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그리즐리 맨, 수영만 시네마테크, 센텀 영화의 전당
퇴근 후에 부산의 서쪽 끝에서 동쪽 끝으로 이동해서 그리즐리 맨을 보고 왔습니다.
어린시절부터 언제나 현장에서 연구하는 동물행동학자를 동경해왔고, 슬슬 '시집 가야지?' 소리를 들을 나이가 된 지금까지도
무신론자 동물행동학자 남편을 만들어서(?) 마다가스카르로 알락꼬리여우원숭이 똥 주우러 갈 일이 생기면
철밥통을 팽개치고 흔쾌히 따라나설텐데-라는 망상을 하는 제가 봐도 티모시 트레드웰은 제정신이 아니에요.
(혹시 착각하시는 분이 있을까 적자면 티모시 트레드웰은 동물행동학자나 과학자가 아닙니다)
상대와 자신과의 거리두기에 실패한 사람이고, 무엇보다 자신만 곰을 사랑할 뿐 곰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점을 간과했죠.
하지만 그가 찍은 영상은 가슴 두근거릴 정도로 아름다웠고, 한번은 진짜 소리 내어 탄식을 했습니다.
영화를 보고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자니 처음 시네마테크에 갔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아마도 2006년 겨울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때는 센텀에 있는 으리으리한 건물이 아니라
수영만 요트경기장 한구석에 있던 거의 초라하기까지 한 단관의 자그마한 영화관이었어요.
지금은 서울로 대학원을 가버린 친구랑 주로 영화를 보러 다녔고, 둘다 엄청난 길치인 관계로 처음 시네마테크를 가던 날에는 제가 지도를 출력해갔는데
지갑 열쇠 핸드폰만 외투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시절이라 지도를 소맷부리에 말아넣어 챙겨갔고 지하철 안에서 부시럭부시럭 지도를 꺼내서는
의기양양하게 "@#, 내가 지도를 출력해왔어!"라고 외치니까 무슨 조선시대 선비냐고 빵 터지기도 했고,
지하철 3종류를 타고 가야하는 먼 여정 동안 떠드느라 잠시 정신 팔면 환승역을 곧잘 지나치기도 했고,
동백역에 내려서 아파트 단지를 질러가는 길이 있단 걸 모르고 둘러둘러서 다니다가 몇년이 지나서야 지름길이 있단 걸 깨달았고.... 뭐 그랬습니다.
지금 센텀으로 옮긴 뒤로는 소극장과 시네마테크관 두 곳에서 안 팔리는 영화들을 걸어주니까 더 많은 작품들을 접할 수 있게 됐고,
스크린도 더 커졌고, 객석도 더 좋아졌고, 집에서의 거리도 지하철 두정거장만큼 가까워졌지만 저는 어쩐지 아직은 영화의 전당에 정이 붙질 않아요.
처음 개관하던 시기에 입구를 못 찾아서 그 큰 건물을 밖에서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면서 둘레를 빙빙 돌던 일에 악감정이 남아서 그런지
과자랑 컵라면을 팔던 수영만 시절의 매점이 더 좋아서 그런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튼 현재까지는 예전의 시네마테크가 더 좋아요.
뭔가 더 얘기를 하고 싶지만 얼른 머리 말리고 자야겠습니다. 내일 출근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