본이 되어줍니다.
두 사람은 영화가 끝날때까지 이 장면에서 드러난 각자의 목적에서 한치의 흔들림도 없어요. 와우, 멋져라.
에블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제가 에블린 캐릭터에서 주로 재미를 느낀 부분은 영화 바깥에 있었어요. 에블린은 적당히 생각이 얕고, 적당히 감정적(즉흥적)이며, 적당히 속물적이고, 자기 욕망에 적당히 솔직한, 흔히 볼 수 있는 여성이거든요. 흠은 좀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랑스러운 보통의 여자입니다. 영화 내에선 인디아가 오랜 시간에 걸쳐 관찰 할 수 있었던 보통사람의 역활표본으로 작용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역활은 니콜 키드먼일 이유가 없는거죠. 인상적이고 히스테릭한, 더 어려운 연기를 보여왔던 니콜 키드먼이 왜 보통이 아닌 두 사람 사이의 평범한 역인 에블린 역을 수락했는가, 그 점이 재밌는거죠. 영화 바깥의 니콜 키드먼이 숙련된 연기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녀가 보여주는 스테레오 타입의 디테일이(살짝 뭉개는 발음과 사랑스럽게 뜬 목소리 톤, 당혹감을 감추려하는 부분등이 특히 인상깊었어요.) 치밀하게 계산된 연기란걸 알 수 있는거죠. 인디아란 인물에 대해 딱 보통 사람이 느낄법한 당황과 그런 감정을 감추려하는/부끄러워하는 예의 차리는 지점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구나 자신의 영특함과 연기에 대한 이해를 맘껏 발산하고 있구나. 그런 점이 너무 재밌는거죠.
하여 에블린 캐릭터도 일관적으로 작용했습니다. 딸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욕망, 자신의 인식 선 너머에 있는 딸에 대한 불만과 약간의 공포, 질투, 찰리를 원하는 마음, 껄끄러운 몇가지에 대해 눈 감아버리는 무책임함, 스스로도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혼란까지, 감정이 모자란 두 사람의 몫까지 얹어 감정의 과잉을 보였죠. 이 역활을 잘 모르는 누군가가 연기했다면 그게 그 사람의 특성인지 연기인지 구분할 수 없었겠지만 니콜 키드먼이었기 때문에 뽑아낼 수 있는 영화 외적인 감탄이 있었다고 봐요.
찰리와 인디아의 차이점
결말의 해석, 에 박찬욱이 어디까지 관여했는지는 모르지만 이 영화의 결말이 찰리와 인디아의 결정적 차이를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둘이 공유하는 (대충 말하자면) 싸이코패스적인 성향은 같죠. 둘의 차이는 타고난 부분이 아니라 환경적인 부분에서 생겼어요. 찰리는 어릴적 그의 성향을 미리 캐치한 사람이 없었고 결과적으로 최악의 방법으로 터졌기 때문에 (동생을 묻어버렸죠) 아주 어린 나이에 정신병원에 격리되었습니다. 문제를 일으킬 당시 본인의 감정이 상황이 맘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에서 나오는 불만인지, 아니면 가족(중에 특히 형)의 마음을 독차지 하고 싶단 욕망인지 구분하지 하지 못한 채 멈춰 있어야 했죠. 실제 사람과의 교류가 단절된채로 글을 통한 간접적 관계 경험만을 쌓게 됩니다. 정신적으로는 동생을 죽인 어린 나이에서 그리 성장하지 못했다고 봐요. 그래서 인디아를 원했죠. 인디아가 자신에게 답이 될거라 막연하게 열망했어요.
하지만 인디아는 그게 아님을 알고 있었죠. 동생을 겪었던 인디아의 아빠는 자신의 딸이 동생과 같음을 캐치했습니다. 그리고 딸의 이후 인생을 위해 자신이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을 가르치죠. 영화에서는 그게 사냥을 함께 하는것으로 축약되지만 결과적으론 포식자와 같은 인디아의 본성을 억누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그것을 표출해야 할때 어떤식으로 이성을 유지해야 하는지, 타이밍을 잡아야 하는지, 그래서 자신의 성향에 잡아먹히지 않고 공존할 수 있는지를 가르쳤을거라 생각해요. 덕분에 인디아는 찰리와 같은 잘못된 추론을 하지 않습니다. (자신과 같은 동류인 찰리를 구원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영화 중반에 틀어져 있던 다큐멘터리에 나오던 멘트처럼 같은 성향의 포식자 둘은 공존할 수 없죠. 함께한다면 결국 약한쪽이 잡아먹힐 거란 본능의 외침에 인디아가 귀 기울였다 생각해요. 그리고 분명히 더 미숙하고 약한 쪽은 인디아이고, 이 부분은 꽤 노골적으로 암시되죠. 찰리가 근력을 기반으로 상대의 목을 졸라 질식시키는 방식(더 만족감도 클)을 택하는데 반해 인디아는 거리를 두고 사살하는 방식을 택하니까요. 영화의 절정에서 인디아는 아버지에 배운 것처럼 상대가 방심하고 약해질 순간을 기다렸고 에블린이 찰리를 부르는 순간 때가 왔다는 것을 압니다. 곧 떠날테니 가방을 싸라는 찰리의 말에 곧이 곧대로 순응하는 대신 찰리가 앉아있던 자리에 앉아 기다리죠. 방아쇠를 당겨야 할 순간이 왔음을 직감한 인디아는 그의 아버지가 동생을 위해 예비했던 것들을 자신의 가방에 넣고 에블린에게 집중해 약해진 찰리를 날려버립니다. 여기서 또 재밌는 부분이 나와요.
왜 인디아는 찰리가 에블린을 죽이기 직전에 그를 죽였을까. 에블린이 어머니니까? 에이.. 그런 감정적 사고방식이 인디아에겐 작용하지 않는단걸 영화가 계속 주지시켰잖아요. 분명 상황만 놓고 본다면 여기서 벌어진일을 부분적으로나마 알고 있는 에블린을 남기는게 비효율적이며 이후 문제가 될 소지를 남긴다는걸 인디아도 알고 있을겁니다. 그렇다면 찰리가 에블린을 죽인 직후(여전히 찰리가 약해졌단 조건이 성립되는 타이밍)에 총을 쐈어야죠. 하지만 인디아는 전에 찰리를 해치웠단 말이죠. 왜 그랬을까. 이 부분에 대한 연결고리로 전 인디아가 에블린의 커피를 준비하는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그녀의 생활 패턴에 맞게 차를 준비하는 행위는 인디아에게 어울리지 않아요. 인디아가 아버지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처럼 분야는 다르지만 에블린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았을거라 생각되는거죠. 에블린이 바라는 감정적 교류를 충족시켜주진 못하지만 (그럴 생각도 없고) 인디아 나름의 방식으로 어머니를 관찰하고 본인이 느끼기엔 불필요한 행동을 함으로 그게 통상의 모녀 관계가 갖는 끈끈함은 아닐지라도 인디아식의 의미를 부여했다. 생각되는거죠. 아마 이후 인디아의 삶에서 어머니를 관찰했던 시기의 경험이 상당한 도움이 될겁니다. 아, 그러고 보니 의심의 씨앗을 품었던 보안관을 처리하고 마을은 뜬 것 역시 에블린을 위한 행동으로 볼 수 있겠네요. 100% 에블린을 위한 행동이라기 보단 본인의 영달을 위함과(보안관이 끈질기고 직업정신 투철한 사람이라면 이후 인디아에게도 걸림돌이 될 수 있으니까) 취조 중 본인을 당황시키며 몰아붙인데 대한 수틀림의 원인이 컸겠지만 일정부분은 남아있는 에블린의 앞으로를 예비한 행동이었다고도 봐요. 하지만 역시나 인디아의 관점이고, 에블린의 관점에서 보면 그녀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감당하기 힘든 사실과 함께 버려진거겠죠. 인디아가 남기고 떠난 것(신발 상자)에 둘러쌓여 죽은 듯 늘어져 있던 에블린은 앞으로도 평생 자기 딸과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이해하지 못할겁니다.
결국 찰리에겐 이 두 사람이 없었던 셈. 아니 본인까지 세 사람이 없었군요. 인디아는 각기 다른 요소의 역활 모델이 되어 준 세명이 있었기 때문에 찰리와 다른 결론을 내렸다 봅니다. 본능에 함몰되지 않고 이성적 판단을 했죠. 그래서 마지막 나레이션이 끝나고 앤딩곡 자막이 뜨는 순간 으악! 진짜 반했다! (속으로) 소리를 질렀던겁니다. 역시 정확하겐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딸도 되었고 아들도 되었다. 는 식으로 시작되는 노래였는데 탁월하죠. 세 사람의 유산을 물려 받은 인디아는 딸도 아들도 아닌 무언가인 셈이니까요. 어머니의 블라우스를 입고 아버지의 벨트를 차고 삼촌이 준 구두를 신은 인디아는 태어난 그대로의 날것이 아니라 세사람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무언가입니다.
이것은 소녀의 성장물?
아뇨, 절대. 이 영화엔 성이 없어요. 여성과 남성의 성 말입니다. 인디아는 소녀라는 단어가 함의하고 있는 어떤 요소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나이와 생물학적 구조만이 소녀죠. 인디아가 성장하나요? 학습은 합니다. 찰리의 행동을 관찰하며 본인이 갖고 있던 혼란을 종식시키고 실리적인 행동수칙을 배우는 식으로 학습하죠. 하지만 성장은 그게 아니잖아요. 뭔가가 더 생겨나야 성장이잖아요. 영화에서 인디아는 원래 있던 자신의 성향을 각성한 겁니다. 그 한 단락을 뚝 잘라 영화로 보여주는 것이고요.
다시 영화의 구멍
몇몇의 감상과 달리 전 이 영화가 너무 빽빽하다 느꼈어요. 감독이 허비되는 씬에 대해 강박관념이 있다 싶을 정도로 모든 씬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느꼈죠. 기억나는 몇가지라면.. 아, 고모 할머니를 폰 부스에 몰아 넣은 장면 말입니다. 카메라 워킹(?이라고 말하는게 맞나요?) 이 버클을 푸르는 찰리의 허리께로 클로즈업되면서 벨트의 당겨지는 끝을 따라 회전해 완전히 뽑힐때까지 따라가죠. 그냥 그런식의 연출이 긴장감을 조성하기 위해 혹은 너무 정직하게 움직임 없이 잡으면 스타일리쉬~ 해보이지 않으니까능~ 의 나이브한 식으로 선택되어지는게 아니라 벨트, 에 담긴 온갖 메타포(?에잇, 제가 용어에 약합니다.) 를 과시하듯 집중시키는 식이죠. 첫째로 에블린과 찰리가 인디아를 지나 테니스를 치러 갈때 대화를 나눈 장면과 접점이 있고(인디아 아빠의 벨트를 찼단 대화를 나누죠) 찰리가 굳이 많은 살해 방법 중 벨트로 질식 시키는 방법을 택하는지에도 집중하게 만들고 (상대가 죽는 순간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으며 본인의 힘의 우위를 과시하는 최적의 방법) 이후 이어질 인디아의 아버지의 벨트 운운 장면과도 연결되죠. 심지어 살인이 일어날 것임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집중용으로 작용해요. 어머, 이런걸 중의적이라 하는 건가? 또 초반 인디아가 침대에 누워 날개짓을 하는 행동을 취하는 것이라던지 삼촌의 가방에서 물총이 나오는 장면이라던지 찰리와 에블린이 외출을 나갈때 무표정하던 찰리의 얼굴이 에블린을 대하는 직전에 미소로 바뀌는 장면이라던지 인디아가 막판에 보안관을 보며 씽긋 웃는 장면이라던지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모든 장면에 대구를 만들어놨다. 랄까요. (비슷한 어조나 어세를 가진 것으로 짝 지은 둘 이상의 글귀, 의 대구를 말합니다) 하여 구멍은 커녕 너무 빽빽해 좀 재수 없을 지경이었어요. 다행히 빽빽한 메타포들이 배배꼬여있지 않고 비교적 명확했기 때문에 이게 상업 영화의 재미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작용했던거지 여기서 더 가면 위험하지 않나.. 생각들었습니다. 박찬욱 감독 하.. 거.. 사람 참.. 이보다 더 나가면 재밌을려고 영화 보는 단순 관객인 난 더이상은 못 좋아하겠구나~ 싶기도 하고.. 완벽하면 오히려 가공의 느낌이 날 수 밖에 없단 생각도 스치고.. (적당한 우연과 공백을 넣어줘야 진짜 현실에서 있을 법한 일처럼 느껴지죠. 현실은 픽션보다 구멍 투성이니까)
여하튼 스토커 정도라면 제 구미엔 딱 맞아요. 거라췌~ 자고로 영화라믄, 이 정도 가오는 잡아 줘야제~ 라는 마음.
영화 외적으로 상상해 볼 수 있는 부분
이 영화는 영화 외적으로 흥미로운 스토리를 갖고 있으니까요. 듀게에 올라왔던 박찬욱 감독이나 니콜 키드먼 등의 인터뷰를 찰지게 읽었던 탓에 아무래도 영화를 찍는 당시의 상황이 연상되서 그 부분에서도 재미를 찾을 수 있었어요. 제가 집중해서 이입한 부분은 낮선 장소에서 영화를 찍어야 하는 감독의 여건이었는데 훕, 박찬욱이 매우 영민한 필터 같은 창작가란 느낌을 받았죠. 영화라는 장르가 따지고 보면 여러 창작분야를 포함한 종합예술이지 않습니까. 재료가 많고 분방한 만큼 그것들을 적절히 선택하고 어우러지게 배치하는 말 그대로 판단을 위한 안목이 감독이란 자리에서 요구되는 자질이죠. 박찬욱이 이걸 참 잘하는 구나. 자기가 다루는 것이 뭔지 너무 잘 알고 있구나. 즉, 프로페셔널하네. 와 감독의 기준을 통해 엄선한 재료들을 집어 넣어 스스로가 큰 필터처럼 작용을 하는구나. 박찬욱을 통해 나온 재료들은 그의 목적에 맞게 배치되고 작용하구나. 즉, 곤조 있네. 예술가시당~ 식의 인상을 강하게 받았죠. 그리고 싶은 명확한 무언가가 속에 있고, 그걸 자신이 어디까지 구현해 낼 수 있는지 한계마저 알고 있는 똑똑한 사람이 느꼈죠. 예~
뭐 박찬욱이 그런 류의 감독이란 사실은 전작들을 통해서도 충분히 느끼고 있었죠. 그럼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왜 또 입 아프게 떠드느냐, 이번엔 감독륌~ 헐리웃~ 갔잖아요. 아.. 나고 자라고 익숙한 정서와 환경에서 영화 감독으로서 쌓아 놓은 입지도 있어 본인이 그리고 싶은 장면을 위한 재료를 쉽게 떠올리고 취사선택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던거죠. 그보다는 간 곳에서 생소할 뿐더러 한정된 재료들을 놓고 그것들에서 본인이 생각하는 무엇을 뽑아내야 하는 상황이었단 말이죠. 전후 관계가 뒤바꼈을거라 생각해요. 전자의 상황에서 아주 잘 했던 사람이라도 후자의 상황이 되면 (재료가 익숙치 않고 적을 뿐더러 행동에도 제약이 걸리는) 제 실력을 발휘 못하는게 당연하다 봐요. 하지만 박찬욱은 조건에 아랑곳 않고 결과를 내놓았죠.
하, 일련의 정보에서 이런 장면이 연상되더란 말입니다. 박찬욱 감독이 요리 안해먹고 관심도 없는 남의 집에 가서 냉장고와 찬장과 근처 텃밭을 뒤진 다음에 긁어 모은 해괴하고 빈약한 재료로 씻고 다듬고 볶고 조리더니 박찬욱 감독이 집에서 먹던 요리를 똭 거하게 차려내는 뭐 그런 장면이요. 이 사람은 조건이 갖춰져서 잘한게 아니라 조건이 안되도 잘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인상에 재밌고 경이로웠습니다. 좀 짜증나긴하죠. 이런 사람 있음 내 핑계거리가 더 작게 쪼그라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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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글을 쓴지 하도 오래되서 글쓰기를 눌러도 뭘 써야 할지 난감했는데 그래도 쥐어짜니까 나오긴 하네요. 글도 꾸준히 써 버릇해야지 안 쓰면 퇴화하는게 분명합니다 ㅜㅜ
그래도 영화 관련글을 썼더니 방세! 방세! 드.. 드디어 나도 방세를 냈어!! 싶은게 어딘가 처박혀 있는 듀게에 대한 부채감(?) 같은것도 해소되는 것 같고 그러네요.
여튼 그랬다고용, 전 스토커 되게 되게 재밌게 봤어요. 아직까진 저 감독이랑 내 코드가 맞나봐요. 이런 사람이 날 서 있는 동안 영화를 많이 만들어줬음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