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낭


1.


아랫쪽 글의 댓글을 읽다가 생각난 건데, 여기 와서 본 밤하늘은 정말 별이 잔뜩 있어요. 별지도 같은 거 보면 잔뜩 있잖아요? 그거랑 비슷해 보이더라고요.

자주 볼 수는 없지만 정말 아름다웠어요. 플라네타리움에 온 것 같은 광경이에요.

왜 같은 하늘인데 고향에선 그렇게 잘 보이지 않던 별들이 이곳에선 이렇게나 많이 보이는 걸까요? 신기해요. 

하늘도 다 같은 하늘이 아닌가봐요.


...음 써놓고 보니 뭔가 이상한 말이군요.




2.

안녕하세요. 잘 지내고 계신가요. 

여전히 타국 생활 중인 에아렌딜입니다.


여러분은 뭔가 갑자기 막 연달아서 들이닥치면 어떡하세요?

전 패닉해요. 완전 당황해서 어버버해요. 뭐부터 정리해야할지 감이 안 잡혀요.

나중엔 아 침착했어야 했는데 하고 후회하는 게 일상다반사지요...

어떤 상황인가 하면, 전화가 여러 군데서 울리는데(1번 회선 2번 회선 이렇게 있거든요) 정산을 하러 온 손님이 하나도 아니고 한 대여섯쯤 있고, 거기다 다른 사람이 'ㅇㅇ 어디 있어?' 하고 물으러 온다든가 하는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을 때예요.

특히 손님이 여럿 왔는데 패닉해서 마구마구 돈을 받다 보면 꼭 빠진 손님이 한둘 씩 있는 거 같아요. 아니 한둘이 아니고 꽤 많이... 왜냐면 돈이 안 맞거든요. OTL 슬퍼요...


뭔가 마구마구 들이닥치면 저도 마구마구 당황해서 괴성을 내요. 실제로 소리를 내기도 하고 속으로 눈이 @ㅁ@ 이렇게 되어선 속으로만 소리를 지를 때도 있고요.


직장 사람들은 절 이상하다고 말하면서 웃더라고요. 나쁜 뜻이 아니란 걸 아니까 저도 웃기긴 하는데... 그래도 일하는데 좀 유능해지고 싶어요.

지금 상황으로선 그냥 무능한데다 이상하기까지 한 얼간이이니까요... OTL




3.

꿈을 꾸었어요.

여기 와서 조금 호감을 가진 분이 있는데 그분이 어제 부로 일을 그만두셨어요.

근데 어젯밤 그분이 절 좋아해주시는 꿈을 꾼 거에요.

깨고 나니 정말 식겁스러웠어요.


내가 얼마나 약해져있었기에, 기대고 싶어서 그런 꿈을 꾼 걸까요.

참 우습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네요.


전 사랑을 해본 적이 없었고 아마 평생 누군가에게 그런 감정을 갖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왔는데.

신기하기도 하고 자기 자신이 어처구니없기도 한 기분이네요.

대체 이런 감정은 왜 생겨나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고요.


한편으론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의문? 이 들기도 하고요.

왜 정체성인가 하면...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그 사람의 마음에 들게 노력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소박한 의문이 들어서에요.

하지만 전 누군가의 마음에 들게 노력한다는 것 자체가 별로 마음에 안 들어요. 단지 게을러서 그렇겠지만. -_-;

뭐라고 할까, 자기 자신이라는 건 있는 그대로를 긍정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게 아닐까요. 

예쁘지 않은 자기 자신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거나, 날씬하지 않으면 내가 아니라거나 그런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것부터가 올바른 정체성의 시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과거의 전 자기 자신에 대해 큰 자책감을 갖고 있었죠.

어렸을 적 타인에게서 받았던 상처와 배신감이... 줄곧 저 자신을 옭아매고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하는 모든 행동이 다 잘못되어 있고,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다 사실은 날 싫어하고 있다는 압박감에 시달렸었죠.


사실은 지금도 조금은 그런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그런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어요. 왜냐면 너무 슬프고 미쳐버릴 것만 같아지니까요.

자기 자신을 슬프게 만드는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어요.

다른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든, 적어도 모르는 대로 두자고.....

날 싫어한다고 좋아한다고 해도, 나만은 나 자신의 편이 되어 주자고 생각하기로 했어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상할 정도로 제 자신에 대해 옛날에 생각하던 것과는 다르게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지만, 예전에는 생각할 수도 없던 방향으로 움직였다고나 할까요.


아주 사소한 변화지만 제겐 그게 혁명처럼 느껴져요.

자기 자신에 대해 죄책감을 갖지 않는 것, 단지 뻔뻔해졌을 뿐인지도 모르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예전보다 훨씬 많이 웃을 수 있게 되었어요.




4.

요즘은 일이 많이 힘들어요. 일손은 부족한데 손님과 업무는 늘었어요.

피곤한데 잠을 많이 잘 수가 없어서 영 상태가 좋지 않네요. 

더구나 쉬는 날도 줄어서 장보러 갈 수도 없고...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대부분 직장에 박혀 있는 셈이니 영 좋지 않은 정신상태에요. 


원래 어디 나다니는 걸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좀 갑갑해요.

무엇보다 장을 볼 수도 없어서 전에 이런 사태를 대비해서 잔뜩 사둔 인스턴트 카레만이 희망이네요. -_ㅜ

뭣보다도... 내가 이런 상태인데 아무도 신경써주는 사람이 없다는 게 슬펐어요. 

어차피 타인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혼자 사는 게 인생인데... 그래도 그 점이 너무 슬퍼서 어렸을 땐 자주 울었었지요.


오늘 내내 좀 울적했지만... 그래도 물건 못 사러 가는 걸로 그렇게 침울해하지는 말자, 하고 마음을 가다듬기로 했어요.

아무도 신경 안 써주면 어떠냐고, 그런 것쯤 각오하고 온 게 아니냐고 자신을 달래봅니다...





좋은 밤 되세요. 

행복한 꿈 꾸시길...

    • 엇 에아렌딜님이다.
      인스턴트 카레엔 살짝 볶은(혹은 데친) 당근이나 양파 등 좋아하는 야채를 좀 추가하면 인스턴트 느낌을 좀 없앨 수 있어용. (출처: 제 경험)
      • 앗 토끼님이다 'ㅡ'/
        음.... 문제는 추가할 채소가 없다는 거에요! 채소는 금방 상하니까 사와서 되도록이면 빨리 먹거든요. ㅠㅅㅠ 게다가 전 채소를 그리 좋아하지도 않죠(...)
        흑흑 좋은 조언 감사해요.
      • 좋은 일인가요? 보답받지 못하는 마음만큼 고통스러운 게 없다고 생각하는데.
        어쨌든 인생의 경험치가 늘었으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요. :-0
    • 바쁠 때 손님 몰릴 때 당황하지 말고 일단 좀 기다리게 하자 라고 단단히 마음을 먹으세요. 저는 백화점에서 잠깐 영업을 했는데 거기서는 점원이 당황하는 건 올바른 서비스가 아니므로; 항상 침착하고 능숙하고 여유로울 것을 요구받았거든요. 안될 거 같지만 해보면 또 됩니다. 좀 기다리게 하자, 늦어도 5분이니까 정확하게 하자 라고 생각하시면 좀 나을거 같아요. 그리고 최소한 겉으로 티 내지 않게 하면 그것만으로도 도움이 되요.
      • 으 그러게요. 저도 좀 기다리게 하자고 마음을 먹으면서 그게 잘 안 돼요. ㅠㅠ 정신차려보면 동시다발적으로 주문을 받거나 정산을 하고 있고.. 이러지 말아야 하는데. 척척 멀티태스킹이 되면 좋겠어요. ㅠㅠ
        근데 다른 얘기지만 왠지 닉넴이 눈에 익어요. 무슨 뜻이 있는 단어인가요?
    • 안녕하세요, 에아렌딜님. 글 잘 읽고 있어요. 낯가림이 심해 게시판에서는 댓글도 잘 안 달지만 오늘은 마음이 말랑해진 틈을 타 슬쩍 인사드립니다:)

      3. 누군가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내가 원한다면 누군가를 위해서 배려하는 마음으로 흔쾌히 내어주거나 맞추어 줄 수는 있지 않을까 해요. 물론 겉보기에는 거의 혹은 완전히 똑같아 보일 겁니다. 그렇지만 그 속은 천지 차이가 나요.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 싶으면 대접받는 사람보다는 대접하는 사람, 얻어가는 사람보다는 내어주는 사람, 의지할 곳을 찾는 사람보다는 의지할 곳이 되어 주는 사람, 밝아지기를 기다리는 사람보다는 불을 밝히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을 들었는데 공감이 많이 되었어요. 자기 중심이 확실하지 않으면 쉽지 않겠지만, 그런 자세는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긍정할 수 있는 힘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아요. 저는 최근에야 그런 시도를 겨우 해 볼 용기를 낼 수 있었는데요, 얼마 안 되어 차이긴 했지만 예전의 어떤 관계보다 즐거웠고 감사했어요. 무엇보다 제 자신이 그 과정에서 참 많이 배우고 성장해서 기뻤고요. 그러니 에아렌딜님도 가볍게 지켜보고 가볍게 즐겨보시면 어떨까용.

      타국 생활 씩씩하게 해나가시는 이야기 들으면서 기운 많이 얻고 있어요. 얻은 만큼 에아렌딜님께도 좋은 기운 팍팍 전해지기를 바랍니다:D
      • 안녕하세요 두리번님. 뵈어서 반가워요. :D
        공감해주셔서 고마워요. 사실 전 말씀처럼 긍정적이기만 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부정적인 편이긴 해요. 건강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타인을 사랑하면서도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흔들림이 없겠지만 저처럼 올바른 가치관을 지니지 못한 사람이 타인을 좋아하게 되면 자기 자신이란 정체성을 흔들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조금이나마 자기 자신을 긍정할 수 있게 되어서 기쁘답니다.
        제 보잘것없는 사소한 이야기가 기운을 드렸다니 또 기쁘고 쑥쓰럽네요. 기운을 얻어 주셔서 감사해요. 꾸벅 ^ㅅ^
    • 1. 밤하늘 좋아합니다. 정말 아무 불빛도 없는 한치 앞도 안보이는 정말 깜깜한 어둠속에서 본 하늘은 너무나 아름다웠어요.
      2. 패닉 -> 좌절 -> 포기 -> 그리고 현실인식... 해줄사람 없는데 내가 안하면 바뀌는건 없겠구나 -> 하나씩 각개격파!
      3. 내가 나로인해 고민하는 만큼 다른사람도 다 똑같을거라고 생각합니다. 누가뭐라해도 나는 나일뿐. 내가 나처럼 살기도 바빠요!
      4. 주변에 장보러 같이 갈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시는건? 분명히 누군가는 필요한게 있을거에요.
      • 아름답죠 정말. 저도 계속 보고 있고 싶었어요. 그렇게 별이 많은 거 처음 봤어요.
        하나씩 각개격파를 해야 하는데 정신 차려보면 뭘 어떻게 했는지 뒤죽박죽...ㅜ_ㅜ 반성해야겠어요.
        내가 나로서 살기 위한 중심을 잡는 것... 정체성을 확립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한답니다. 적어도 저는요. 지금껏 남의 말에 휘둘리기만 하고 남의 시선을 자기 것처럼 여기면서 살았으니까요. 이제부터는 자신을 위해 살고 싶어요. 나에 대해서 알아가는 여정으로 만들고 싶어요 내 삶을.
        장 보러 가는 사람이 있긴 있을 텐데, 제 빈 시간은 어김없이 저녁 7시 이후가 된단 말이죠. 여긴 마트까지 가는데 30분 정도 걸리는데 마트 문 닫는 시간은 8시경이고... 그 빈 시간에 날 기다려서 같이 가줄 사람이 있을지.. ㅜㅠ 다들 바빠서 제가 말 꺼내기도 미안해요..
    • 오 작년에도 님 글 읽었던 것 같은데 정말 몰라보게 긍정적이 되고 건강해지신 느낌을 글에서 받네요!! 축하드리고 앞으로 더욱 긍정적으로 발전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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