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는 영화와 함께...

추석 연휴가 슬슬 끝나가는군요. 뭐 저는 10월 2일에도 연가라 3일까지 푹 쉽니다만...(-_-v)


오랜만에 형 내외와 두살된 조카가 오다보니 아무래도 온집안은 조카를 중심으로 돌아가게 마련이고, 말이나 통하면 같이 놀아라도 주겠지만 낯까지 가리는 꼬마아가씨를 돌보는데 재능도 흥미도 없는 삼촌은 언제나처럼 방에 틀어박혀 책읽고 영화보는 걸로 소일했습니다. 연휴기간 집에서 컴퓨터로 또는 TV로 본 영화들에 대한 잡담 & 감상평


1. 사랑의 블랙홀(Groundhog days, 1993)


아직 어려서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을 때에도 웬지 빌 머레이는 참 좋았습니다. 고스트 버스터즈도 너무 좋았고 또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는 일말의 관심조차 없던 중고딩 때도 사랑의 블랙홀만큼은 정말 재미있게 봤어요. 그리고 나이를 먹어갈수록 빌 머레이 특유의 그 무심한 캐릭터가 마음에 듭니다. 밤에 약간 멜랑콜리한 기분에서 오랜만에 꺼내본 영화인데 변함없이 좋더군요... 


2. 맨 인 블랙 3(Men in Black 3, 2012)


블록버스터 SF 시리즈...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뻔뻔한 농담 + 유치한 말장난 + 솔직하지 못한 아저씨들의 츤데레(...) 우정 요소가 훨씬 더 강한 시리즈인 MIB 시리즈. 이번에는 드라마 요소가 좀 더 강해졌지만 변함없이 재미있었습니다. 오히려 제 기준에서는 시리즈 중 가장 좋았어요. 제이가 타임점프한 시기가 1969년이다보니 미국인들에겐 황금시절인 60~70년대와 관련되어 추억팔이 장면이나 당시의 촌스러움을 희화화하는 개그가 많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이런 장면은 많지 않습니다. 그냥 앤디 워홀의 카메오 출연과 인종차별을 풍자한 유머 정도? 아폴로 11호 발사는 스토리와 꽤 관련된 장면이고요. 토미 리 존스의 젊은 시절에 완벽 빙의된 조쉬 브롤린도 볼거리였습니다. 인상쓰고 진지할수록 오히려 더욱 토미 리 존스가 떠오르며 킬킬댐... 다만 한 가지 맘에 걸리던 게... 마지막 장면에 어린 시절 제이의 모습이 나오는데 서너살 쯤 되어 보이더군요. 1969년이면 43년 전인데 그럼 제이도 이미 40대 중후반...=_=;; 그래도 MIB 콤비에서 영건 포지션이 제이인데 너무 나이가 많은 것 아닌가요?;; 리셀 웨폰 시리즈에서 멜 깁슨이 자기도 늙었다며 툴툴댈 때가 설정상 40세였는데. 


p.s. 제드(2편의 국장) 장례식 때 케이와 오의 추도연설 2연타는 정말로 인상깊었습니다. 이런게 바로 MIB 스타일이죠. 


3. 드래곤 길들이기(How to Train Your Dragon, 2010)


이건 TV에서 본 영화. 뽀로로를 보고 싶다는 조카의 눈빛공격에 맞서며, 빨리 차례음식 장봐오라는 어머니의 요구도 꿋꿋이 버티며 본방사수했습니다. 그리고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는 작품이었어요. 유머는 웃기고 액션은 스펙터클하며 스토리는 감동적이기까지 했습니다. 바이킹과 드래곤이 등장하는 핵앤슬래시 판타지 설정에 제가 좋아하는 너드(Nerd) 성장물 이야기, 거기에 다른 종족과의 우정까지... 그 때 왜 이런 좋은 작품을 놓치고 이제서야 봤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4. 퍼시잭슨과 번개도둑(Percy Jackson and the Olympians : The Lightning Thief, 2010)


역시 TV에서 본 영화.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시간이 아까웠던 영화...=_=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올림포스로 통하는 포털이라든지, 지하세계로 통하는 입구가 헐리우드 표지판이라는 것 쯤은 귀엽게 봐줄 수 있었지만, 나머지는 아니었습니다. 뭐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야 원래 타고난 난봉꾼이니 인간에게서 태어난 사생아(데미갓)들이 한 다스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고, 다른 신들도 이해는 해주겠는데 처녀신 아테나에겐 왜 딸이 있는 거죠? 아프로디테라면 이해가 가지만 적어도 아테나는 인간하고 사랑 나눌 성격의 캐릭터가 절대 아니지 않습니까? 게다가 그 딸은 입으로는 '지혜와 전략의 여신' 아테나의 딸이라 떠들면서 실제로는 무작정 칼만 휘두르지 뭐하나 제대로 하는게 없는 병풍이고... 설정이 막장이더라도 파티 플레이라도 좀 괜찮았다면 좋았을텐데 이건 그나마 초만능 퍼시잭슨 + 쩌리 수호자 + 병풍에 민폐 여친...-_-


5. 타이탄의 분노(Wrath of Titan, 2012)


퍼시잭슨을 보고 나서 실망감을 삭이며 그리스신화 기반 블록버스터 2연타 도전!... 했으나 이 영화를 보고 나니 퍼시 잭슨이 그렇게까지 나쁜 영화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_=;; 전작이었던 Clash of Titan은 꽤 명작처럼 보일 지경이고;; 뭐 이 영화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페르세우스 이야기를 충실히 옮긴 거라 생각하는 분은 없을 겁니다. 게다가 이건 속편이니 전편에서 설정만 좀 빌려온 순수 오리지널이고요... 그런데 이 영화는 정말 거대한 똥이에요. 전편은 두 개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제우스를 자꾸 어울리지 않는 부성애의 틀에 끼워맞추려 했다는 거고(제우스는 그냥 난봉꾼입니다. 페르세우스에게 장비 지원해준 것도 아테나지 제우스는 관심도 없었어요) 또 하나는 블록버스터 주제에 액션이 형편없었다는 겁니다. 영화 초반에 전갈과 싸우는 게 가장 길고 박진감넘치는 액션 시퀀스였고 갈수록 액션의 질이 떨어졌죠. 그리고 속편인 타이탄의 분노에서는... 이 두개의 문제가 개선되긴커녕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제우스는 아들을 극진히 생각하는 자애로운 아버지일 뿐 아니라 형제애마저 지극한 캐릭터가 되어버렸고(오 마이갓!) 전편에서 그나마 악역스러운 포스를 보여줬던 하데스마저 여기에 동참해버렸습니다.(오 마이갓!!!) 하데스가 영화 중반 악역에서 탈퇴하고 그 빈자리를 메꾸는 것은 아레스와 크로노스인데 아레스는 무려 신 주제에 페르세우스에게 컴플렉스를 느끼는 찌질이이고, 크로노스는 그냥 1편에 나왔던 크라켄의 육지 버전이에요. 뭐 설정과 캐릭터가 개막장이더라도 액션만 화끈하고 볼거리만 풍성하다면 즐겁게 봐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정말 최악인 건 액션이 진짜진짜 형편없어요...=_= 아무리 8년 동안 평범한 어부로 지냈다는 설정이라지만, 페르세우스의 전투력은 1편보다도 훨씬 퇴화했습니다. 초반에 만티코어 하나 간신히 잡고는 작품 내내 먼지 뒤집어쓰며 도망다니는게 전부에요. 뭐 전편에서도 그리 날렵한 액션을 보여주진 못했다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칼 한번 휘두르는 장면을 보기 힘듭니다. 함께 다니는 포세이돈의 아들 아게노르(퍼시 잭슨, 네 형이다!)와 안드로메다 공주는 마지막 전투까지 0킬이라는 놀라운 전적을 보여주고요. 마지막에 크로노스와의 전투는 꽤 볼만합니다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전체적으로는 도대체 제작비를 어디에 쓴건지 의심될만큼 볼거리가 없습니다. 캐릭터는 똥, 스토리는 구멍 송송에 액션마저 시원찮으니...이건 그냥 망해야죠. 


p.s. 솔직히 저는 샘 워싱턴이 주연이란 것부터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얼굴이 고전적인 꽃미남도 아니고, 몸이 조각같은 근육질도 아니고, 대역없이 제대로 된 검투를 보여줄 수 있는 무술실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도 아니잖습니까...  


6. 데드맨(Dead Man, 1995)


짐 자무쉬 감독, 조니 뎁 주연, 닐 영 음악이라는 이름값에 끌려 충동적으로 본 영화! ...전반적으로 난해하고 몽롱합니다. 대사는 전혀 연결되지 못한 채 선문답만 주고 받고, 장면들은 개연성 없이 툭툭 끊어지고, 조니 뎁은 작중 절반 이상을 잠들거나 비몽사몽인 채 보내요. 여기에 닐 영의 기타는 단조롭고 심드렁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조합은... 의외로 꽤 괜찮습니다. 왠지 맥주 한병 마시고 봤으면 더 좋았을 거란 생각도 듭니다. 

    • 1. 빌머레이 후에 초탈한 표정 진짜 웃기죠 ㅎㅎㅎ
      • 많은 영화에서 빌 머레이가 보여주는 모습은 초반 "젠장 난 지금 잘못된 곳에 있어! 당장 여기서 나가야겠어!" -> 중반 "젠장!! 나갈 수가 없잖아!!" -> 후반 "...그냥 될대로 되라."인데 항상 정말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특히 나이먹어갈수록 그 특유의 심드렁하고 세상사에 초탈한 듯한 표정이 멋져보입니다.
    • 1. 빌 머레이 표정은 참 싫은데 영화랑은 잘 어울려요.
      5. 퍼시 잭슨이 나쁜 영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드실 정도라니... (이하 생략)
      • 똑같은 데미갓 이야기지만 퍼시 잭슨은 그래도 애들이니 귀여운 맛이라도 있었죠. 나름 성장하는 모습도 있었고요. 그런데 타이탄의 분노에서 진짜 신까지 낀 어른들이 전편만도 못한 모습을 보여주며 영화 내내 허우적거리다가 "넌 내 브라더!", "오케이 브라더!"를 외치더니 막판에 가족영화를 찍으려 드는 건 정말 못봐주겠더군요;;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한다며 실제로는 설정 말아먹는 이런 류의 작품들 중 가장 나았던 것은 분노한 데미갓이 올림포스에 쳐들어가 신들을 거리낌없이 쳐죽이는 '갓 오브 워' 게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신들은 그래도 진짜 신 같고 무엇보다 액션이 끝내주거든요.
    • 사랑의 블랙홀 진짜 예전에 봤었는데 종종생각날만큼 재밌고 인상적이였어요

      어떻게 저런 설정을 생각하고 영화로 만들었을까~~하며 감탄했었어요^^
      • 설정 참신한 영화 중 최고봉 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예~전에 일밤 코너에서(인생 극장이었던가...?=_= 아냐, 그건 선택에 따라 두 갈래 보여주는 거 아니었나요? '슬라이딩 도어'의 원작이라 불리는;;) 패러디된 적도 있었죠. 어차피 하루가 지나면 모든 게 리셋된다는 걸 안 주인공이 신나게 놀고 사고치다가 유치장에 수감되었는데 다음날 깨어나니 여전히 유치장. 주인공은 드디어 정상적으로 시간이 흐르는구나 환호하고 기쁜 마음으로 잠들지만, 이번엔 그날로 시간이 고정되어 영원히 유치장에서 지내야 한다는 OTL 전개였죠.
        • 저도 그 방송 기억합니다. 재밌는 건 캐스팅만 다르고 내용/콘티가 거의 같은 게 두 번 방송됐었어요. 어려서 보면서도 이렇게 똑같은 걸 왜 두 번 방송하지 싶었는데 아무도 그 얘기를 하지 않아서 내 기억이 잘못됐나 싶기도 합니다... 나름 소름끼치는 결말이었는데 다시 보고 싶어요. 누가 나왔었고 어느 프로였는지도 기억이 잘 안 나고요. ㅠㅠ
    • 5. 비행기 안에서 보았는데 나머지는 그저 그랬지만 그 부분은 좋았어요. 앞뒤로 팔 머리 달린 괴물이 나오던 부분요.
      • 딱 그 부분부터 크로노스 등장씬까지만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 10분을 보기 위해 지루하기 짝이 없는 두 시간을 참아야 했던 건 별로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습니다...=_=;;
    • 5. 원래 전편의 시놉시스에는 페르세우스를 지원해주는 역활이 제우스가 아니라 아폴로였다는군요. (그래서 초반에 신들이 회의(?)할때 아폴로가 페르세우스를 옹호해준듯..) 아마도 리암 니슨이 캐스팅 되면서 대본이 엉망이 된게 아닐까 싶습니다.
      • 그런 비화가 있었군요. 어쨌든 전편부터 이번편까지 제우스의 인자한 멘토 캐릭터는 정말 최악이었어요. 제우스는 가끔 근엄하고 현명한 모습을 보여줄지언정 권력욕 강하고 권위적이며 난봉꾼 기질마저 있는 전형적인 마초 '수컷' 캐릭터이고 또 그런 면이 두려움과 동경을 불러일으키는 매력인데, 이 영화 시리즈에선 이런 것들이 모두 거세되고 나약한 늙은이만 남았죠. 차라리 아무런 증거도 없이 퍼시 잭슨을 의심하며 하지까지 번개 못 찾아오면 전쟁이라고 눈 부라리던 번개도둑의 제우스가 훨씬 제우스다웠습니다.
    • 아... 궁금해서 찾아 보니 이런 글이! http://gerecter.egloos.com/3033224 (역시 곽재식님! 그리고 덧글의 판탈로네님!)
      궁금증이 드디어 풀렸습니다! 권해효와 신성우였네요.
      • 오옷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_+! 프로그램 제목이 환상여행이었군요. 링크해주신 블로그 기웃거리다보니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몇 개 있네요. 전체적으로 살펴보니 기존의 다른 영화나 소설에서 차용한 아이디어들도 상당히 눈에 띄지만, 지금 기준에서도 공중파 나가기 어렵겠다 싶을만큼 충격적인 설정과 스토리가 많아 놀랐습니다. 오히려 이 시절이 신진 PD나 작가들이 실험적인 단편을 시도하기엔 더 좋았다는 생각도 드네요. 오히려 요즘 공중파가 머니 게임이 심해지다보니 너무 안전빵으로 가려는 경향이 있죠. 언젠가 케이블에서라도 이 시리즈를 리메이크해줬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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