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스토킹의 기억

 

벌써 10년 전의 일이로군요.

저에게는 조금 부끄러운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 이십대 초초반의 철은 없고 생각만 많던 시절,

어떤 피아니스트를 좋아하여 약한 강도이긴 하지만 스토킹의 행위에 속하는 행동을 했던 기억이에요.

그 내용인즉슨, 그 피아니스트의 집을 알게 되어 매주(매주는 아닐 수도 있네요. 아마 2~3주에 한번이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분의 집 우체통에 제가 그린 그림을 넣어두었던 거죠.

 

지금으로서 신기한 건, 제가 그분의 집을 대체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사소한 기억력이 꽤 좋은 편이라고, 그래서 스스로는 피곤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저도 잊어가는 일들이 느는 모양이네요.

아무튼, 그 시절 저는 방송에서 자주 접하던 그 피아니스트를 좋아하게 되었어요.

연주할 때는 그 누구보다도 진지해 보이는 모습이 좋았고, 저와 나이차도 많이 있으신데 그분을 볼 때마다

푸근함을 느꼈어요. 그분이 연주하는 곡들도 모두 좋아했고요. 마침 제가 그때 전공도 아니었던 피아노에 푹 빠져 있을 때이기도 했네요.

 

그러다가 어찌어찌 그분의 집을 알게 되었어요. 그분은 제가 알기로는 혼자 살았고,

제가 당시 다니던 교회에서 굉장히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어요.

아마도 그 사람과 가까워지고 싶다, 라는 욕구가 컸겠지요. 그러다 저는 제가 당시 잘할 수 있었던 일 중의 하나인

그림을 생각해 냈어요. 저의 상상, 정서적인 것들을 그림 한 장에 표현해서 보내기 시작했지요.

자세히 기억은 안 나는데 그때 그려 보냈던 그림으로는

하늘에 핀 해바라기,

바다를 가르며 어디론가 가는 인어,

나무 위에 나란히 앉아 하늘에 펼쳐진 피아노를 치는 연인(뭔가 이건 직접적이군요..)

이런 것들이 기억나네요.

 

그리고 아마도 간단한 편지도 썼던 것 같아요.

그분이 그걸 모두 받아보고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된 것은

그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시작될 무렵 열린 그분의 콘서트에서였어요.

저는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들여 콘서트 티켓을 사서 친구와 함께 갔어요.

연주도 행복하게 기쁘게 들었고요.

콘서트가 끝나고 돌아갈 시간인데 그냥 가기가 너무 아쉬웠어요.

그래서 어찌어찌 연주자 대기실 같은 곳을 찾아갔어요.

저 같은 팬들이 몇몇 그분을 기다리고 있었고, 저도 더불어 기다렸지요.

 제 차례가 되었을 때, 저는 말했어요.

제가 그림을 보내는 사람이라고.

아 이쯤에서 저 지금 하이킥할 것 같네요. 그분은 순간 소름돋지 않으셨을까...

제발 제가 그 때 만만한 인상의 사람(!)으로 보였기를 바랄 뿐이에요. 그분은 저보다 나이도 훨씬 많으시고 겪은 일들도 많으실 테니

차라리 지지리 철없는 어떤 여자애의 미련하고 특이한 행동 정도로만 여겼었기를 바랄 뿐....

 

그분은 어쨌든 표정으로는 반가워하시며 "아, 그분-"이라고 알아차리셨고

고맙다고 악수를 했어요.

그 감촉에 순간 무지무지 행복해졌던 것 같네요.

집에 돌아가는 내내 친구에게 나 당분간 손을 씻지 않겠어 라는 말을 반복했던 기억이 나는 걸 보니 말이죠.

 

그 스토킹 비스무리한 건

제가 직접 작곡하고 연주하여 녹음한(무려 집에서!피아노 옆에 녹음기 놓고!), 허접하기 그지없는 제 '1집' 테이프를

보내서 들려드렸다가 돌려받고서 끝난 것 같네요.

그때는 그냥 그림 보내듯, 그분에게 저를 보여주는 한 도구로써 제 피아노연주 테이프를 보내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피아니스트인 그분에게 뭔가 인정받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아휴(또 하이킥)

그 테이프를 가져가신 것 같긴 한데 돌려주시지는 않기에(뭐 돌려주실 방법이 따로 있겠어요)

몇주 뒤에 테이프 좀 돌려달라는 메시지를 우체통에 남겼고,

그 다음주에 그분 집 앞에 찾아갔더니 우체통에 제 테이프가 들어 있었어요.

 

뭐 알았겠죠 저도.

아무 소용 없는 일이고, 외로움에 생긴 일이라는 걸.

그리고 아무리 그래봐야 가 닿을 수 없다는 걸.

 

그리고 어느새 10년이 지났네요.

 

그분은 그때 기분이 어땠을지. 죄송하고,저를 너무 이상한 아이로만 기억하지 않으셨으면...하고 바라게 되네요.

이상한 행동을 했지만...

오늘 밤엔 그분의 연주곡을 듣고 싶어져요.

 

 

    • 그 분이 연륜있는 분이었다면 이 정도는 괜찮았을 것 같네요.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당연히 너도 나를 사랑해야해..뭐 이런 것만 아니라면야.

      근데 본문을 읽고 일본소설 하나가 생각나네요.
      호텔 벨보이가 중년피아니스트를 서브하게 되는 에피소드였는데...이게 엑스터시였나..
    • 귀여우세요~ 단편소설 한 편을 읽은 느낌이에요^^
    • 제가 그 대상이었다면 꽤 괴로웠을것 같네요.

      하지만 그 사람은 온갖 일들을 겪어왔을 테고 그래서 어느 정도는 내성(?)이 있었겠죠..
    • 예뻐요. 이런 것도 스토킹인가요? ㅎ
    • 성별이 바뀌니까 딱히 무섭게 안 느껴지는군요;

      우편함이 아니라 방안 침대였다면 무서웠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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