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고 쓸쓸하지만

 

종일 집에 있었습니다.

 

저녁 무렵 청소하고 샤워하고 잠깐 있다가 잠들어서 결국 10시에 깼습니다.

배가 고파 냉동실에 있던 등심을 조금 자르고 개성왕만두를 꺼내 만두국을 끓여먹었습니다.


요즘 거의 집에서 밥을 안 해먹는데-심지어 라면도 컵라면을 더 많이 먹어요.-

그렇다보니 어젠 갑자기 검고 작고 느린 쌀 벌레가 눈에 띄어서 싱크대 아래에 있는 쌀 바께스- 한 5리터 정도 되는 작은-

뚜껑을 열어봤더니 조금 남아 있던 쌀은 거의 화석반 가루반이 되어 있고 쌀 벌레들이 우글거리더군요.

거기서 몇 마리씩 기어나와 눈에 띌 정도가 됐나봅니다. 쌀 벌레는 작고 느려서 그리 징그럽거나 하진 않아요.

손으로 꾹 눌러 죽이는 게 오히려 미안해질 정도로 온순(?)해 보이는 녀석들입니다.

자세히 보면 장수하늘소랑 좀 비슷하게 뿔도 나 있는 것 같은데..

일부는 비닐에 담아서 쓰레기 봉투에 버렸고 일부는 쌀 바께스채로 입구를 비닐로 막아 현관문 앞에 놨어요.

오전에 갖다 버릴려고 보니까 벌레들 움직임이 없더군요. 밤새 다 기어나온 것 같지는 않고 현관문 앞이 추워서 다 얼어죽었나 싶은데

잘 모르겠네요. 아무튼 눈에 보여도 그리 징그러운 녀석들은 아니니까.

 

아. 만두국 끓여먹은 얘기를 하고 있었죠. 암튼 너무 오랜만에 집에서 뭘 해먹으려고 했더니

야채는 전무하고 오직 고기와 냉동식품과 조미료 뿐이더군요.

그래도 등심을 넣어 끓여서인지-라기보다는 소고기맛 다시다와 가쓰오부시맛 다시다를 적절히 섞어서 끓였더니 맛이 꽤 좋았습니다.

따뜻하게 만두국 끓여먹고 가만히 있으려니 문득 쓸쓸하구나.

지금까진 제가 외롭고 쓸쓸하던 시기엔 좋은 사람이 먼저 다가와 날 위로해줬죠.

난 그저 쓸쓸하게 지내는 모습을 살짝만 드러내주면 됐어요.


문제는 이젠 쓸쓸하다는 것도 드러낼 수가 없다는 겁니다.

20대 시절이야 쓸쓸해 보이는 남자라면 뭔가 있어보이고 도닥거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겠지만

다들 기반을 잡고 가정을 꾸릴 시기에 쓸쓸하네 외롭네 해봤자 그저 구질구질하고 청승 그 자체일 뿐이죠.

게다가 스스로도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는 것에 부담만 느끼고 전혀 흥미가 생기질 않습니다.


삶이. 현실이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에서 가장 괴로운 건 예전의 나는 먼 훗날 오늘의 내가

이렇게 지내고 있게 될 거란 생각을 전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원래 좀 느긋한 성격이라 웬만해선 비관하거나 조바심으로 괴로워하는 편이 아닌데

요즘은 조바심을 갖기에도 늦어버린 게 아닌가 싶습니다. 꼭 누군가를 만나고 그러는 일 뿐만이 아니라.


이런 와중에 정말 게시판에 털어놓기도 어려울 만큼 재수없고 괴로운 일들도 연달아 생겼고.

아무튼 요즘은 진짜 힘드네요.





    • 잘 드세요. 저도 얼마전에 비슷한 심리상태로 거의 먹지 못하고 바싹 말랐는데 그런 모습 보니 또 마음이 안좋아지고.. 악순환이에요. 요리해먹는 일이 마음에 안정이 되기도 하더라구요. 잘챙겨드세요. 꼭꼭~
    • 날씨가 너무 추워서 더 쓸쓸할지도 몰라요. 이제 난 뭐 더 좋은 사람 과연 만날까 해도 삶이란 것이 <br />고여있기만 하지 않더라고요...... 반드시 흐르기 마련이고 새로운 전환이 꼭 나타나요. 마음에 더 <br />찬 바람 불지 않게 새벽님이 잘하는 거랑 칭찬 많이 받았던 부분들을 상기하시면 좋겠어요......<br />새벽씨가 힘들때 다가왔던 분들이 비단 연민 때문이었겠나요. <br />그만큼 새벽씨가 매력이 많았기 때문인 걸테죠. 쌀벌레들 사라지고 나면 국수나 볶음밥이라도 자주<br />만들어 드세요. 내 손 닿는 곳이 많을수록 집도, 나 자신도 덜 스산하더라고요. <br />지금보다 더 괜찮고 다정한 날들이 꼭 다시 올 거예요.
    • 저는 얼굴도 모르는 푸른새벽님이 유머러스하고 좋은 분이라는 막연한 이미지가 있어요. 자초지종은 모릅니다만 힘내셔요.
    • 저는 이부분이 아주 맘에 걸려요... "게다가 스스로도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는 것에 부담만 느끼고 전혀 흥미가 생기질 않습니다.", 특히 전혀 흥미가 안생긴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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