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물학 연회

오랫동안 요리를 못했더니 쓸데없는 상상력만 늘어서 옛날 과학 시간에 배웠던 각 지질시대의 대표 생물들로 음식을 만든다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선캄브리아기,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 순으로 최대한 그 시대에 구할 수 있었던 식재료를 쓰되 불가피할 경우 주변에서 구하기 쉽고 모양과 질감이 비슷한 재료로 흉내내는 것도 허용하기로 하였습니다. (미슐랭 가이드 별 셋에 빛나는 헤스턴 블루멘탈도 낙타 혹 대신 소 골수를 튀기고 멧돼지 눈 대신 타르타르 소스를 뭉쳐놓기도 하니까 저도 그래도 될 것 같습니다.) 또한 음식을 맛있게 만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사용하는 재료의 경우에는 최대한 모양을 알아볼 수 없도록 잘게 다지거나 곱게 가는 것을 원칙으로 했습니다. 만드는 방법을 가능한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았지만 역시 직접 만들어 보기 전에는 생각대로 될지 어떨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일단 그림이나 그려 올려놓기로 했습니다. 실제로 만드는 것은 언제가 될 지 저도 모릅니다.

 

 

 

1. Amuse-bouche [선캄브리아기 - 해파리 젤리]

 

선캄브리아기에 등장했던 생물인 해조류, 해파리 등으로 만들 수 있는 음식은 역시 젤리 밖에 없겠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림 같이 유리잔 안을 수족관처럼 꾸미는 것을 원했는데 처음엔 한천, 해파리, 매생이만으로 만들어 보려다가 그 정도만으로는 실감나는 바닷속 풍경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계획을 바꿔보았습니다.

 

     1) 다시마 가루를 내어 모래를 표현하고 한천으로 굳혀 해저 바닥을 만든다

     2) 1)의 해저에 캐모마일 꽃잎 등으로 만든 가짜 에디아카라 동물군을 심는다

     3) 하얀 버섯의 갓을 잘라낸 뒤 베이킹 파우더로 투명해질 때까지 녹여 조그만 가짜 해파리를 만든다

     4) 캐모마일 차에 레몬 등을 첨가한 뒤 한천을 녹인다

     5) 3)과 4)의 혼합물을 2) 위에 부은 후 재빨리 얼음통에서 굳힌다

 

3)은 만송이버섯으로 직접 실험해보았는데 뜨거운 물에 잠깐 익혔다가 일주일간 탄산수소나트륨 용액에 담아놨더니 조금 누런 빛이 도는 반투명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습니다. 아마 모르고 보면 해파리처럼 보일 것입니다. 참고로 실제 버섯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백악기라고 합니다.

 

  

 

2. Starter [고생대 - 삼엽충 라구]

 

저는 갯가재를 안 먹어봤지만 코알랄라 http://cartoon.media.daum.net/webtoon/viewer/16955 에 나온 사진을 보고 이런 비쥬얼이면 충분히 삼엽충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고사리, 부처손, 뱀밥은 고생대에 번성한 양치식물 계열이고 석이버섯은 균류와 조류의 공생체인 지의류의 일종으로 오르도비스기에 처음 지상에 출현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 갯가재살 세 덩이를 트랜스글루타미나제로 붙인 뒤 구워서 삼엽충 고기를 만든다

     2) 버터에 볶은 갯가재 껍데기와 백포도주를 끓여 육수를 내고 양파와 보라색 토마토와 육수를 넣어 끓인 뒤 갈아서 삼엽충 소스를 만든다

     3) 고사리떡을 기름에 바삭하게 튀기고 석이버섯 가루를 고물로 묻힌다

     4) 삼엽충 소스를 담은 접시에 데친 고비나물을 얹고 그 위에 고사리떡과 삼엽충 고기를 쌓아올린다

     5) 다진 부처손 잎과 뱀밥 머리로 장식한다 (그림엔 깜빡 잊고 안 그렸음)
 

3)의 고사리떡이라는 것은 일본에서 와라비모치 라고 불리는 것인데 고사리 뿌리에서 얻은 전분으로 만든 일종의 찰떡입니다. 저는 물론 안 먹어봐서 무슨 맛인지도 모르지만 그냥 고사리라서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검은색의 석이버섯 가루는 고생대 시기에 만들어진 석탄 등의 화석연료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3. Main [중생대 - 공룡 고기와 알요리]

 

조류도 공룡의 일종이라 보는 입장에서 시꺼멓고 징그러운 오골계 다리로 공룡의 다리를 표현하여 보았습니다. 송화단 역시 비쥬얼이 기묘하기도 하고 실제로 오래된 알이기도 하므로 공룡알이나 다름없다고 우기면 됩니다.

 

     1) 오골계 다리를 소나무꿀에 재운 뒤 먹기 쉬운 만화고기 형태로 만들어 굽는다

     2) 송화단을 자른 조각을 나선형으로 배치하여 암모나이트 모양으로 만든다

     3) 1)에 소나무꿀과 구운 잣가루를 섞은 겨자소스를 물방울 무늬로 바른다

     4) 3) 위에 찐 송이버섯과 튀긴 은행을 올린다

 

소나무 꿀이라는 것을 유럽에서 판다던데 소나무는 겉씨식물이므로 아마 꽃의 꿀이 아닌 송진이나 뭔가를 꿀벌이 채취하여 만드는 뭔가라고 짐작됩니다. 물론 속씨식물이 등장하기 전에는 꿀벌도 없었으므로 소나무꿀을 써도 되는지 불분명한 점이 있으나 이제와서 그런 걸 따지는 데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일단은 그냥 신기하니까 쓰고 봅니다. 사실 이전까지 파인애플이 당연히 소철 종류라고 알고 있었습니다만 뒤늦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소철을 어떻게든 음식에 이용해보려고 찾아봤더니 소철의 줄기와 씨앗에서 전분을 얻을 수는 있지만 신경독 성분이 있어서 충분히 제거하지 않고 먹을 경우 알츠하이머와 비슷한 증세를 나타내게 된다고 합니다. 분한 기분이 들어서 접시에 소철 잎이라도 깔기로 했습니다.
 

 

 

4. Pudding [신생대 - 매머드 케이크]

 

매머드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신생대 생물입니다. 디저트 하나에 매머드 한 마리를 온전히 담아내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제 지식이 일천하여 대충 해버리게 되었습니다.


     1) 동글납작한 초콜렛 케이크를 만든다

     2) 체리를 올리고 아이싱 가루를 뿌린다

     3) 화이트 초콜렛으로 된 리본을 얹는다

     4) 바닐라 껍데기에 카라멜 맛의 솜사탕을 둥글게 말아 꽂는다

 

원통형 초콜렛 케이크는 매머드 코 한 토막을 잘라놓은 것처럼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체리는 속씨식물을 대표하고 아이싱 가루는 빙하기를 나타냅니다. 솜사탕과 화이트 초콜렛은 각각 매머드의 털과 상아를 나타냅니다. 제가 봐도 디저트가 좀 약하긴 합니다만 워낙 현대의 생물군과 비슷하다 보니 딱히 참신한 것이 나오기 힘든 점도 있습니다. 신생대를 좀 더 제대로 나타낼 만한 획기적인 디저트에 관한 아이디어 제보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그림은 직접 그리신건가요?
      • 네, 갤노트로 그렸습니다.
    • 지난번에도 댓글 달았지만 고생대 ~ 중생대 ~ 현재에 사는 투구게는 어떠신지. (투구게장이라거나)
      더 검색해보니 투구게의 알은 고단백질이라는데 이거 요리 재료로 어떤가요.
      • 징그러워서 제가 못 먹습니다. 투구게 알은 한 번 고려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자신이 먹을 수 있어야만 하는 거였군요.
          • 네. 그렇지 않다면 소철 전분도 사용했을 겁니다.
    • 아, 이런 구체적인 상상 좋아요. 그림도요. 안자이미즈마루 느낌이 나네요.
      • 감사합니다. 그림에서는 색의 조합을 되도록 낯설게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 블리자드가 제공한 불곰 스테이크랑 눈보라 빙수가 연상되네요 ㅎㅎ
      • http://thexian.egloos.com/2631127 이거였군요. 좋은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 채식요리도 해주세요 거대고사리 나물이라든가... 실라칸스찜 같은 것은 어떨까요
      • 전혀 생각도 못했던 부분이네요. 검색해보니 하와이나 뉴질랜드에 사는 거대고사리나무 싹도 식용이 가능하다고 하는군요. 공룡 고기는 포르토벨로 버섯 등으로 대체하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그냥 내놓으면 심심하니까 광대버섯처럼 보이도록 위장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참고로 실라칸스는 기름기가 너무 많고 맛이 굉장히 없다고 합니다.
    • 그러고 보니 매머드 코에 콧구멍 두 개를 뚫는 것을 깜빡했군요. 뚫어낸 부분을 생크림 등으로 채우면 될 듯합니다.
    • 이런. 제가 가장 먹고 싶었던 암모나이트 요리가 빠졌네요. 해물잡탕에 넣어도 좋고 서양요리라면 앙뜨레를 만들어도 될텐데...
      • 사실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암모나이트라면 아무래도 중생대에 가장 번성한 생물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해산물은 고생대에서 충분히 나오기도 했고, 그렇다고 고생대에 넣자니 각 시기의 대표 생물이라는 의미가 퇴색되는 면이 있습니다. 또한 암모나이트를 넣겠다고 할 경우, 생김새가 비슷한 앵무조개를 쓸 것인지 아니면 유연관계가 가까운 오징어를 쓸 것인지에 대해서도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하여 하는 수 없이 공명이 마속을 베는 심정으로 빼기로 하였습니다. 그 대신 송화단을 프랙탈 나선형으로 배치함으로써 억울하게 죽은 암모나이트의 유지를 받들기로 한 것입니다. 사실 계란으로 프랙탈 나선을 만드는 것도 간단한 일이 아닌데 이에 대해서는 후에 따로 자세히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 안자이미즈마루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이 떠오르네요. 안 그래도 왕성한 식욕인데 입맛이 더욱 돋습니다.
      • 이런 허접한 허구 음식 이야기도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 너무 재밌어요. 이런 컨셉으로 한 번 요리해서 팔아봤으면 좋겠어요.
      소나무꿀은 갈색인데 일반 꿀에 비해 특유의 향이 강합니다. 그런데 소나무향은 아니고 그 특유의 씁쓸한 향과 맛이 좀 있어요. 가벼운 느낌은 아니고 무거운 향이지요.
      • 제가 생각한 건 솔의 눈 정도의 맛이었는데 씁쓸하고 무거운 향이라면 너무 과하게 쓰지 않는 것이 좋겠군요. 사실 저기 써놓은 것 중에 저 자신도 한 번도 먹어보지도 않은 재료가 태반이라서 인간이 먹을 수 있는지도 아직 모르는데 돈 받고 팔만 한 것으로 만들기는 한참 멀었지 싶습니다.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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