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마주 앉게 되기까지는 여러가지 우연들이 겹쳤을 것이다.
우연하게도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 방향으로 가는무궁화호를 타야할 것이고.
그것도 마침 같은 차량의 4자리 정도 떨어진 좌석번호의 티켓을 구입했어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 이전 사용자가 순방향 좌석 하나를 애써 뒤집어 마주보도록 조정해 놓았어야 한다.
이 중 하나라도 어긋났다면 함께 기차를 타지 않았거나 탔어도 같은 차량이 아니었을 것이고
그 모든게 충족했다 하더라도 나란히 같은 방향을 보고 앉아 고작해야 한 쪽이 상대방의
뒤통수나 보면서 시간을 죽였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우연이 들어맞았고 그렇게 마주 앉게 되었고 서로 인사를 하고 통성명을 하고
통로를 오가던 카트에서 구입한 캔맥주와 오징어포를 나누어 먹게 되었다.
올해 31살에 부산에서 자동차 영업을 하고 있으며 고객을 만나기 위해 서울로 가는 중이라는
명석이란 사내는 거꾸로 하다시피 기울여 맥주캔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털어마시고선 손으로
대충 자신의 입 주위를 훔쳤다. 벌써 1시간 가까이 얼마 전 헤어진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던 그는 자신이 새로 생각해낸 '여자 작업법'에 대해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래서 말입니다. '교환 연애'라고 이름 붙이면 어떻겠냐 이겁니다. 서로 헤어진 여자친구에 대한
정보를 교환해서 좀 더 쉽게 연애를 할 수 있게 하는 거죠. 보통은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얻고
호감을 얻기 위해 시간낭비를 하기 마련이지만 전 남친에게 정보를 얻는다면 그만큼 시간이나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거죠. 어차피 헤어진 마당이니 스와핑하곤 달리 도덕적으로도
크게 부담 가질 일은 아닐 거 같고요. 요컨데 '보다 적극적이고 친밀한 소개팅' 정도로 볼 수
있지 않겠어요? 다만 서로 알고지내던 친구간엔 애인과도 알고 지냈을 가능성이 높으니 실현하기
불가능하겠지만 만약 오늘 처음 만난 사이라면 보다 안전하겠죠."
그러니까 서로 이별의 아픔을 가진 남자끼리 전 여친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의 전 여친을
교환하는 식으로 소개를 해주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였다. 한숨이 나왔다.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는 목적이란 게 너무나 뻔하지 않은가? 어쩌면 평일 점심 시간, 텅텅 빈
객차에서 굳이 내 앞자리에 와서 앉은 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에게
열차표를 확인해도 되겠냐고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쪽은 어때요? 여자친구가 없다고 그러셨는데 마지막 연애가 언제였어요?"
명석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순간 그가 듀나 게시판 이용자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의 말본새나 어휘력을 보아선 인연이 없어보이긴 했지만...)
그랬다면 한 마디 말로 간단히 어색한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 텐데...
'아참, 제 게시판 아이디가 clancy라고 말씀 드렸던가요?'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