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바낭] 엄마의 맛

아래 간장국수 글을 보니까 문득 엄마가 해주시던 음식들 생각이 나더군요.

 

아랫글에 댓글로 달았지만 저희 엄마는 당신 음식에 자부심이 굉장히 큰 분이셨어요.

그 자부심이 이해할만한 것이, 실제로 요리를 진짜 잘하셨고 또 엄청나게 손이 빠르셨어요.

체구도 작은 분이 일가친척들 한 서른 명 정도 다 모이는 잔치상을 혼자서 차려내곤 하셨으니까요.

그것도 아침부터 점심 때까지 단 몇 시간 동안 뚝딱뚝딱..

누가 도와준다고 나서도 번거롭고 걸리적거리니까 나중에 와서 상이나 차리라고 하셨었죠.

그런 덕분에 아부지가 셋째 아들임에도 조부모님 생신 잔치는 항상 저희 집에서 치뤘었죠.

 

요리하는 것도 좋아하셨지만 새로운 음식을 먹어보는 것도 좋아하셨던 덕에 저는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음식들을 많이 접했고 낯선 음식에도 거부감 대신 호기심을 보이는 성향으로 자라났습니다.

물론 어린애가 소화하기 힘든 음식(맵거나 쓰거나 식감이 강하거나 등등)도 안 먹으면 자존심 상해하며

왜 안 먹냐! 먹을 때까지 이것만 줄테다! 하고 고집을 부리시는 통에ㅠㅠㅠ 제가 편식은 안 하는 아이로

자라났지만 나름대로의 한(..)이 있었다는 부작용도 분명히 있긴 합니다. ^^;

 

 

암튼 제가 중학교 때부터 돌아가시 전까지는 쭉 식당을 하셨었는데, 처음에는 닭갈비집을 하셨어요.

당시 90년대 중반, 지금이야 길거리에 가장 흔한 식당 중 하나가 닭갈비집이지만 그때는 안 그랬죠.

저희 가족이 살던 대전 시내에, 저희가 아는 닭갈비집은 딱 하나 밖에 없었어요.

시내 중심가에, 제법 고급인 고깃집들 사이에 비슷한 가격을 자랑하는 집이었죠.

엄마는 식당을 차리기로 결정하시고는 뜬금없이 닭갈비집을 해야겠다! 하시더니 저를 데리고

그 시내에 하나 밖에 없는 그곳에 가서 딱 2인분을 먹고, 밥을 볶아먹고 나왔어요.

그리고 집에 와서 다음 날, 전날 먹은 닭갈비와 똑같지만 더 맛있는 닭갈비를 만들어내셨죠.

그리고 동네 시장의 작은 가게를 차리셨는데 진짜 말그대로, 대박이 났어요.

엄마가 주방 보시고 서빙하는 아주머니 한 분 두고 하는 그 좁은 가게에서 수시로 일손이 부족해서

제가 불려가서 갈비 볶아주고 밥 볶아주고 그랬었으니까요. 덕분에 제 밥 볶는 실력이 많이 늘었죠.

결국 2년 만에 권리금 두배 넘게 받고 가게를 넘겼어요.

 

그리고 많이 큰 가게로 옮겨서, 전 엄마가 당연히 또 닭갈비집을 하실 줄 알았는데 업종을 바꾸시더군요.

이번엔 또 뜬금없이, 민물매운탕 가게였어요. 그 무렵에 슬슬 닭갈비집이 여기저기 생기기 시작했거든요.

민물고기를 직접 잡지 못해서 가게에 고기 잡는 사람을 따로 둬야한다는 치명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 가게도 진짜 잘됐었어요. 매운탕과 더불어 역시 당시에는 흔치 않았던 항아리수제비 인기가 짱이었죠.

다만 택시기사들을 주 고객층으로 하는 가게라 24시간 영업을 해야했고, 아무리 사람을 써가면서 가게를

운영한다고 해도 낮밤이 바뀐 생활 때문에 건강을 많이 해치셨죠.

결국 그 가게를 한지 4년만에 뇌경색으로 쓰러지셨고, 그리고 2년 후에 돌아가셨으니까요.

 

 

지금은 요리하기를 좋아하지만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저는 요리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엄마는 청소며 빨래며 온갖 집안일을 다 저한테 시키시면서도 주방만은 손대선 안되는 영역이었죠.

아무리 식당일로 바빠도 늘 식당 반찬이라도 냉장고에 채워두셨고 집에 있을 땐 항상 뭔가를 만드셨죠.

돌이켜보면 뒤늦은 사춘기로 맨날 소리 지르고 싸우던 20대 초반에, 엄마와 가장 평화롭고 행복했던 기억은

그때도 나름대로 요리에 흥미가 있던 제가 엄마와 함께 요리프로그램을 보면서 수다를 떨 때였어요.

엄마는 매일 저건 저렇게 하면 안된다, 저렇게 하는 것보다 이렇게 하는 게 더 맛있다 하고 프로그램 속의

요리사들을 까셨고(..) 그럼 전 맞아맞아 맞장구도 치고 모르는 요리는 해달라고 조르기도 하고...

그리고 그 무렵에 막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한, 혁신적인 제이미 올리버 요리프로그램을 나란히 좋아했죠.

우와, 요리프로그램에서 계량스푼을 안 써!!! ㅎ0ㅎ 우와, 양념이 유리그릇에 담겨있지 않아!!! ㅎ0ㅎ

....매일 모녀가 이러면서 나란히 사이좋게 네이키드 쉐프를 보다가, 프로그램이 끝나면또 싸우고..

 

제가 지금 요리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제 요리를 해줄 사람이 곁에 없는 이유도 있지만,

너무 일찍 보내드린 엄마와의 추억을 되짚을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인 것도 같다는 생각을 드문드문 해요.

한번도 해본 적 없는 음식을 엄마가 해주셨던 맛을 어렴풋하게 기억하면서, 먹을 때마다 여기엔 뭘 넣는게

엄마만의 비법이다 하시는 것을 흘려듣던 기억을 열심히 끄집어내면서 그렇게 뭔가를 만들었을 때,

엄마가 해주시던 그 맛은 아니더라도 비슷한 맛이 나면 그게 참 그렇게 기쁘면서도 서럽더군요.

곁에 계실 때 더 잘해드릴걸, 곁에 계실 때 좀 배워둘걸........ 이런 후회, 진짜 다 소용 없어요.

 

특히나 국이나 찌개 같은 건, 아무리 노력해도 엄마가 해주시던 그 감칠맛이 안 나더라구요.

어차피 혼자 살면서 자주 안 해먹는 음식이라 어쩌다 한번씩만 하니 잘 늘지도 않고..

그래서 늘 왜 엄마 맛의 비밀은 뭘까.. 고민했었는데 어제, 우연히, 그 비밀을 알았습니다.

매일 도시락 싸가지고 다니다 모처럼 빼먹어서 근처 식당에서 순두부찌개를 먹는데 엄마 맛이 나더라구요!!!

그래서 깨달았습니다. 아, 엄마 맛의 비밀은 미원이었구나..... 하구요. 그리고 멘붕.........orz

엄마는 맨날 요리에 조미료 안 쓰신다고 했었는데!!!! 그게 뻥이었다니!!! 하면서요.

매일 식당 음식에는 조미료를 안 쓸 수가 없지만, 집에서 만드는 음식엔 절대 안 쓰신다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또, 어릴 때부터 저는 밖에서 먹는 음식의 조미료에는 굉장히 민감한 편이었어요.

그런데 집에서 먹는 음식에는 유독 조미료 맛을 느끼지 못했었죠.

물론 안 넣는 음식도 있었을테지만 어렸을 때부터 꾸준했던 찌개의 맛의 비밀은 역시 조미료인 것 같고..

곰곰히 생각을 해보니, 비밀은 조미료라도 엄마의 맛에는 조미료를 이기는 무언가가 있다! 였습니다.

아마 제가 미원을 넣어도 엄마가 만들어주던 그 맛에는 이르지 못할 거예요.

 

 

엄마를 보내드린지 벌써 8년이나 지나고나니, 이제 가끔은 엄마 얼굴이나 목소리가 가물가물할 때도 있어요.

그래도 엄마가 해주시던 그 음식들의 맛은 떠올릴 때마다 항상 생생해서, 그럴 때마다 더 많이 그립네요.

    • 가슴짠한 글인데... 반전이 두 번이나 있네요(...)
      어머니의 음식맛이라는 건 참 넘기 힘든? 벽인 것 같습니다.
      • 금방 극복하긴 했지만 반전의 충격(..)만큼 제 멘붕도 컸습니다. ^^;
    • 지금 엄마가 아점을 만들고계시네요. 저도 언젠가는 그런 엄마를 그리워하겠죠. 하지만 지금은 ..
      • 그냥 지금 이 순간을 소중하게 보내시면 되는 거죠. 그나저나 평일날 집에서 아점을 즐기시는 여유가 부럽다능..
    • 엄마의 비결은 따로 있으셨죠 아무도 흉내 못내는.
      • 그러게요. 그게 뭔지 미리미리 좀 배워라도 뒀으면 흉내는 냈으려나요?
    • 저의 요리관을 확립시켜 준, 어머니와의 일화가 문득 생각납니다.

      어머니가 해 주시는 김치찌개는 유난히 맛이 좋았는데,
      잠깐 집을 나가 혼자 밥해먹으며 살게 되었을 무렵 어머니께 여쭤봤습니다.

      "그 김치찌개 어떻게 끓임?ㅇㅇ"

      어머니의 대답은 무척 심플했습니다.

      "좋은 고기 많이 사다가 팍팍 쳐넣어"

      ...결국 재료가 좋으면 어지간히 만들어도 맛있던 거였습니다(...) 그것은 그대로 저의 요리관이 되었는데,
      물론 언제나 좋은 재료를 살 수는 없으므로 [맛이 없어도 불평하지 않고 대충 먹는다]라는 추가 항목도 생겼습니다.
      • 좋은 요리에 좋은 재료는 당연하죠. 저희 엄마도 항상 재료는 아끼지 않고 팍팍 투자하셨어요.
        식당하실 때도 항상 좋은 재료를 써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이런 사장님 처음 본다는 말씀이 입버릇이었죠.
    • 일병 때 였어요. 휴가 나와서 복귀하는 날이었죠. 친구 녀석이 잠깐 보자고 해서 나갔는데 딱히 어디 갈 곳도 없어서 밥을 먹었어요. 그것도 양껏. 그리고 들어와보니 엄마가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을 정말 상 다리가 부러져라 차리셨더군요.
      그리고 눈동자를 반짝 반짝거리시면서 말씀하셨죠. '배고프지..?' '.... 네.....'
      그리고 다 먹었습니다. 그 시간 내내 엄마는 앞에서 절 보고 계셨구요.
      그날 밤 복귀해서 새벽에 근무 올라가다가 기절했습니다. 체해서요.

      돌아가시기 한달 전엔가 마지막 요리를 하셨습니다. 저와 지금은 아내가 된 여자친구에게 묵은지 감자탕을 끓여주셨죠. 이 음식의 맛을 꼭 기억하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어느새 감자탕이라는 메뉴에서 엄마를 추억하는 것 마저 뜸해지게 된 시간이 흘렀군요..

      엄마라는 단어는 참.. 슬프네요..
      • 그래도 rwu님은 티내지 않고 다 드시는 효자 아들이셨네요. 저는 종종 밖에서 먹고 들어왔는데 또 밥 먹으라고 차려주시는 것 때문에도 많이 싸웠어요. 그냥 싸울 구실이 필요했던 거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을까 싶죠.
    • 우와...왠지 가슴 짠해지는 데 글 너무 좋으네요. 효도해야하는데 ㅜㅠ
      • 네, 계실 때 잘해야한다는 건 진리입니다. ㅠ_ㅠ
    • 눈물이 핑...
      저도 아버지를 잃었는데 다른 무엇보다도 음식이라는 것이 참 오래도록 추억으로 남더라구요.
      엄마 없던 날이면 아버지가 아침식사로 해주시던 계란찜,
      어느날 특별식을 해주겠다며 햄을 굽고 계란을 프라이 하시더니 "이게 '햄앤에그'라는 거다"하시던 것,
      딱 한번이었지만 어디서 배워오셔서 해주신 감자듬뿍치즈듬뿍피자,
      늘 사오시던 피칸파이- 맛없게 생겼다고 안 먹다가 한번 먹어보고는 중독됐었죠
      그게 마카롱인 줄도 모르고 너무 달다고 불평하며 먹었던 마카롱-지금은 없어서 못 먹죠

      등등. ㅠㅠ
      • 맞아요. 저는 엄마 돌아가시고나서 한동안 롯데리아 새우버거를 씨에프만 봐도 눈물이 났어요. 같이 쇼핑가면 자주 사먹던 메뉴라..
    • 엄마손에서는 맛있는 효소가 나와요. 진짜에요.
      • 진짜 그런가봐요. 근거는 없지만 확신이 팍팍 드는 진리..
    • 엄마의 손맛이라는 건 누군가 나를 위해 해준 음식 맛일 거예요. 아무리 요리 잘 하는 사람도 자기가 해서 먹는 음식은 맛없다고 하더라고요
      • 그런데 전 제가 만든 음식도 잘 만든 건 진짜 맛있더라구요... ☞☜
    • 맛의 비결, 조미료 아니었을 거예요. 외국 살면서 구할 수 있는 재료는 똑같이 한정돼 있는데, 그 같은 재료로 제가 하는 음식이랑 근처에 사는 친구가 하는 음식은 영 딴판이에요. 제가 하는 게 맛있죠... *- -* 재료의 상태를 생각하고, 가장 잘 맞는 방법으로 손질하고, 순서를 지켜서 만들고, 먹을 사람의 입맛을 고려해서 양념하고, 보는 즐거움을 생각해서 그릇에 담고... 별 거 아닌 것 같은 굉장히 단순한 조리법이지만 결국에는 맛이 달라져요. 그런 과정들이 오랜 시간 몸에 배면 그걸 '손맛'이라 부르게 되죠. 어머니의 그리운 손맛을 조미료로 쉽게 단정지어버리지 마셨으면.
      • 조미료라고 단정짓지 않았어요. ^^; 본문에 짧게 언급했지만 잠깐 멘붕에 빠졌다가 그래도 곧 그게 다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 아마 정말 집안 음식에는 미원 안 넣으셨을 거예요.^^엄마 손끝에서는 뭔가 비밀물질이 나오는 것 같아요!!
      글 읽다보니 가슴이 찡하고 그렇네요.어머니의 손맛..
    • 저는 왜 이 글을 클릭해서 아까 1차로 울고 지금 또 클릭해서 또 울고 있어요.ㅜㅜ 마음이 약해져서 그런가.
      뜨끈한 밥 먹고 싶네요.
    •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좋은 글이네요. 잘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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