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후기] 7th. 필록테테스

(Christopher Brown in The Seizure. Written and directed by Benedict Hardie, The Hayloft Project. 2012)

2월 2일 일곱 번째 희곡모임이 있었습니다. 숲 출판사에서 나온 <소포클레스 비극전집>을 목차대로 읽어 나가다가 이번 차례인 [엘렉트라]는 건너뛰고 마지막 작품 [필록테테스]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소포클레스는 여기서 일단 덮기로 했어요. 한 편을 마저 읽지 않고 남겨두는 이유는 나중에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스 3부작과 붙여 읽고 싶기 때문입니다. 오레스테이아에 이어 소포클레스의 [엘렉트라]를 읽고 연달아 에우리피데스의 [엘렉트라]로 들어가볼까 해요. 같은 에피소드가 작가에 따라 어떻게 해석되고 가공되는지 보고 싶습니다. 뭐, 그건 한참 후의 일이겠고, 올 상반기에 읽을 작품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전 목록과 다르니 모임분들은 확인 요망. 수정될 수도 있어요. 

 

02/16 페르시아인들 (아이스킬로스) 

03/02 테바이를 공격한 일곱 장수 (아이스킬로스)

03/16 맥베스 (셰익스피어) + 맥베스 연극관람

03/30 탄원하는 여인들 (아이스킬로스)

04/13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아이스킬로스)

04/27 오레스테이아 I - 아가멤논 (아이스킬로스)

05/11 오레스테이아 II -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아이스킬로스)

05/25 오레스테이아 III - 자비로운 여신들 (아이스킬로스)

06/08 엘렉트라 (소포클레스)

06/22 엘렉트라 (에우리피데스)

07/06 파리떼 (사르트르)

07/20 상복이 어울리는 엘렉트라 삼부작 (유진 오닐)

08/03, 08/17  상동

9월부터는 에우리피데스. 

 

[필록테테스]는 소포클레스의 다른 작품들만큼 유명하진 않습니다. 다른 작품들만큼 거창하거나 극적이지도 않습니다. 이 극에는 영웅의 죽음도, 근친상간이나 친부살해도 없어요. 심지어 해피엔딩이랍니다! 대신 현대인들 누구나 공감할만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수작이죠. 소포클레스가 대체로 그렇긴 하지만 이 작품은 유독 현대적이란 느낌이 드네요. 아마 그리스 비극 특유의 스펙타클이나 카타르시스보다는 인물의 심리에 집중하고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편집자가 왜 이 작품을 전집의 맨 마지막에 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지난 석 달 간의 소포클레스 독회를 마무리짓기에도 적당한 작품이었습니다. 자기연민과 세상에 대한 분노로 무인도에 고립되어 있던 한 인간이 누군가를 만나 섬 밖으로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저를 비롯해 모임분들께 어느 정도씩은 소구하는 바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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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년의 소포클레스

 

-아흔이 다 되어 쓴 이 작품으로 디오니소스제 비극경연대회에서 우승했다는데요, 요즘으로 치면 깐느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쯤 될까요? 원기왕성한 노인이셨나 봐요.

-요즘도 그러기 쉽지 않은데 마지막까지 작품으로 성공하다니 대단하네요.

-이게 마지막 작품은 아니고, (그의 장수에 관한 기록이 사실이라면) 그가 죽던 해에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가 또 나왔죠. 두 작품 모두 사회에서 배척당한 불행한 남자에 관한 얘기인데, 대체 만년의 소포클레스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평생 유복하게 살다 간 사람 아녜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당대의 아이돌로 청소년기를 보냈고(살라미스 해전에서 승리한 그리스 군대에 바치는 노래를 선창한 소년이었대요), 배우에 극작가, 그것도 비극경연대회 18회 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가진 유명 극작가에, 아테네 최고권력자 페리클레스의 절친으로 고위직에도 여러 번 올랐던, 그야말로 엘리트. 주류 중의 주류. 그런데도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고, 일찍 죽는 게 그 다음으로 좋으며 오래 살기를 바라는 것만큼 어리석은 게 없다고 인생혐오 발언을 해대죠. 자기는 살 거 다 살아 놓고..

-원래 그런 거죠. 솔로몬 왕을 봐요.

-늘그막에 아들과의 소송으로 고생했다는 루머가 있긴 하던데요. 소포클레스가 자기와 같은 이름을 가진 손자(이 사람도 극작가)만 편애한다고 아들이 고소하는 바람에 자신이 미치지 않았고 여전히 재산관리능력이 있음을 증명해야 했대요. '오래 살아봤자 비난과 불화 뿐'이라고 노래할 만도? 

-소포클레스는 21세기 뉴욕에 데려다 놔도 잘 살 것 같은 작가잖아요. 그렇게 세련되고 모던한 사람이 2500년 전 그리스에서 고대인들과 함께 살았으니 오죽했을까 싶기도 해요. 화려한 삶을 살았지만, 고독과 소수자 감성에 대해 모를 리 없었을 거에요.

-그래도 이 작품은 이전 작품들에 비해 온화하다고 할까요, 인물과 사건진행이 훨씬 부드러워진 것 같아요.

-네, 저도요. 이보다 삼십 년 전에 쓰인 [아이아스]와 기본적으로 동일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인물이나 결말은 완연히 다르네요. 아이아스가 추상 같고 칼 같고 자존심에 그야말로 목숨걸다가 파국으로 치닫는 데 비해, 필록테테스는 세상에 대한 적대감과 분노를 억누르고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니까요.  

-노작가가 삶의 그 모든 장애에도 불구하고 한 번 더 살아보라고, 한숨 푹 쉬며 등 툭툭 쳐주는 느낌 들죠.   

 

 

2. 상처

 

(-필록테테스는 헬레네의 구혼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때 했던 맹세에 묶여 그리스 연합군의 트로이 원정에 일곱 척의 배를 이끌고 참가했으나, 항해 중 잠시 정박한 크리세 섬의 신전에서 뱀한테 발을 물리고 그 상처가 심해지자 아가멤논과 오딧세우스에 의해 인근 렘노스 섬에 버려집니다.)

-아니, 다친 사람을 어떻게 아무도 없는 섬에 버려두고 가나요? 선원 몇 명 정도는 남겨두고 가지.

-죽으라는 거죠.

-그래도 일국의 왕인데 찾으러 오는 이도 없고 말예요.

-그리스 연합군도 트로이에 발 묶여 십년 동안 귀환하지 못했잖아요. 전시였던 탓도 있을 거에요.

-공식적인 이유는 상처에서 나는 악취와 필록테테스가 내지르는 비명소리 때문에 제사를 지낼 수 없다는 거였는데, 물론 비공식적인 이유들도 있었겠죠. 필록테테스가 애시당초 불쾌한 놈이었다든가 사람들이 그를 따돌리고 있었다든가 혹은 그가 다른 이들의 일상 혹은 업무수행에 방해되는 존재였다든가..

-뱀이 전통적으로 신의 힘을 상징한대요. 하필 신전에서 뱀한테 발을 물렸으니, 필록테테스가 신에게 저주받았다는 소문나기 딱 좋지 않았을까요. 한 나라의 통치자에서 졸지에 불가촉 천민으로 전락한 거죠. (써놓고 보니 오이디푸스랑 매우 비슷하네요)

-제가 엊그제 미용실에 가서 들은 얘긴데, 아, 요즘은 왜 이렇게 나이 좀 있는 언니들 얘기가 귀에 쏙쏙 들어오나 몰라, 하여간 어느날 갑자기 발바닥에 신경종이 생긴 여성분 얘길 들었어요. 통증이 극심해서 발을 땅에 디딜 수가 없는 병이래요. 4년을 집안에서 티비만 보고 지냈는데 15킬로가 빠지고 우울증으로 죽을 뻔 하셨대요. 그러다가 우연히 특수운동화를 알게 돼서 지금은 보행이 가능해졌는데, 바깥에서는 물론이고 집 안, 안방에서조차 그 운동화를 신고 다니신대요. 그 분은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생겼나, 무슨 저주라도 받은 것 같고 신이 날 버렸다 싶어 얼마나 우셨는지 모른대요. 의학이 이렇게 발달한 시대에도 그런 생각을 하는데, 고대에는 뱀에 물린 상처가 얼마나 신의 징벌처럼 보였겠나 싶어요. 

-진짜 저주라도 받은 양 그 상처는 절대 낫지도 않았죠. 십년 동안 발은 지독한 악취를 풍기며 곪아 들어가고, 거기에 자신을 유기한 그리스군에 대한 분노가 더해져 필록테테스의 심신은 말도 못하게 황폐해집니다.

-이 작품에는 안 나오지만 결국 그 상처의 독기로 필록테테스는 파리스를 죽이고 트로이 함락의 영광을 얻게 되죠. 저주스런 상처가 축복의 이면일 수도 있다는 얘긴가요. 하여간 필록테테스가 자신의 피고름을 묻혀 쏜 화살은 파리스를 명중시키지 못하고 살짝 스쳤을 뿐인데도, 파리스의 심장이 세 번 뛰기도 전에 그를 고통에 몸부림치게 만들었다고 해요.

-십년 간 질질 끌어온 트로이 전쟁을 끝내려면 헤라클레스의 활과 절름발이 필록테테스 "모두" 필요하다는 제우스의 신탁은 그러니까, 어떤 성취에는 재능 못지 않게 상처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얘기로 들리는데요.

-신의 완전무결한 무기가 상처투성이 인간과 결합해야만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게 재밌네요.

 

 

3. 분노와 자기연민

 

-상처입은 자신을 무인도에 버려두고 간 동료들에 대한 필록테테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는데요.  

-어느 순간부터는 그들에 대한 증오가 습관이 되어버렸지 싶어요. 그들은 멀리 떠나간 지 오래고 이제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않는데도, 현재의 비참함을 견디기 위해 과거의 상처에 계속 매달리고 분노를 멈추지 않는 거 같아요. 

-발의 상처가 끊임없이 그를 발작케 하니 잊을래야 잊을 수도 없죠.

-필록테테스의 나이가 대략 얼마쯤 될까요?

-헬레네의 구혼자들 중 하나였으니, 아가멤논이나 오디세우스, 아이아스 등과 같은 연배겠죠? 네옵톨레모스의 아버지 뻘?

-하는 짓이 꼭 사춘기소년 같아서요. 급격한 감정변화와 상대방한테 퍼부어대는 비난들이요.

-'사랑하는 유모를 잃고 기어다니는 어린 아기 같다'는 표현도 본문에 있었죠. 자기연민으로 비뚤어질대로 비뚤어진 상태라고 봐요. 

-자기연민만이 그 섬에서 그를 즐겁게 해주었을 테니까요. 십년. 그 오랜 세월 동안 수도 없이 꺼내서 만지고 들여다봐서 반들반들 윤이 날 지경인 자기연민. 그리고 자존심. 제 표현은 아니고, 이 작품을 개작한 시무스 히니의 [트로이에서의 치유The Cure at Troy]에 나오는 구절이에요. 쑥스럽지만 원문을 한번 읽어 볼께요.:) 

 

People so deep into                                             사람들은 너무나 깊숙이

Their own self-pity, self-pity buoys them up.         자기연민에 빠져 든다. 자기연민은 그들을 둥둥 떠오르게 해주지. 

People so staunch and true, they're fixated,          사람들, 아주 옳고 확신에 찬, 그들은 집착하고

Shining with self-regartd like polished stones.        빛이 나지, 자존심으로. 잘 닦인 돌멩이들처럼.      

And their whole life spent admiring themselves     그리고 그들은  평생을 보내는 거야.

For their own long-suffering.                                자신의 기나긴 고통을 감탄하면서.   (-해석엉망죄송)

 

-이토록 끈질기고 중독적인 자기연민에서 어떻게 하면 빠져나올 수 있을까가 이 극의 주제인 것 같아요. 그 감정을 극복하고 섬 밖으로 나가야만 다친 발도 치료받고 잃어버린 명예도 회복할 텐데 말입니다.

 

 

4. 헤라클레스의 활 & 무인도

 

-어떠한 목표물도 놓지지 않는다는 무적의 활. 

-헤라클레스가 스스로를 화장시키려 할 때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장작에 불을 붙이지 못 했는데, 지나가던 필록테테스가 불을 붙여주고 감사의 표시로 물려받은 활이죠. (화장단에 불을 붙이고 헤라클레스로부터 활을 받은 건 필록테테스의 아버지였고, 필록테테스는 자기 아버지한테 그 활을 물려받았다고도 함)

-갑자기 신탁이 내려오는 통에 이제는 그리스 군사작전에 반드시 필요한 무기가 되었죠. 긴긴 트로이 원정을 끝내 줄 유일한 무기요.

-그 정도 대단한 활이라면 그걸로 뭔가 나은 일을 했을 법도 한데, 필록테테스가 그 활로 십년 동안 한 일이라곤 비둘기를 쏘아 맞힌 거 뿐이라니.

-그한텐 그냥 생계유지수단인 거죠.

-헤라클레스의 활을 뛰어난 재능으로 해석하기도 하더라구요. 재능은 재능인데 어떤 상처나 장애 때문에 발현되지 못하고 잠재되어 있는 거죠.

-그런 알레고리로 본다면, 무인도는 필록테테스가 스스로 쳐 놓은 마음의 감옥, 뭐 그런 식으로 볼 수 있겠네요.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에 나오는 섬 같기도 하잖아요?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음식과 고통을 진정시켜주는(절대 치유는 안 해줌) 약초 정도는 제공하나, 사람을 서서히 녹여버리는 섬.

-흠.. 사이코드라마네요. 

-지금은 소실되었거나 몇 줄 남아 있지 않지만, 아이스킬로스와 에우리피데스도 이 소재로 희곡을 썼다고 합니다. 그들 작품에서도 필록테테스는 오딧세우스에게 해묵은 원한이 있고, 오딧세우스는 그리스 군에 필요한 활을 가지러 렘노스 섬에 잠입한대요. 이들의 렘노스는 무인도가 아니고, 렘노스 섬 주민들로 코러스가 구성돼요. 아이스킬로스의 드라마에서 오딧세우스는 필록테테스의 눈에 띄지 않고 무사히 활을 훔쳐낸다고 합니다. 이건 그냥 첩보물. 에우리피데스에서는 오딧세우스가 아테나 여신의 도움을 받아 다른 사람으로 변장하고, 자신도 필록테테스처럼 그리스 군대에 당한 척 합니다. 그는 렘노스에서 트로이 대표단과 경합을 벌여요. 트로이 쪽에서도 마찬가지로 그 활을 원했거든요. 그 다음은 모릅니다. 대본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P 그러나 디오 크리소스톰이라는 1세기 그리스 철학자가 이 작품을 "대단한 웅변"이요, "천재적인 토론술"을 보여준다고 평한 것으로 유추해보건데, 오딧세우스가 필록테테스의 애국심에 호소해 활을 얻었을 거래요. 이는 필록테테스가 오딧세우스에 대한 개인적 원한과 분노를 억누르고 공동체의 요구에 따를 것인가에 관한 얘기로,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다룬 <일리아스>와 같은 테마인 거죠. (이 부분은 에드먼드 윌슨의 [Philoctetes: The Wound and the Bow] 참조했습니다.)

소포클레스가 뛰어난 점은, 활을 두고 벌이는 두 남자의 경합 또는 개인과 공동체의 갈등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이 에피소드를 한 남자의 심리드라마로 밀어붙였다는 점이라고 생각해요. 그리스 비극치고는 밋밋해 보일 정도로 스펙타클과 인물 간 대립구도를 최소화하고,  렘노스 섬을 무인도로 처리함으로써 이 이야기가 필록테테스의 내면 갈등을 다룬 우화로도 읽힐 수 있게 만든 거죠. 정말 멋져요.

 

 

5. 오딧세우스

 

-[아이아스]에서 신중한 현인으로 등장했던 데 반해 여기서는 악역이네요. 신중한 건 여전하지만.

-하드보일드하죠.

-오디세우스를 나쁘게만 보긴 또 어렵더라구요. 이 사람은 상관의 명령을 이행할 뿐이잖아요. 그 일을 할지 말지 논쟁할 순 있지만, 일단 하기로 했다면 그리고 그 일을 누군가는 해야만 한다면 해버리는 사람인 거죠.

-좋아하긴 어렵지만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라 생각해요.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의 크레온 같아요. 모든 걸 실용적 차원에서 해결하려 들고, 타인의 고통에는 무관심하거나 냉소적이죠.  

-'거짓말 해도 돼요?'라고 순진하게 묻는 네옵톨레모스한테 '물론. 거짓이 우리를 구해 준다면.'이라고 망설임 없이 말하는 사람.. 잭 바우어네?

-'오늘 하루만 잠깐 파렴치하고, 남은 일생 두고두고 정직한 사람으로 찬미받고 살아.'라는 말도 넘 냉소적인데 재밌지 않아요? 조금만 임신해, 뭐 그런 농담 같아요.

-등장 분량은 적지만 캐릭터 선명해서 좋았어요. 첫 장면에서 어리버리한 네옵톨레모스에게 필록테테스 납치에 관해 자상하게(?) 가르치는 장면도 재밌었고, 막판에 필록테테스가 안 가겠다고 난리치자 그럼 됐다고, 네가 좋아하는 렘노스 섬 영원히 거닐라고 신랄하게 쏘아붙이는 장면에서도 얄밉지만 웃겼어요. '너만 궁수냐, 우리한텐 테우크로스 있다, 네 것이었을 영광은 내가 가질께. 더 이상 나한테 말걸지 마. 페어웰!' 필록테테스의 징징거림에 지쳐있던 차에 속시원하더라구요.

-네옵톨레모스를 보내 거짓말로 필록테테스를 낚는 대신 그냥 처음부터 사정 설명하고 활을 달라고 했다면 어땠을까요. 차라리 그 편이 낫지 않았을까요?

-필록테테스가 오딧세우스를 먼저 발견했다면 바로 활로 쏴죽였을 걸요?

-진심으로 사과를 했다면요? 네옵톨레모스처럼요.

-원한은 필록테테스가 버리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이지, 오딧세우스가 와서 사과한다고 풀릴 건 아니라고 봐요. 오딧세우스한테 사과할 마음이 없기도 하지만, 설령 한들... 그가 어떻게 한들 지난 십년 세월이 보상되겠어요.

-작전 짜는 법은 알아도 사람 마음 읽을 줄은 모르는 사람이라 불가능했을 거에요. 그게 이런 유형의 한계죠. 

-영리해서 의도를 간파하는데 능하고 계산도 빠르고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라, 현실에서는 대체로 이기는 편일 거에요. 그런데 타협과 계산이 먹히지 않는 사람들, 가령 전작의 아이아스나 안티고네, 이번의 필록테테스 같은 이들을 대할 때는 더없이 무능해지는 것 같아요.  

 

 

6. 네옵톨레모스

 

-석 달 전까진 들어본 적도 없는 이름들을 마치 원래 알았던 것인양 부르려니 쑥스럽구만요.

-네옵.. 톨레모스. 어려워라. 소포클레스가 만년에 손자를 편애했다더니 혹시 그 손자의 모습이 들어간 걸까요, 굉장히 선량하고 진실한 젊은이로 묘사됐네요.

-필록테테스가 영원히 탈출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섬에서 나올 수 있도록 해준 인물이죠.

-아킬레우스의 아들인데요, 그 역시 트로이 함락에 필요하다는 신탁으로 고향에서 불려왔어요. 그런데 신탁이 참 교묘해요. 퍼즐 같달까요. 네옵톨레모스는 자신이 트로이 함락의 주인공인 줄 알았다가 나중에 그 영광은 필록테테스의 것이고 자신의 역할은 그를 무인도에서 나오게 하는 것임을 이해하죠.

-타이틀롤은 아니지만, 이 극을 그의 성장기로도 읽을 수 있을 만큼 주요인물이에요. 사실상 이 극에서 실수롤 통해 성장하는 유일한 인물이구요. 필록테테스도 맨 마지막에 마음을 돌리긴 하나 그의 캐릭터 자체가 변했다고 보긴 어렵고, 오딧세우스는.. 시종일관 오딧세우스니까요.

-처음엔 뭣모르고 오딧세우스의 지시를 따르다가 나중에 자기가 필록테테스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꺠닫고는 마음을 바꾸죠. 현실에서도 드문 일이지만, 이게 그리스 비극에서는 매우 드문 유형이라고 합니다. 보통은 배역의 초기 설정 그대로 간대요. 

-막판에 실용적인 오디세우스 같은 인간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네옵톨레모스가 하죠. 빼앗은 활을 다시 돌려주고 오딧세우스와 그리스 전군을 적으로 돌리면서까지 필록테테스의 편에 선 거에요. 바로 이 장면. (문장은 제가 좀 각색했어요.)

 

'자, 활을 다시 받아요. 제가 선한 의도로 왔다는 걸 이제 믿으시겠어요? 강요하거나 하진 않을께요. 하지만 제발 신탁을 받아들이고 저와 함께 트로이로 가셨으면 좋겠어요. 가서 치료도 받고 명예도 회복하셔야지요.'

'얘야, 난 싫다. 트로이로 가서 내가 모르는 새로운 고통을 겪느니 이미 알고 있는 이 고통을 선택하겠어.'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세요? 예전에 당신을 버린 자들이 지금은 당신을 구해주려 하고 있잖아요.'

'그런 놈들을 어떻게 믿는단 말이야! 너도 아가멤논이나 오딧세우스 같은 놈들한테 좋은 일 시켜주지 말고 그냥 고향으로 돌아가. 가는 길에 나도 좀 집에 데려다주고. 아까 약속했잖아!'

'그리스 군대가 저를 죽이고 고향 땅을 짓밟을 거에요.'

'내가 널 지켜줄게.'

'당신이 어떻게요?'

'내 이 활로..'

'...... 알겠어요. 그럼 그렇게 해요.' 

 

-네옵톨레모스는 고작 활 하나를 갖고 있을 뿐인 (게다가 수시로 발작해서 정신줄을 놓아버리는) 이 불구자의 말을 냉소하지 않고 받아들입니다. 속임수나 완력에 기대어 목적을 달성하는 대신, 이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 진정한 관계가 맺어지는 감동적인 순간이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잃을 순간인 거죠.    

   

    

7. 헤라클레스

 

-바로 이때 헤라클레스가 등장합니다. 이제 올림포스 신들의 반열에 오른 그는 필록테테스에게 명합니다. 네옵톨레모스와 함께 트로이로 가서 다친 발을 치유받고 한 쌍의 사자들처럼 트로이를 함락시키고 그 영광을 누리라고. 필록테테스는 두말 않고 신의 음성에 따르고 네옵톨레모스와 함께 출항하면서 작품 끝. 오, 해피엔딩!!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씹었대요. 좀 어리둥절하긴 하죠. 마지막 두 장 남기고 헤라클레스가 등장하더니 그간의 갈등이 모두 해소되잖아요.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결말과 매우 유사한 허탈감을 주는데요. 말로만 듣던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직접 보니 어떠신지요.

-필록테테스의 심경 변화를 표현한 거라고 봤어요. 지금까지 극 속에서 보여진 필록테테스 캐릭터로 봐서는 트로이에 안 가는 게 맞고, 사실 말이 좋아 영광이지, 전쟁터 가봤자 뭐 좋은 일이 있겠어요. 네옵톨레모스는 아직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필록테테스는 고통을 겪어 본 사람이라 알았을 거에요. 그런데도 그가 헤라클레스라는 또 다른 자아를 등장시켜가면서까지 마음을 바꾼 건 아마도 네옵톨레모스의... 자기를 향한 그 무조건적인 신뢰, 동정심, 공감.. 아, 우리가 차마 입 밖으로 표현하기 닭살스러워하는 그런 감정들 때문이었겠죠. 

-저도 필록테테스의 또 다른 자아로 이해했어요. 네옵톨레모스의 손을 잡고 새출발하는 건 좋은데.. 왠지 섬 한 구석에 여전히 그의 어두운 자아가 쓸쓸이 남아 있을 것도 같아요. <라이프 오브 파이> 마지막 부분처럼 좀 슬펐어요. 

 

 

8. 다시 무인도.

 

-오늘은 별로 말씀이 없으시네요.

-필록테테스가 굳이 무인도에서 나가야 하나 싶어 가지구.. 오딧세우스 같은 놈이랑 타협하느니 그냥 바위에서 콱 몸을 날리거나 죽어버리지..

-악! 그건 안티고네잖아요ㅎㅎ

-[안티고네]나 [아이아스] 때는 말씀 잘 하시더만.. 아무래도 지금 활을 쓰고 사시나 보다.

-현실에서 맨날 타협하고 극복하고 사는데 여기서까지 그런 걸 보고 싶진 않아효. 아, 전 별로 카타르시스를 못 느꼈어요.

-굳이 섬에서 나가야 했을까요. 먹을 것도 있고 진통제도 있잖아요. 

-앙드레 지드의 필록테테스는 그냥 활 줘버리고 만족스럽게 고독 속으로 침잠한대요. 그냥 무인도에 짱 박혀서 자아실현. 

-조지 오웰이 그러는데, 감금을 견딜 수 있는 건 자기 안에 위안거리가 있는 사람들 뿐이래요. 예술가라든가 작가라든가.. 그런 사람들은 가둬둘 수록 더 좋은 작품 낼 지도 모르겠네요.:)

 

 

9. 그외

 

-소포클레스의 이 작품이 관객을 불러 모으기엔 역부족이라 생각했는지 17세기 프랑스의 한 극작가는 필록테테스에게 소피라는 이름의 딸을 주고 네옵톨레모스와 사랑에 빠지는 전형적인 로미오와 줄리엣 스토리로 각색했다고 합니다. 

-또 다른 개작 중 해이로프트 프로젝트 극단의 [발작The Seizure]에서는 네옵톨레모스 역할을 여배우가 맡았습니다. 이 사람인가봐요.

 

 (Naomi Rukavina, The Seizure. photo by Lachlan Woo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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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모임은 2월 16일 카페소소 12시. 아이스킬로스의 [페르시아인들] 읽습니다.

 

    • 잘 읽었습니다. 봄이 되면 참석하고 싶었는데, 빈 자리가 있나요?
      • 저도 참여하고 싶어요
      • 인원이 다 찼는데요, 결원 생기면 연락드리겠습니다. 결석하는 분 계실 때 한번 오셔서 분위기 보시고 계속 참석할 지 결정하셔도 되구요.:)
    • 요즘 배신당한 남편이 주인공인 부분을 쓰고 있었는데, 의외로 제가 흥칫핏 하고 투덜댔던 필록테테스의 심정을 응용하게 되더군요. 고통과 자기연민에 빠져 용서하지도 헤어지지도 못하는 종속된 남편으로요. 아 이렇게 쓰고보니 그럴 듯해 보인다;; 그렇지만 왜 깊이있는 인물이 안 나오는 것일지. 미혼이라 그런가! 아무튼 이 갈등의 원형은 참 응용할 거리가 많다고 할까, 그렇네요. 입체적인 인물상을 만들 때 아주 간단한 방법인 것 같기도... 소포클레스 할배가 존경할 창작자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점점 얄미워지고 있어요. 흥흥.
      • 그 남편이 가진 활은 무엇인지 궁금해지는데요. 소포클레스의 인물이 깊이 있는 이유는 인간의 고결함과 성격적 결함이 언제나 한쌍으로 나와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어요. 오이디푸스의 위대함과 오만함, 안티고네의 정의감과 광적인 집착, 아이아스의 용맹함과 광기처럼요. 아직 읽진 않았지만 엘렉트라도 되게 복잡하대요. 필록테테스에서는 그게 헤라클레스의 활과 악취나는 발로 너무나 잘 형상화되어 있는 거 같고요. 소포클레스 진짜 짱임.
    • 정성스러운 글 정말 감사해요. 중간에 해석해주신 <트로이에서의 치유>도 멋지네요. 그냥 얻어가기만하면 죄송하니 제가 최근에 읽은 책에서 나온 <필록테테스> 관련 부분을 하나 읽어드릴게요 (Elaine Scarry의 The Body In Pain이라는 책이에요. 번역은 제가).

      "한 언어에서 고통의 체험에 있어서의 변이들을 표현할 수 있게 해주는 특정 소리나 단어들의 집합은, 다른 언어에서는 그에 상응되는 소리나 단어를 가지지 않을 수도 있다. 소포클레스의 작품에 나오는 고통스러워하는 필록테테스는 다양한 울부짖음과 비명들을 쏟아내는데, 그리스어 원문에서 그것들은 정식 단어들(그 중에는 열 두 음절짜리 단어도 있다)의 배열을 통해 표현되지만, 영어에서는 구두점에만 변화를 준(아! 아!!!!) “아”라는 단일한 음절로 번역되기도 했다."

      --> 흥미롭지 않나요? 그리스어에 영어보다 비명과 탄식을 나타낼 수 있는 단어가 많았나봐요. 게다가 '아!!"로 번역될 수 있는 열 두 음절짜리 단어란 과연 어떤 것일까나! 한국어 번역판에서는 어떻게 번역되었는지 궁금하네요.
      • 제가 쓰면서도 너무 길어서 누가 다 읽어주려나 했는데, 고맙습니다.:) 이렇게 재밌는 책 얘기까지 해주시고 넘 좋네요. 한국어판에는 '아야,아야!' '아이코 아파, 아이코 아파!' '오오' 등으로만 번역되어 있어요. 영역본도 살펴보니 말씀하신 것처럼 'Ah!' 'Oh!' 뿐이고요. 인간의 감정이 나라별로 크게 다르진 않을 텐데.. 고대 그리스에 비극장르가 발달하면서도 슬픔 표현기법도 발달한 걸까요? 그에 대한 어휘도 풍부해지고? 옮겨주신 부분 보니까 저는 갑자기 우리나라 판소리의 애탄조나 몸짓이 궁금해지네요.
        제가 아는 유일한 그리스어 탄식은 'aiai aiai'에요.(얘네들이 같은 음운 반복으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다면, 12음절이 아니라 6음절 표현의 반복이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요?) 소포클레스의 [아이아스]에 나온 표현이에요. 아이아스의 이름은 강력한 제우스 신의 상징인 독수리에서 이름을 따서 지은 건데, 그리스어로 독수리는 '아이에토스'. 그러나 극이 진행되면서 그의 이름은 점점 슬픔과 고통의 표현인 '아이아이'를 떠올리게 되죠.
    • 개인적으로는 오이디푸스가 원톱이었는데 이제는 필록테테스가 더 좋을 지경!

      필록테테스를 네이버에서 검색해보니 데우스 엑스 마키나 관련 논문이 자동완성으로 검색어 리스트에 뜨더라구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도전하신 분이 계신 모양입니다. 저도 처음 읽을 때는, 아니... 영감님... 이러시면 곤란하지이... 하고 읽었는데 필록테테스의 또 다른 자아로 읽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말에 갑자기 작품 전체가 다르게 보이더군요.
      활, 상처, 무인도를 재능과 마음의 감옥에 대한 비유로 보는 것도 그렇고... 혼자 읽었으면 보지 못했을 것을, 여럿이 모여 읽으니 훨씬 다양하게 보게 됩니다. 모임에 참석하신 분들의 숫자만큼 책을 반복해서 읽는 느낌이어요..
      • [필록테테스]가 은근히 사랑 많이 받는 작품인 거 같아요. 누구나 자기 안에 징징대고 발작해대는 필록테테스가 있으니까.. 그런 부분이 공감을 자아내는가 봐요. 아직 심리학이 알려지지 않은 시절이라 기계장치의 신으로서만 심경의 변화랄지 양가감정을 표현하지 않았겠나 싶구요. 특히 이번 작품의 헤라클레스 등장은 그야말로 필록테테스가 심리적으로 치유되는 순간을 고대그리스식으로 표현한 거 같죠? 혹은 중독자가 각성하는 순간이라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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