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커 보았습니다 [스포 유]

저는 영화에 꼭 알맹이나 교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은 아닙니다만, 아름다운 그림에는 걸맞는 이야기가 있을 수록 그 아름다움은 강렬하고 파괴적이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스토커는 분명히 아름다운 그림과 매 초를 놓치지 않는 상징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인디아의 옷, 머리, 표정, 발목, 발이 참 예쁘더군요. 집도 참 아름답고 고전적 파토스의 무대로 적절했다고 봐요. 니콜 키드먼도 금발벽안의 얄팍한 여자의 역할을 충실히 다할 수 있는 외모였죠! 물론 니콜 키드먼의 초반 대사들은 좀 끔찍했습니다. 그렇게 나 얄팍한 여자를 연기하고 있어! 라는 연기를 '문어체'로 열심히 하고 있는 느낌?

 

그럼에도 매혹적인-아름다운 건축과 예쁜 소녀, 아름다운 여자와 기묘한 남자와 그 뒤를 떠돌아다니는 희뿌옇고 미친 정신들에 대한 이야기.

 

그런데 이렇게 놓고 보았을 때, 두 가지 이야기의 기시감이 너무 강하게 듭니다. 하나는 영화 <장화,홍련>이고 하나는 소설 <롤리타>입니다.

 

먼저 <장화,홍련>의 기시감은 계단에 앉아있는 소녀, 목조바닥을 질질끄는 피. 숲을 뛰어가는 소녀, 등등 구체적 장면 외에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 다시 생각하니 장화홍련이 참 아름다운 명작이었던 것은 아름답고 고전적인 미친 그림의 뒤를 꾸물꾸물 기어다니는 미친 정신이 단순히 그냥 미쳤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끝나지 않을 비극의 지옥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평생 후회하고 후회하며 기억하고 지옥 속을 사느냐, 스스로를 위해 잊고 세계와 차단한 자기만의 작은 미친 정원에서 평생 살아갈 것인가, 어느 쪽을 택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아픈 일이죠.

 

그런데 스토커의 미친 정신에는 그런 소름끼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삼촌은 그냥 어렸을 때부터 (통속적 의미에서의) 싸이코패스였구요, 인디아도 그랬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지 않죠. 그냥 원래 그래요. 물론 밑도 끝도 없는 악의가 오히려 훨씬 더 소름끼칠 수도 있습니다. 그 가장 멋진 예가 <양들의 침묵>에서의 한니발 렉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니발 라이징처럼 김새는 영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스토커의 삼촌은 그런 '악마'보단 극단적으로 어리고 악의넘치는 꼬마가 몸만 큰 모습이죠. (작중에도 언제까지 기저귀 찰 때처럼 징징댈거냐고 하는 대사가 있었죠. 물론 그 할머니는 목졸려 죽지만요.) 나도 형네 가족이랑 같이 살래 징징하다가 안되니까 형을 죽이고, 에블린을 죽이려고 할 땐 인디아야 이거 봐바!! 멋지지!!라고 외치죠 ......... 이런 싸이코를 봐도 소름끼치기보단 그냥 한숨만 나요. 덩치만 크고 어린 짓을 하는 남자들은 세상에 너무 많은 걸요. 그런 의미에서 인디아가 삼촌의 머리통을 날려버릴 땐 참 후련했습니다. 그래 저 징징대는 덩치를 쏴버려!!!!

 

게다가 제 눈에는 그 삼촌 얼굴이...

 

러닝타임 내내 한니발 렉터 표정을 하는 오지호로 보였단 말입니다!!ㅠㅠㅠㅠㅠㅠ 도저히 집중이 안되었어요ㅠㅠㅠ

 

                                                 이 사람이                                                                               이 표정을 하면

 

 

 

이런 얼굴이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롤리타>이야기를 하자면, 롤리타의 이야기는 아시다시피 소아성애자 험버트씨가 자기 성욕때문에 인생이 꼬이는 것을 알고 괴로워하다가 우연히 어느 모녀의 집에 세들어살게 됩니다. 험버트씨는 실은 딸 쪽을 관음-_-하고자 한 것이었지만,  전형적인 '착하고 머리 빈 미인'인 엄마가 험버트씨를 좋아하게 되죠. 험버트씨는 옳타꾸나하고 엄마와 재혼을 하고 의붓아버지의 이름으로 딸을 더 열심히 관음-_-하다가 모든 것을 알아버린 엄마가 충격에 뛰쳐나가다가 차에 치여죽습니다. 그리고 둘만 남게 된 의붓아비와 딸은 근친적 관계를 맺으면서 1부가 끝나죠. 성의없는 요약입니다만, 스토커와 되게 비슷하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롤리타에서는 불쌍한 딸이 결국 저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괴로워하다가 가출해서 힘들게 살다 일찍 죽는 것과 다르게 스토커 가문의 딸은 못지않게 미친년-_-;;이자 아버지에게 교육을 잘받은지라-_-;; 삼촌을 먼저 끝장내버린다는 점이죠.

 

뭐 유사성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즐거울 것이니, 유사성이 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기시감만 계속 떠오르면서 그 이상의 몰입을 주지는 못했다는 것이 문제겠죠.

 

결론적으로는 인디아가 삼촌의 머리통을 날린 것이 가장 좋았습니다. <롤리타>의 슬픈 소녀를 떠올린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은 성장이야기라고 하겠죠. 하지만 그 나머지를 채우는 것들이 너무 부족하고, 기시감만 들고....그랬습니다.

    • 오지호에서 빵 터지는구만요
    • 근래 읽은 영화평 중에 가장 재밌게 읽었습니다.
    • 저도 스토커를 재밌게 봤습니다만.. 그래도 영화의 기본은 드라마같습니다. 영화 속에서만 가능한 일일지라도 그것의 개연성 혹은 필연성을 논리적으로 때로는 감성적으로 이해시켜야 하죠. 드라마와 이미지 모두를 만족시키면 좋겠지만(최근 영화 중에선 라이프오브파이가 이런 클래스라고 생각) 굳이 우위를 따진다면 드라마겠죠. 영화의 알맹이가 될테니까요. 어찌되었든 박찬욱은 워낙 뛰어난 감독이라... 드라마가 약해도 영화는 재미있습니다.
    • 재미있는 글 잘 읽었어요.
      박찬욱이 어릴 때부터 그림에 관심이 많았지만 자기 능력을 알고 화가의 꿈을 포기했다는 인터뷰를 어디선가 본 것 같습니다.
      저도 영화를 보는 동안은 즐겼지만 좀더 기대를 채워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 영화평을 읽고 나니 영화가 보고 싶어졌어요!
      잘 읽었습니다 ㅋ
    • "아름답고 고전적이며 미친 그림의 뒤를 꾸물꾸물 기어가는 미친 정신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지옥을 품고 있었다"
      제가 왜 <장화,홍련>을 보고나와서 영화를 곱씹어보다 비명을 지를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적확하게 짚어주시네요 후..
    • 글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심지어 오지호 관련 언급은 여태 읽어본 스토커 리뷰 중에서 가장 신선하네요ㅋㅋ
    • ㅠ_ㅠ!!! 이럴수가! 영화를 보면서 오지호 생각은 저만 했던 것이었군요....근데 저 '오지호 상'이 의외로 흔한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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