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바낭] 오타쿠의 사랑 - 찰스 다윈의 러브 스토리 '찰스와 엠마'

*1. 얼마 전 트위터에서 '오타쿠의 순수함'이라는 트윗을 봤어요. 혼자 키득거리며 웃었다죠.
리차드 도킨스 인터뷰 동영상 캡처에 자막을 합성한 사진이었는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2D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일반인보다 더 순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섹스 한판 뜨려는 고귀하지 않은 동기로 연애를하지만
오타쿠들은 그저 사랑을 위해서 사랑을 하니 더 순수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에이 설마 도킨스가 이런 말을 했을까요. 하지만 재밌잖아요. 또 나름의 설득력도 있어요.
그러면서 생각나는 책 하나가 있었습니다. 찰스 다윈의 러브스토리를 다룬 '찰스와 엠마'입니다.
이 책은 작년 1월 23~24일에 읽었어요. 정확히 1년 지났네요.
그 기념으로 또 사랑(혹은 결혼)에 대해 생각해 볼 겸 이번에 다시 읽었습니다.

*2. 이 책은 바로 과학덕후, 수집덕후, 메모덕후, 논리덕후인 찰스 다윈과 이런 덕후본능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그의 부인 엠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오타쿠의 2D에 대한 열광은 아니지만, 그도 역시 실제 사람이 아닌 무언가에 빠졌던 적이 있습니다.
바로 딱정벌레입니다. 그는  심지어 그의 첫사랑인 패니와 딱정벌레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을 했었다고 합니다.
그 사이에 우물쭈물하다 첫사랑을 떠나보내죠. 그래도 충격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그에겐 탐험과 수집이라는 덕력이 있으니까요. 역시 과학덕후 답죠?

*3. 그런 그도 결혼에 대해 고민을 했다고 합니다.
1938년. 그러니깐 그의 나이 29살이 되던 해의 일입니다.
서른을 앞둔 그는 자신이 결혼해야 하는가에 대해 이성적 판단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결혼'에 대해 고민을 하면서 종이 반을 나눠 왼쪽에는 결혼해야 할 이유에 대해,
오른쪽에는 반대로 하지 말아야 할 이유에 대해 나열을 합니다.
종이 왼편 목록과 오른편 목록의 길이는 대략 비슷했으나 찰스 다윈 그 자신은 결혼하지 않을 이유보다
결혼할 이유를 더 많이 찾았거나 더 매력적으로 느꼈나 봅니다.
그는 왼쪽 목록 아래 좁은 여백에 이 고민에 대한 답을 적습니다.

'결혼하기-결혼하기-결혼하기 Q.E.D.'

Q.E.D.는 라틴어 문장 "Quod erat demonstrandum"의 약자로 수학에서 증명을 마칠 때 자주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깐 위의 문장을 다시 풀어 해석한다면 그는 자신이 결혼해야만 하는 당위성에 대해 증명하였다는 겁니다.
재밌습니다. 결혼을 감정이 아니라 이성으로 판단하고자 했던 저 행동 말입니다.

*4. 조금 다른 길로 빠져볼까요?
찰스 다윈도 그랬지만 과학자에겐 감정까지도 논리적으로 설명되어야 하는 모양입니다.
과학덕후 또는 과학자의 사랑이라고 하면 전 영화 'Beautiful Mind'를 먼저 떠올립니다.
수학자인 존 내쉬의 청혼에 앨리샤가 답하는 장면 때문이죠.
다행히 youtube에 그 장면이 있네요.


존: 우리의 관계가 장기간 보장될까? 난 어떤 증거나 확신할 수 있는 자료가 필요해.

알리샤: 미안. 방금 그게 로맨틱한…청혼이었는지 판단 좀 해보구서. 증거? 확신할만한 약속? 알았어.

알리샤: 우주가 얼마나 커?

존: 무한해.

알리샤: 그걸 어떻게 알아?

존: 자료들이 보여주지.

알리샤: 아직 입증은 안됐잖아. 본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확신해?

존: 모르지만 그냥 믿을 뿐이야.

알리샤: 사랑도 똑같아.


전 왜 이런 청혼이 로맨틱해 보이는 걸까요? 저 역시 덕후라서? ㅜㅜ


조금 덧붙이면 이 프로포즈 앞의 씬도 좋아합니다. 존과 찰스의 대화 장면요.

존: 결혼해야 할까?

찰스: 그럼, 해야지!

존: 모든 게 다 잘되고 있어. 일도 만족스럽고 돈도 충분하고 모든 게 다 맞는 것 같아. 해도 좋을지 어떻게 확신하지?

찰스: 세상엔 뭐든 확실한 것이라곤 없어. 내가 아는 유일한 진리야.


*5.(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야기의 큰 줄기 중 하나는 과학과 종교 사이의 갈등 극복입니다.

찰스 다윈은 연구하면서 종교로서의 기독교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그 시대의 여성들 대부분은 신앙심이 깊고 자기 남편도 그러기를 바라기 때문에 이러한 의심은 그가  결혼하지 못하는 이유로 작용했죠.

결혼과 엠마에 대해 생각만 해도 겁이 나고 골이 지끈거렸다고 합니다. 엠마 역시 신앙심이 깊었으니깐요.

찰스 다윈의 아버지는 '종교에 대한 의심을 숨겨라.'라고 조언을 합니다. 그래야만 결혼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셨나 봅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충고를 따르지 않고 자기의 종교적인 의심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종교적 차이를 무릅쓰고 엠마와 결혼은 한 것이죠.


생각은 달랐지만, 그들은 항상 서로 믿고 의지했습니다.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관한 이론의 초안을 완성했을 때

누군가에게 원고를 맡겨 만일 그가 사망할 경우, 어떻게 출간할지 미리 지시해두어야 했습니다.

그는 그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 그 누구보다 그의 바람을 잘 실현해주리라 믿는 한 사람을 택해야 했습니다.

찰스 다윈은 그 인물로 엠마를 선택합니다.

종교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반박하는 그 이론을 신앙심이 깊은 엠마에게 맡기다니 그가 얼마나 엠마를 믿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6.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을 옮겨봅니다.

p145~146. (엠마가 찰스에게 보낸 편지 중)

...당신과 관계된 것은 모두 저와 관계된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서로에게 속해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 저는 정말 불행할 거예요. 당신의 사랑이 날마다 제 삶을 점점 더 행복하게 합니다.


찰스는 이 편지를 읽고 울었다. 그는 더할 수 없이 그녀를 사랑했고 너무나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 진화에 대한 새로운 가설을 연구하면서, 한편으로는 종교 문제로 괴로워했다. 자기의 연구가 엠마에게 미치고 있고 앞으로 미치게 될 영향 때문에 괴로웠던 것이다. 그의 위장에 실제로 통증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런 모든 고통스런 감정에도 불구하고 찰스는 엠마의 편지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당신과 관계된 것은 모두 저와 관계된 것입니다. 이 말은 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그는 이 편지를 줄곧 안전하게 보관해두었다. 얼마쯤 뒤 그는 편지 가장자리에 이렇게 써두었다.

나 죽고 나면 알아주오. 몇 번이고 내가 이 편지에 입 맞추고 눈물 흘린 것을....... C.D.


===

결론1: 책 재밌어요. 과학 덕후 여러분들 어서 읽으세욧!

결론2: 아. 내가 찰스 다윈을 질투하다니! 나도 저런 예쁜 사랑 하고 싶다고!

결론3: 이 책 읽으면서 배 좀 아팠다. 과학자로서의 업적도 대단한데 거기가 로맨틱 가이라니! ㅜㅜ

    • 제대로 낚였습니다 도서관에 있었으면 좋겟어요.ㅜㅜ
      • ㅎㅎ약 제대로 판 것 같아 기분 좋네요.
    • 제가 감히 내쉬 박사를 반박하자면,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야 말로 과학의 본질인 것 같은데요...과학적 지식은 (예: 우주는 무한하다) 그저 최대한 엄밀하게 정의해놓은 가정들 하에서 어떤 합의된 과정에 의해서 도출된 결과일 뿐이고 연구를 더 하다보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것임을 내쉬가 몰랐을 것 같지 않은데 제 생각과는 반대네요. 제 생각에는 결혼이야말로 과학탐구과정이랑 비슷한 것 같은데...현재까지의 정보로 판단하기에는 괜찮을 것 같으니까 일단 하지만 살다보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거고, 그 무슨 일을 받아들여서 새 삶을 시작할 것인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유지할 것인지는 그 때 가서 결정할 일이라는 것도, (마치 새로운 이론이나 자료가 출현했을 때 이를 기존 이론에 흡수할 것인지 아니면, 새 이론이 사그러들어버릴 것인지, 아니면 기존 이론을 완전히 버려야만 하는 상황인건지 알 수 없는 것과 흡사) 그리고 미래의 그런 가능성을 인지하면서도 현재에는 현재의 결정을 내려야한다는 것까지 아주 흡사한 것 같아요.
      • 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네요. 제가 과학철학을 전공했다면 멋들어지게 설명을 했을텐데 불행히도 저에겐 그런 능력이 없네요.
        흠.. 저 오늘 이 생각으로 하루종일 보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요.
        좋은 생각거리 던져주셔서 감사합니다.
        • 아니 뭘요 괜히 현학적으로 써놓기는 했는데 사실 친구 찰스가 한 말과 같은 말이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세상에 확실한 건 없고, 그저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뿐이죠 뭐. 배우자 간에 믿고 의지하는 관계를 일궈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도 포함해서...엄밀히 말하면 세상에 확실한 게 있다고 생각하는/믿는 사람들은 오히려 (절대자인 유일신을 믿는) 신앙인들이 아닌가 싶어요.
    • 편지부분 좋네요.



      근데 2d덕후의 사랑이 훨씬 더 추악할수도 있어요. 캐릭터의 처녀성에 집착한다던지.
      • 아하! 위의 저 논리에 설득당하면서도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었는데 바로 이거였네요.
    • 2d덕후도 캐릭터랑 섹스한다고 봐야하지 않을까요?

      야게임 자체도 그런 컨셉이고. 동인지는 말할 것도 없구요.
      • 그렇네요. 아. 무너지는 오타쿠에 대한 환상!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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