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은 아니고, 버스에서 만난 어떤 아줌마.

(*2008년말 개인공간에 썼던 글이라 평어체이니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방금 삼각지에서 버스를 타고 오면서 있었던 일. 점심먹은 게 잘못되기라도 한 것인지, 갑자기 급체가 와서 영 속이 좋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서 급한 대로 언젠가 야매로 배웠던 수지침을 꾹꾹 눌러 보았다. 노력에도 불구하고 더부룩증은 점점 심해져서 이대로라면 거의 위아래로 전부 토사곽란을 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느껴질 정도로 속이 난리를 쳤다는 얘기. 게다가 생각해보니 한강대교에서 신림동 오는 사이에 공중화장실 있을 만한 곳이라고는 에그옐로우 쇼핑몰이나 관악구청 정도밖에 없는 것이었다. (지하철역들도 있기는 하지만... 좀 깊이 내려가니 패스.) 내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긴 하구나. 시험이 뭐길래.

절체절명! 등골에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는데 - 마침 옆 자리에 커다란 짐가방을 안고 앉아 있는 아주머니가 갑자기 내 손을 덥석 잡는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저으기 놀란다, 아니 놀랄 준비를 한다. 그리고는 혹시 체기가 있냐고 묻는다. 나는 미처 놀랄 사이도 없다. 체한 건 사실인지라, 일단 그렇다고 했더니 다짜고짜 손을 꾹꾹 눌러 준다. 내가 혼자서 조물거리는 것보다 훨씬 본격적인 수지침이다. 요동치던 속이 전부는 아니지만 한결 나아진다. 뭔가 쑤욱 내려가는 느낌이 난다. 역시 남이 해 주니까 내가 혼자서 하는 것보다 훨씬 잘 듣는 느낌이다. 그 아주머니 말인즉슨, 옆에서 사람이 뭔가 손톱 자국이 날 정도로 손등을 눌러 대는데 쳐다보니 내 얼굴빛이 샛노란 게 딱 체한 것같아 보이더랜다.

그렇게 한숨 돌리고 나자 자연히 대화를 트게 되었다. 듣자하니 이 분 딸네가 학교 졸업하고 신림동에서 행시 준비하는 모양이다. 부모는 위대한 것인지, 내가 뭐라고 먼저 내가 뭐시깁니다 하고 말한 것도 아니건마는, 앉아 있는 행색이 딱 아 저놈 신림동 인생이구나 하고 써붙이기라도 한 것처럼 - 게다가 나는 오늘 용무가 있어 시내 나갔다 오는 길이었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삼선 스레빠 패션도 아니었다 - 그 아주머니 눈에는 내가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아, 그렇다면 저 커다란 가방보따리는 빨래였구나.

수험생 학부형과 수험생 사이에서 오고가는 대화야 뻔했지만.... 지방에서 올라와갖고 참 힘들겠다, 서울에 연고는 있나, 밥은 어째 해먹고 다니느냐, 등등.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 근데 참 뭐랄까, 난 이런 대화는 옛날에 내 고향 시골길을 털털거리며 달리던 완행 버스(일명 빨간버스. 표면에 자이언트 로보마냥 볼트 리벳 접합자국이 다닥다닥 나 있는...)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줄 알았건만, 서울시내 전용차로를 달리는 최신식 천연가스버스 안에서도 가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생판 모르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도와주니 참 고마웠다. 종점에서 내려서 고맙습니다 - 하고 인사는 했지만, 미처 인연을 물을 새도 없이 아주머니는 마중나온 딸네 손을 붙잡고 이내 어디론가 홀연히 떠나갔다. 세상은 아직 살 만하구나. 어찌 되었거나 재차 삼차 거듭하여 고맙습니다. 따님 내년에 꼭 붙으실거에요.

    • 세상은 아직 살 만하구나.2
      제 몸도 남의 손이 훨씬 잘 들어요*^^* 훈훈한 글 고맙습니다.
    • 저런 종류의 친절을 경험해 본 지가.. 흠, 기억도 안나네요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전 이런 오지랍이 좋더라구요. 아이 안고가면 이런저런 말 붙이고 아이 나이도 물어보고 그런 분들 많이 만나는데 참 좋아요.
    • "근데 교회는 다녀요?" 반전을 우려했었는데, 아니었군요.
    • 근데 세탁기 아무데나 있는데 왜 빨래를? =.=;;;;
      무슨 복장을 하고 타건 152번 (지금은 없어진)5412번 5517번 5520번 등...을 타고 종점을 향하고 있다면 뭐...;;;
    • "우리 딸 소개시켜주까?"라는 80년대 결말을 기대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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