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읽는 시

  물 고인 땅에 빗방울은 종기처럼 떨어진다 혼자 있
음이 이리 쓰리도록 아파서 몇 번 머리를 흔들고 나
서야 제정신이 든다 종아리부터 무릎까지 자꾸만 피
부병이 번지고 한겨울인데 뜰 앞 고목나무에선 붉은
싹이 폐병환자의 침처럼 돋아난다 어떤 아가씨는 그
것이 꽃이라고 하지만 나는 믿기지가 않는다 그러나 혼
자 견디려면 어떻든 믿어야 한다, 믿어야한다

이성복, 높은 나무 흰 꽃들은 등을 세우고 5


  이렇게 또 첫된 희망은 밤이 되면 젖은 빨래처럼
나부끼고 머리털이 곤두서도록 잠이 오지 않는다 머
리맡에는 히말라야 기슭에서 건너온 진흑으로 만든
부처, 그리고 대서양 연안 에트레타 바닷가에서 주워
온 해골 닮은 돌, 오, 살을 떠낸 물고기 뼈 같은 잠,
너무 가벼워 내 눈엔 앉지 않는다

이성복, 높은 나무 흰꽃들은 등을 세우고 29


  창문 두 쪽을 가득 채운 나무, 저렇게 많은 잎과 가
지들이 흔들리자면 아름드리 둥치는 얼마나 비틀리겠
는가 큰 것들은 다름아닌 수많은 작은 것들의 비애의
합침 더 세게 흔들리다보면 몸통이 찢어지고 빠개질
것 같아도 질긴 비애의 세월에 겹겹이 둘러싸인 큰
나무는 밤새도록 정정하다

이성복, 높은 나무 흰 꽃들은 등을 세우고 32


  말라붙은 샘 두 개, 그 주위로 가시덤불, 검붉은 가
파른 길들 엇갈리고 아직 안 부서지고 남은 언덕 구
개, 희끗희끗 껍질 벗겨진 나무, 높은 가지 흰 꽃 세우
는 나무가 아니라 진물도 말라붙은 늙은 나무-그러
나 믿음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여전히 믿음이다

높은 나무 흰 꼿들은 등을 세우고 35


--

오랜만에 이성복 시집을 꺼내봤습니다. 견디려면 어떻게든 믿어야하는 밤, 큰 나무는 밤새도록 정정할 거라고 믿어야하는 밤, 
그럼에도 여전히 믿음에 대해 질문해야하는 밤입니다. 제 믿음이 가벼워 제 눈에 앉지 않았으면 하는, 못난 밤입니다.

    • 믿음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여전히 믿음이다..
      생각할 게 많은 시구절이네요.
    • 우리집 종려수는 몸은 너무 커졌는데 밑둥이 어릴 때 그대로 너무 가느러 태풍 불면 금방 넘어질거 같은데(그래서 넘어져도 집을 망가트리지 않을까 걱정)10몇년을 안넘어지고 있네요.
    • 이성복 시인의 모든 시집을 가지고 있어요. 그만큼 팬입니다. :) 낙타님도 좋아하시니 반갑고, 이성복님의 시를 아침부터 봐서 또 반갑네요.
      <견디려면 어떻게든 믿어야하는 밤, 큰 나무는 밤새도록 정정할 거라고 믿어야하는 밤,
      그럼에도 여전히 믿음에 대해 질문해야하는 밤입니다. 제 믿음이 가벼워 제 눈에 앉지 않았으면 하는, 못난 밤입니다.>
      어떤 일이 있으셨을까.. 견디기 위해 안간힘 쓰시는 게 멀리 저에게도 전달이 되어, 마음이 아파요.
      부디 편히 내려놓고 달콤한 잠 푸욱~ 주무셨길 바라봅니다.
      일어나시면 맛있는 거 많이 잡수시고 기운내요. 그리고 또 열심히 걸어갑시다^^
    • 사월님, 난데없이낙타를 님. 좋은 시 감사합니다. 울컥했어요.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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