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낭] 뜬금 없는 시 한 편

반 학생의 작품입니다.

대단히 훌륭하진 않지만 그래도 재밌어서.

그리고 뭔가 감정 이입을 할 수 있는 진심이 느껴지는 작품이란 생각이 들어서 잉여로운 금요일 오후에 살짝 올려 봅니다.


- 추억 -


어두운 방 안엔

밝은 모니터가 켜지고,

 

다크 서클이 진 소녀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캐릭터의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방으로

엄마가 분노와 함께 들어오시었다.

 

아, 엄마가 보여주셨던

그 엄청난 분노.

 

나는 한 마리 어린 폐인

분노에 찬 엄마의 화난 옷자락을 잡고

다 죽어가는 캐릭터를 말 없이 설명하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통수를 엄마 손이 치고 있었다.

그 날 밤이 어쩌면 내 캐릭터와의 마지막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는

그 때의 나처럼 게임에 빠져버렸다.

 

옛 것이라곤 찾아볼 길 없는 새로운 던젼에는

다시 방어력 다 떨어진 캐릭터가 죽어가는데

 

서러운 열 여섯살, 나의 머리에

불현듯 엄마의 분노의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그 밤에 화를 내던 엄마 모습이

아직도 내 머리 속에 박혀 흐르는 까닭일까.



읽으면서 이미 눈치채신 분들이 많으시겠지만, 이 작품의 패러디입니다.


성탄제 - 김종길


어두운 방 안엔

빠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山茱萸)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밤이 어쩌면 성탄제(聖誕祭)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것이라곤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聖誕祭) 가까운 도시(都市)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 오신 산수유(山茱萸)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血液)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 재능있는 학생이네요
    • 성탄제 이 시 참 좋아해요. 어릴 때, 아마 4살 정도 되는, 겨울 밤이었는데 감기에 걸려 몹시 아팠어요. 방에 누워서 끙끙 앓고 있는데, 아빠가 안방 문을 열고 들어오셨어요. 예비군 훈련인지 뭔지, 아무튼 아빠는 군복을 입고 계셨고, 저는 아빠에게 와락 달려가 안기면서 아빠 나 하루종일 아팠어, 지금도 아파 엉엉 하며 아빠 목에 매달렸죠. 아빠는 가만히 제 머리에 손을 얹으시고는 저를 번쩍 안으셨어요. 그 뒤의 기억은 없고요. 아빠에게 안겼을 때의 느낌, 추운 날 밖에서 막 들어온 아빠의 서늘한 옷자락이 무척 시원해서 열이 내리는 기분이었어요. 얼마 전 추석에 성탄제 이 시를 얘기하면서 예전에 제가 어릴 때의 추억을 말하니, 부모님 모두 엄청 어릴 때였는데 기억력도 좋다고 놀라셨죠. 아무튼, 좋아하는 시에요. 감사합니다^^
    • Ruthy/ 생활 속의 진심(...)을 담아 썼기에 가능했던 역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월/ 저도 좋아하는 시입니다. ^^ 학교에서 배웠을 땐 별 생각 없었는데 나이를 먹고 나니... (쿨럭;)
      사월님처럼 구체적으로 비슷한 기억은 없지만, 어렸을 때 차가운 겨울날 집 마루의 난로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떡 구워 먹다가 아버지가 돌아오실 때 쪼로록 달려 나가 매달리던 기억 같은 게 떠올라요. 특히나 요즘 부쩍 노쇠해지는 아버지를 보다보면 더더욱.
    • 저도 좋아하는 시! 원본만큼이나 좋네요ㅋ 한 마리 어린 폐인의 어쩔 수 없는 상황도 안타까운 진심도 다 들어 있네요. 원시는 아버지의 사랑이 주제라면 패러디는 어머니의 분노가 주제군요ㅋㅋ
    • 아주 귀염돋는 열여섯이네요.

      근데 낮에 직장컴으로 읽을 때는 학생 시의 연 사이에 매번 무슨 기호랑 영어단어랑 그런 짬뽕된 알 수 없는 조합의 한 줄이 길게 들어있어서 지저분했는데(그것도 작품의 일부인줄 알았;;;) 지금 폰으로 다시 보니 깨끗하네요. (잘모르는)크롬이니 뭐니 그런 소프트웨어의 차이인가 :)
      • 아니면 불금을 맞은 기분탓??;;
    • 고등학교 문학시간에 저런 숙제가 있었는데.. 무슨 시를 패러디하는 거였는진 정작 기억 안 나는데, 김광석에 대한 시로 변형해서 써서 반에서 제일 높은 점수를 받았던 게 기억나네요. 제 초중고 생활 중 가장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던 기억입니다. (동시에 반에서 체육 최저점은 제가 도맡아놨었지만.. 뭔 과목이든 최고점을 기록한 적도 거의 없었으므로 저에게는 의미있었던 숙제ㅋㅋㅋ) 저 시 패러디 숙제 은근히 재밌는 거 같아요, 평소에 작문 싫어하던 친구들도 다들 신나서 썼던 기억이 나요.
    • 까뮤/ 이 시 좋아하시는 분이 의외로(?) 많네요. ^^ 원작을 좀 어설프게 패러디하다 보니 마지막 부분에서 의도하지 않은(?) 부모에 대한 그리움이 느껴지는 게 옥의 티이자 매력입니다.

      브랫/ 귀엽죠. 하하.
      한글 워드에다가 타이핑한 걸 게시판에 바로 복사해 붙였는데 그러면서 뭔가 문제가 생긴 게 아닌가... 싶긴 한데 모르겠네요;

      로즈마리/ (로즈마리님이 그렇단 얘긴 아니구요;) 그래서 비슷비슷한 작품들 중 하날 고를 땐 별로 상 받을 일이 많지 않았던 학생들에게 가산점을 주곤 합니다. 가끔이지만 그런 일로 긍정적인 변화가 생기는 경우도 있어서요. ^^;
      요즘엔 패러디 쓰기를 글쓰기 공부의 첫 단계로 많이 활용되더라구요. 말씀하신 것처럼 글쓰기 싫어하는 학생들도 즐겁게, 심지어 꽤 잘 쓸 수 있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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