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대 말때부터 집 떠나 살아왔으니 햇수로는 꽤 오래 자취를 한 셈입니다. 라면 끓일 줄도 모르던 고딩이 집을 박차고 뛰쳐나와 이런저런 일들을 겪다보니 어느 새 좋아하는 요리 프로그램 몇 개쯤 꿰며 친구들 불러다 조촐하게 파티하면 개중 집떠난지 몇년 동안 뭘 믿고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쫄쫄 굶다와서 해준 음식을 먹고 폭풍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깜따가 생애 이렇게 맛난 음식은 처음이야를 부르짖는 친구도 있으니 장족의 발전을 한 셈입니다만.
자취기간이 너무 길어져도 식탁이 참 소박해지는 것 같습니다. 처음 자취 시작했을 때부터 대략 2~3년까지는 소재고갈에 시달리다 (보통 이때쯤 참치와 달걀과 라면에 질리기 시작하죠. 된장국과 김치찌개는 의외로 꽤 오래 살아남았습니다마는;) 4~10년 동안 정점을 찍고 (각국 가정요리에 베이킹에 아이스크림 등 디저트까지 섭렵하며 한때 부엌살림상자수가 책상자 수를 넘어선 적도;;) 20년째를 바라보는 요즘 다시 엄청나게 간소해졌습니다.
오늘도 아침엔 과일로 떼우고 점심은 거르고 저녁은 단백질 근육 불끈불끈 파우더 한 숟갈로 떼우고 나니 이건 뭐 허허허허.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 꺼낸 것이 냉동식품. 자취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 수록 냉동식품과 친해지더군요. 시판 냉동식품 뿐 아니라 내가 만든 냉동식품도. 이번에도 호박을 잔뜩 갈아 얼려놨는데 언 그대로 볶다 참기름 넣고 참깨 뿌려 마무리하여 밥에 비벼먹으니 김치와 함께 이것 또한 천상의 맛.
오랜 자취의 장점이자 동시에 단점인 또다른 하나는, 시행착오의 기간동안 자신이 만든 괴작들을 버릴 수 없어 꾸역꾸역 먹다보면 미각이 파괴되어 그 어떤 괴랄한 음식도 먹을 수 있게 될 뿐 아니라 심지어 맛있게 느껴지기까지 한다는 겁니다.
뭐, 이런 뻘생각하며 먹은 호박나물 비빔밥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내일의 독거중년의 식탁은 좀 고민해봐야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