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 뒤의 식단공개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비도 내리고 달리 할 일도 없어 사진 정리를 하다 보니,

 

얼마전 생일이 있었군요. 이제 만으로도 꽉찬 스물 다섯이 되었습니다.

만으로 세어 주세요. 만으로 세지 않는 분은 사람이 아니무니다.

 

겸사겸사 친구들과 만나 생파-_-도 하고 집에 내려가서 엄마한테 생일밥도 얻어 먹고 올라왔습니다.

 

 

 

우리 엄마는 천사!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집에 내려와 친구들이랑 술이나 처먹고

싸구려 스카프 사와서 낳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며 뻔뻔하게 얼굴부터 들이미는 딸래미 뭐가 이쁘다고.

아침부터 버섯 넣은 미역국에 각종 나물에 잡채까지 무쳐 주셨어요.

이제 올해쯤 되니 엄마한테 제대로 된 선물을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반백수 고시생 딸은 그저 읍소만.

 

친한 친구들도 만나고 엄마한테 맛난 밥도 얻어 먹고 아부지께 애교 떨어 용돈도 챙겼는데

이상하게 생일 전후로 달갑지 않은 슬럼프의 전조가 느껴져 문득 긴장.

멘붕의 주화입마, 깊고 아득한 감정의 나락.

아무것도 하기 싫고 누워만 있고 싶을 때, 나도 모르게 책상에 개켜두지 않은 빨래거리가 쌓여 갈 때.

이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싱크대 앞으로 가게 됩니다.

 

괜히 국도 새로 끓이고 나물도 몇가지나 무치면서 부산을 떨다 보면 왠지 마음이 좀 가라앉는 기분이 들기도 해요.


 

그리고 아침으로 시래기랑 콩나물 잔뜩 넣은 소고기국 데워내고, 갈치는 오븐에 넣고, 마른김도 요리조리 구워서

어제 무친 나물과 한상 차려 식사를 하면 좀 안심이 되는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비가 오면 모든게 fail.



점심저녁 모두 정구지 찌짐과 칭타오로 떼우고 넘어가기도 했어요. 그 놈의 볼라벤 덕분에.



 

 

불안이 정점을 찍을 때면 손으로 꾸물럭대며 만들어야 하는 걸 생각해냅니다.

기본적으로 손재주가 없는 편이라 빚고 모양내는 건 거의 손대지 않는 편인데도요.

 


양파랑 당근, 파를 다지고 두부도 보에 싸서 물기 꽉꽉 짜냈지요. 고기는 소고기 안심.

 

 

 

세월아 네월아, 노래 틀어 놓고 동그랑땡 열두개와 햄버거 패티 두장을 만들었습니다.

손이 (물리적으로) 커서 반죽도 크게 만들어 졌어요.

  



계란물 살짝 입혀 노릇하게 구워내면 이틀치 반찬은 되는 동그랑땡 완성.

 

 

그리고 다음날 아침엔 김치찌개 끓여서 남은 나물반찬에 동그랑땡 데워 냈지요.

나머지 반찬은 깻잎장에 계란말이, 묵은 김치예요.

 

 

 

 

스터디가 있어서, 약속이 있어서, 데이트가 있어서 화장도 하고 치마도 입고 가죽백도 메고 나가 아무렇지 않은 척 이죽거리며 한참을 떠들다 들어오면

괜찮은 것 같다가도 이소라 노래나 틀어놓고 소주병 일렬로 세워놓은 채 책상 위에서 잠들고 싶어 집니다.

숙취에 자괴감이 들 것이고 그 무력감에 또 낮잠이나 잘 요량으로요.

잘 알고 있어서 너무나 무섭지만 지금 저의 생활은 제가 스스로 중심을 잡지 않으면 와르르 무너지기 십상이라

정해놓은 공부량을 지키고 그나마 집에서 먹을 땐 제대로 챙겨 먹고 최소한의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걸 누구보다 정말이지 잘 알고 있는데

아무 생각 없이 눈감고 이불 속으로 숨고 싶은 마음이 드는거죠.

그래도 이번 슬럼프는 생각보다 심하지 않아서 뺨을 쳐가며 일어나 안 만들어 본 걸 만들어 보자! 며 씩씩거리며 슈퍼까지 나가서 두반장을 사왔습니다.

 



 

처음 만들어 보는 마파두부.

 

 

 

냉장고에서 오이가 죽어가길래 소금물에 바득바득 씻어서 오이 소박이도 만들고요.

 

 

 

싼 맛에 사온 가지로 나물 하려다 좀 더 손이 가는 가지튀김도 했지요.

 

 


엄마가 보내주신 장어국 냉동실에서 꺼내 끓이고 마파두부 덮밥에다가 가지튀김, 오이소박이에 남은 계란찜.

어린잎 샐러드도 같이 냈어요.

 

 

압력솥에 영양밥을 할까 하다 아차, 우리집엔 압력솥이 없지.

바보 도 트이는 소리를 혼자 중얼거리며 냄비에다 표고버섯 말린 것 잘게 썰어 표고밥했어요.

 

 

 

약속도, 스터디도, 수업도 없는 날엔 혼자 마트를 쏘다니며 두시간 넘게 장을 보기도 합니다.

그래봤자 손에 들고온 건 떨이용 조개랑 새우가 다였지만,

가지런하게 진열되어 있는 상품의 홍수 속에서 아무거나 집어 들어 뒷면에 적혀 있는 첨가물 따위를 꼼꼼하게 읽다 보면 두시간 쯤은 껌이죠 뭐.

  



백합과 모시조개는 해캄하고 새우 등에 있는 내장도 꼼꼼하게 발라내준 뒤 고추기름에 이렇게 볶아줘요.

순두부찌개를 만들었는데 어째서 완성샷이 없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음날 아침엔 조기를 굽고 박나물을 무쳤어요.



 

다시마는 집에서 얻어온 것이고 배추나물은 저번에 무치고 남은 것 중 마지막. 마늘 장아찌는 참 오래도 먹네요.



조개 잔뜩 넣고 끓여서 시원하고 칼칼한 바람에 남은 건 소주 안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후문이.

 

  

동생이랑 같이 살고 있긴 하지만 생활패턴이 달라져서 영 같이 밥을 먹을 일이 없었(다기 보단 천인공노할 짓을 일삼아서 아침에 겸상하고 싶지 않았던게 솔직한 심정)는데

주말 저녁 오랜만에 같이 밥을 먹었습니다. 동생의 주문은 강된장.

언니가 매일 울면서 자든, 새벽 다섯시가 넘을때까지 거실바닥에 누워서 천장만 보고 있든

언니 신발을 훔쳐 신고 언니방에 토해놓는 기지배입니다만 어쩌겠어요.

 

 

하나 남은 가지로 가지나물 무치고 엄마가 보내준 생김치 꺼냈습니다. 양배추도 데치고요.

저번에 재워서 냉동시켜 둔 등갈비도 꺼내고 샐러드는 간단히 씻어서 담아내고, 고등어 굽고 마늘 장아찌 꺼내서 저녁상 완성.

 



사진은 어둡지만 등갈비 맛있게 노릇노릇 잘 구워졌어요.

 


 

강된장은 표고버섯이랑 청양고추 넉넉하게 넣어서 매콤하게 끓였지요.

 

 

그러다 지난 주말, 큰 사고는 아닙니다만 팔 센치짜리 힐을 신고 나갔다가 취중에 넘어지는 일이 발생하여 발목에 온통 멍이 잡혀서

이리 살면 안되겠구나 작은 덩치도 아닌데 옆에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놀랐을까 싶어-_- 조금 정신을 차렸습니다.

못난이처럼 굴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에 쓰린 속을 부여잡고 몇시간 팔팔 감자탕을 끓였어요.

그 날 그렇게 과음할 생각이 없었는데 선견지명이 있었던겐지 외출 전에 돼지뼈를 물에 담궈 놓고 나왔었거든요.

곰솥에 한가득 끓여서 냉동실에 차곡차곡 넣어두고 보니 부자가 된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감자탕으로 해장 했어요. 물론 감자는 들어가지 않았지요. 시래기만 잔뜩 넣고 끓인 감자탕.

 



파김치도 새로 무쳤는데 사진은 따로 없네요. 남은 계란말이에 풋고추 곁들여 냈죠.

 

 

 

어쨌든 공식적으로 슬럼프는 여기까지입니다. 앞으로 남은 시험도 마저 준비해야 하고 아직은 올 한해가 많이 남아 있으니까요.

지지부진 땅파는 일은 고만 하겠어요. 듀게에 징징 거렸더니 그나마 좀 나아지는 것 같지만 동정은 사양 할게요. 돈으로 주세요.

오늘은 폭우를 뚫고 운동도 다녀왔습니다. 부디 작심삼일이 되지 않길 바라면서.

 

 

다음 식단 공개 때는 좀 밝은 모습으로 인사 드릴게요

그럼:-)

 

 

 

 

 

    • 선리플 후감상. 생신 감축드립니다!
      • 감사합니당:-) 만으로 세어주세요!
      • 적절한 시간대입니다. 훗.
    • 일빠로 남기려 했는데 1등 놓치고, 생일이었군요 너무 축하해요. 그리고 전 생일케익 사진 다음다음의 갈치구이 사진의 밥상이 제일 혹하네요.



      그건그렇고 그건그렇고 그건그렇고, 밥상머리 앞에서 이런 말씀드리긴 뭣하지만, 아니 이 배신감은 뭔가요?
      저는 여태 벚꽃님이 30대라고 생각했어요. 늙어보여서가 아니라, 그냥 어려도 스물 아홉에서 서른 한 둘의, 아직 관록이 묻어나진 않지만 슬슬 무르익기 직전의 절정이라 믿는 그 나이. 그런데 26이라는 숫자의 초를 보면서 이건 뭔가 속은 기분,은 그냥 기분 탓이고요...

      슬럼프가 어디서 기인했는지 모르겠지만, 제 경우는 뭔가 거사를 앞두고 외면하고 싶을 땐 늘 어딘가 고장이 나거나 아프게 되던데 벚꽃님은 정갈한 밥상으로 잘 극복하시고 밥심으로 이기시어 좋은 결과 이뤄내기를 기원할게요.
      • 지금보다 더 어렸을때부터 넌 네 나이보다 더 들어 보여(?)라는 말을 칭찬으로 듣고 즐겼는데 이젠 슬슬 겁이나요. 제 나이만큼도 못할까봐요. 아직은 한창 때란 걸 잘 알고 있지만 마냥 어리지만도 않은 것 같아 뭘 자꾸 해야만 할 것 같고요.
        슬럼프가 심하면 밥도 안차려 먹고 배달음식과 인스턴트로 연명할 때도 있는데 이번엔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서 다행이예요. 쿠델카님 댓글, 반갑습니다!
        • 밥상도 밥상이지만 벚꽃님의 일면 중 일면, 빙산의 일각 중 일각을 엿본 것이라 할찌라도, 간결하나마 에두른 일상의 묘사에서도 요즘 스물여섯 살 처자가 이렇듯 속깊고 진중하다는 것을 제 주변에서는 도무지 본 바 없어서요. 정작 제 나이 스물 여섯에도 저는 조로하기만 했을 뿐, 성숙하진 못했으니까요. 저랑 비교하려던 건 결코 아니지만 암튼, 이런 밥상 차려내는 정성과 몰입이라면 뭘 해도 멋지고 섹시하실 겁니다.
      • 저희집 추석은 저런 찬에 비할 수가 없지요:^)
    • 생일축하합니다!^.^

      결혼해주세...
      • 아 듀게에서 청혼 오랜만인걸요? 하지만 애인이 있답니다:-)
    • 손이 참 야무지시네요. 잘 먹고 사는 데 드는 에너지가 만만찮은 걸 알아서 늘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 부지런함이라면 어떤 시험이든 좋은 결과 얻으실 듯. 그리고 스물여섯, 부럽습니다.
      • 감사합니다. 원래는 참 성실한 학생이었는데 고시생활 하다보니...(후략)
        스물 여섯, 으쌰으쌰!
    • 짱어국(저희 동네 발음으로다가)+표고밥+오이소박이+가지튀김 차림이 제일 먹고 싶어요.

      정말이지 가정요리 강습 이런 거 하실 생각은 없으신지...?

      "못난이처럼 굴지 말아야지 쓰린 속을 부여잡고 몇 시간 팔팔 감자탕을 끓였..."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어요. 게다가 핏물 빼는 선견지명이라니...꺾어진 오십은 도저히 가질 수 없는 지혜라고 봐요@.@
      • 반오십은 작년에 지나갔다구요 흥!
        저희 동네도 짱어국으로 발음합니다:-) 수도권에선 추어탕 정도만 먹지 장어국을 끓여 먹진 않더라구요.
        술을 한참 마시다 보면 내가 이 사이클 쯤 돌았으면 한 번 폭음하겠구나 저도 모르게 감지되는 무언가가 있는 모양입니다.-_-;
    • 이것은 굶은 버섯동산인가
      • 엄..벚꽃동산입니다만..
    • 축하드려요^^ 음식을 만들며 많은 것들을 다듬고 정리하는 것 같아요. 시들어가던 오이를 살려 맛있는 소박이로 탄생시키셨듯 새로운 힘을 얻으실 겁니다. :)
      • 감사합니다. 본디 집에서 해먹는 음식은 냉장고 안에 남아있는 부식과의 싸움입니다. 힘내서 다음 식단공개 때는 안 징징거릴게요!
    • 진짜 힐링푸드네요ㅜ.ㅜ 저도 서울에서 기숙사 생활 하는데 제대로 된 밥 못 먹고 삼김에 컵라면을 달고 사니 슬픕니당 흑흑
      이 글 보니까 자취를 해서 뚝딱뚝딱 뭐라도 만들어먹고 싶어요. 날도 추워지고 비도 오고 여러모로 쳐지는 날들인데 힘내세욧!!!
    • 어머니의 딸내미가 참 참하네요.
      음식솜씨가 아주 그냥 우와 그냥 헐 그냥... 이야 대박...
      (은 맨날 보면서 뭘 그랰ㅋㅋㅋ)
    • 일단 생일 축하해요.
      그리고 이 이상한 배신감(?)은 뭘까요. 쿠델카님 말씀처럼 연령이 못 되어도 30대 초는 되었겠다 생각했는데!!!
      스물 다섯이라뉘!(눈물 좀 닦고요.)
      그 나이 때 라면 하나 겨우 끓이던 게 고작이었던 저로서는 뭔가 넘사벽의 기운이 느껴지는군요. ㅡ.ㅜ
      지금도 그 때랑 별반 차이 없어서 더욱 쌉쌀한 게시물!
      벚꽃동산님 진정 사기캐릭이십니다. 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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