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슬프게 읽었던 우리 옛글: 망처 숙부인 행장기

비가 왔다가 말다가 새벽에 번개 칠 때는 어째 뒤숭숭하기도 하고, 이런 여름날이라 생각났는지,

기억 난김에 한번 이야기 꺼내 봅니다.


보통 임진왜란과 관련된 행장(行狀)기들은 대부분 소시적에 어떤 장군이 엄청 잘 싸웠다,
내지는 내가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을 일으켜서 진짜 공을 많이 세웠다, 라는 부류의
무용담스러운 이야기들을 많이 읽게 된 듯 합니다.

그런데, 이런저런 옛 글을 뒤적이던 중에 - 보통 괴물백과사전( http://gerecter.egloos.com/3273749 )에 들어갈
자료가 뭐 없으려나 싶어서 재미 삼아 이것저것 보곤 합니다만, -

한 7,8 년 전쯤에 처음 본 허균의 "망처 숙부인 행장기"라는 글은 정말 슬퍼서 읽다가 울컥 할 정도였습니다.

제목이 망처 숙부인 행장기인데, 망처(亡妻)가 먼저 죽은 부인이라는 뜻이니,
허균 본인 보다 먼저 죽은 부인의 일대기에 대해서 쓴 글 입니다.

작가는 다름아닌 우리에게는 홍길동전의 작가로도 가장 친숙한 바로 그 허균 입니다.

이 글은 시작하면, 평범한 다른 조선시대 행장기, 무슨무슨전 류의 이야기처럼,
김씨 였던 허균의 부인이 어느 가문 출신이고 조상이 누구고 하는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그 집 가문이 벼슬도 높았고 명문이었다는 이야기를 주절주절 하고,
1571년생으로 15세 나이로 자기에게 시집 왔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 뒤로도 계속해서 전형적인 칭찬이 이어 집니다,

조심스럽고,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말을 조심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특히 효도에 목숨을 (실제로) 걸었던 조선시대이니 만큼,

시어머니 되는 자기 엄마에게 아내가 참 잘했고,

시어머니인 자기 엄마도 "우리 어진 며느리"라고 하며 칭찬했다고도 써 놓았습니다.

그러면서, 살짝 분위기가 바뀌어서 십대 어린 시절의 부부간의 이야기가 잠깐 나오기도 합니다.
허균은 희롱하고 놀러 다니기 좋아했는데,
(사실 허균은 이런 방향으로 좀 막나가는 인간이라서 나중에 큰 일을 치게 되기도 합니다만)
아내는 싫은 기색을 얼굴에 전혀 나타내는 기색이 없었다고 하면서도, 자기가 방자하게 굴면,

"군자의 처신은 마땅히 엄중해야지요. 옛날 위인들은 술집, 찻집에도 들어가지 않는다던데,
하물며 이보다 더한 짓이겠어요?"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허균은 부끄러워서 마음을 다잡는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항상 부지런히 글공부를 하라면서 허균의 아내가 말하던 것이,

"장부가 세상에 나서 과거하여 높은 벼슬에 올라 어버이를 영화롭게 하고,
제 몸에 이롭게 하는 사람들도 또한 많습니다.
당신은 집이 가난하고,  시어머님은 늙어 계시니,  재주만 믿고 허송세월하지 마십시오.
세월은 빠르니 나중에 뉘우친들 어찌 돌이킬 수 있겠습니까?"

라고 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젊은 허균 놀러다니면서 싸돌아다니는 것 타이르는 어른스러운 모습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남편이 빨리 출세해서 나도 좀 잘 살아 봤으면 좋겠다는 인간적인 모습 같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만,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허균 가족은 피난을 가게 됩니다.
이렇게 출세 못한 남편의 아내로 8년간 같이 살아온 허균의 아내는 22세로, 당시 임신 중이었습니다.
정신 없이 피난 가던 중에 아내는 아들을 낳았고, 산후조리도 제대로 못하면서
힘들게 피난을 가다가 말도 못하면서 겨우 다니다가 결국 출산한지 3일 후인 7월 10일 죽게 됩니다.

전쟁 중이라서, 장례 지낼 방편도 없어서 소를 팔아서 관을 사고 옷을 찢어서 염을 했는데,
갑자기 일본군이 또 근처로 오는 바람에 머물던 곳 뒷산에 황급히 임시로 묻고 도망쳤다고 합니다.


이 대목을 읽은 후에 그 다음부터, 이제서야, 지금이 언제이고 왜 이 글의 제목이
"망처 숙부인 행장기"라는 것인지 마치 반전처럼 나오게 됩니다.

이글을 쓰는 지금은 그로부터 18년 가까이 지난 1609년.
드디어 허균은 당상관 벼슬로 올라가게 되어 형조 참의가 되었고,
당시 조선에서는 남편이 높은 벼슬에 오르게 되면 그 아내에게도 부인첩(夫人帖)이라는
임명장 같은 것을 주어서 벼슬자리에 오른 것처럼 높여 주는 제도가 있었기에,
이에 따라 허균의 죽은 부인에게도 조정에서 "숙부인"이라는 명예를 내려준 것입니다.

그래서 허균은 승진해서 아내에게도 명예가 내려진 것을 보고
그 옛날 불쌍히 죽은 젊은 아내를 생각하며 "망처 숙부인 행장기"를 쓴 것입니다.

망처 숙부인 행장기의 맨 뒤에 허균은 이런 이야기를 덧붙여 써 놓았습니다.



옛날 그때, 우리 가난할 때, 당신과 마주 앉아
짧은 등잔의 심지를 돋우며 반짝거리는 불빛에 밤을 지새워
책을 펴 놓고 읽다가, 조금 싫증을 내면
당신은 반드시 농담하기를,

"게으름 부리지 마십시오. 나의 부인첩이 늦어집니다."

하였는데, 18년 뒤에 다만 한 장의 빈 부인첩을 제사상 앞에 바치게 되고
그 영화를 누릴 사람은 여기 없을 줄 어찌 알았겠는가?
당신이 만약 알고 있다면 당신도 반드시 슬퍼하리라.

아, 슬프다. 을미년(1595) 가을에 길주에서 돌아와, 또한 강릉 외사(外舍)에
묻었다가, 경자년(1600) 3월에  원주 서면 노수(蘆藪)에 묘를 만들었으니,
그 묘는 선산 왼쪽에 있다. 삼가 행적을 쓰노라.



부인이라고 아내를 호칭하다가, 이 부분에서는 극적으로 직접 죽은 아내를
부르는 것처럼 당신이라고 부르고 있고, 슬픈 이야기를 하면서 1609년의 현재까지 시간순으로 이야기하다가
마지막으로 다시 과거의 아련한 시절의 농담을 잠깐 이야기 하면서, 절묘하게 마지막에 대조를 주니,

처음 읽을 때 정말 슬픈 부분 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허균의 글을 모아 놓은 "성소부부고"에 보면, 허균이 직접 쓴 제문을 모아 놓은 것 중에
제망처문 이라고 해서 죽은 아내의 제사 때 올린 글도 있습니다.
그 마지막 부분을 옮겨 보면 이렇습니다.


미천할 때 가난을 함께 하면서 / 賤時共貧

나의 벼슬 높기를 빌더니만 / 祈我高官

벼슬하자 그대는 벌써 죽어 없는데 / 及官已歿

부인첩만 부질없이 내려졌네 / 寵命徒頒

어찌 영화를 같이 누릴꼬 / 焉得同榮

내 마음 하염없어라 / 我懷漫漫

혹시 그대 넋이 알수 있다면 / 想魂有志

그대 또한 눈물을 줄줄 흘리리 / 其亦汍瀾

이 술이 벼슬살이덕에 얻은 것이니 한 잔 들구려 / 一酌官醪

서러움에 눈물만 흐르누나 / 悲來涕潸

    • 저도 모르게 눈물이 글썽ㅜ
      사람이 죽은 뒤에도 넋이 남는다면, 허균이 자신을 기억해 준 것을 숙부인도 기뻐했을 거예요.
      어쩌면 "아이고 그러니까 하랄 때 공부 좀 하지 죽은 지 18년이 지났네! 18년이 지났어! 그노므 부인첩 기다리다가 극락도 못 갔다!"
      고 귀여운 핀잔을 줄 지도..
      • 중간에 허균의 아내가 "세월은 빠르니 나중에 후회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이야기를 하는데, 흔히 하는 속담 같은 말이라서 무심히 넘어가기 쉽습니다만, 알고보면 이게 숨겨진 복선이라는 듯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연도 애틋하지만 글도 참 잘썼다고 생각 합니다.
    • 최근 주변에 돌아가신 분이 있어 그런지 짧은 글을 읽으면서도 가슴이 아립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이루고 무언가를 나누는 것이 다 살아 있을 때에나 소용있는 것이지
      한 사람이 떠나가고 난 뒤에는 추억과 자위와 회한만이 남는 것이겠죠.
      흐릿한 날씨에 쓸쓸한 맘이 더해지네요.
      • 저도 날씨 탓에 한 번 생각 난 글이었습니다. 위로 말씀 드립니다.
    • 슬프네요. 보면서 허균이 정말 문학적 재능이 출중했겠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사실 홍길동전은 워낙 많이 접해서 그렇게 대단한지 잘 안 와닿는 면도 있었거든요.
      • 허균이 남긴 글 중의 압권은 "도문대작"이라고 생각 합니다. 허균이 귀양살이하면서 옛날에 맛있게 먹어 본 음식을 줄줄이 나열한 글인데, 요즘에는 조선시대 전기 음식에 대한 자료로 가치가 주로 높게 평가 되는 듯 합니다. 그외에도 공상적인 장면을 화려한 묘사로 줄줄이 나열하는 재주를 선보이는 몇몇 소설형식 글들이 요즘보면 인상적으로 보이는 느낌입니다.
    • 전시에 아이를 낳고 그 몸으로 3일을 돌아다니다 죽다니...처참합니다.ㅡㅜ;;
      애 낳아보니 그게 어떤 고생인지 짐작이 되 더하군요. 마지막 제문 너무 슬퍼서 가슴이 아픕니다.
      가까운 이가 죽고난 뒤의 허망함. 제사는 그런 마음을 달래는 방편이기도 한지도요.
      그나저나 제사때 올리는 글이 저토록 아름다운 편지글 같을수가 있군요.상당히 신선한 충격입니다.
      늘 복잡하고 까다로운 어투에 따분한 내용만 제문인줄 알앗더니요.
      • 송자로 불리우는 송자가 자기 고모가 돌아가신 데 대한 글을 쓰면서 살아생전 고모 일화를 쓰다가 전형적인 귀신 이야기를 하나 쓰기도 했던 것 읽은 기억 납니다.
    •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왠지 추천버튼이나 스크랩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 부인이 죽게 된 사연은 슬프지만 죽은 뒤 18년 동안 한 남자의 마음에 남을 수 있다는 것은 부럽네요 제문 애틋해요 다시 결혼은 안한건가요 댓글에 쓰신 도문대작도 궁금해요 담에 꼭 읽어봐야겠어요
    • 허균의 마음에 들어가니 애잔하기 그지 없습니다.
      어찌보면 남편을 닥달하는 아내인데 성품이 첩부인 같이 곧고 대쪽 같진 않아도 보통의 아내들 남편 잘되기를 바라는건 못지 않지요 거의 대개의 남편들은 남녀만 구별할줄 알지 그외는 멍청해서 모릅니다, 진화의 모순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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