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를 헤매다

배낭여행의 추억을 살려, 씩씩하게도 외곽의 호텔에서부터 파리의 도심 한가운데 있는 오르세 미술관까지 걸어가기로 했습니다. 그다지 덥지 않은 맑은 날씨에 바람까지 살랑살랑 불어와 산책하듯 걷기엔 딱 좋은 날이라 기분이 좋았죠. 처음에는요.


중간에 길을 잃고 헤매면서 급속도로 체력이 감소하는 것을 느끼면서, 새삼 이십대 초반의 대학생이 더이상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했습니다. 그래도 도심에 가까와지면서 어슬렁거리는 관광객들도 많이 보이고, 왠지 친숙한 지명들도 늘어나면서 그나마 기운을 회복했습니다. 고작 이틀 사이에 프랑스 음식에도 살짝 질려버린지라, 베트남 쌀국수를 먹기로 하고 옐프의 도움을 받아 가까운 몽빠르나스에 도착한 것은 호텔에서 출발한 지 두시간이 지난 다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거대한 축제의 한가운데 휩쓸려 버렸죠.


근데 무슨 축제길래 처음부터 보이는 풍경이 오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분홍색 콘돔 풍선?  콘돔 풍선을 쳐다보면서 당황하는데 누가 지나가면서 무지개색 딱지를 옷깃에 달아주고 지나가? 콘돔과 무지개 딱지가 결합되면서 뭔가 생각나려 하는데, 쭉쭉빵빵 언니들이 거의 헐벗은 모습으로 춤을 추고 있는게 보여. 그런데 다시 쳐다보니까 쭉쭉빵빵 언니들이 아니라, 쭉쭉빵빵 언니처럼 차려입은 오빠들이네?


그제서야 말로만 듣던 게이 프라이드 행렬에 빠져들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구글 검색을 해보니 역시 파리 게이 프라이드가 개막하는 순간에 기가 막히게 시간을 맞춰 도착한 것이더군요. 몽빠르나스에서 시작해서 바스티유까지 행진을 한다고 합니다. 게이는 아니지만 왠지 알 수 없는 해방감이 느껴지는 흥겨운 축제였습니다.


퍼레이드를 빠져나와 삼십분 정도를 더 걸어 오르세 미술관에 도착했더니, 수많은 인파가 입장을 위해 줄을 서 있더군요. 오랜만에 다시 찾은 오르세 미술관이지만, 줄서기 무척 싫어하는 성미에다 체력이 120% 바닥난 상황에서 기다리고 싶은 생각은 도저히 나지 않더군요. 프랑스어를 못해서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드가 특별전을 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미술관 앞에서 입맛만 다시다가 세느강을 따라 에펠탑까지 가보기로 하고 돌아섰습니다. 기억 속의 세느강은 탄천같은 도랑이었는데, 생각보다 강이 꽤 넓더군요. 세느강을 여유롭게 흘러가는 유람선을 보면서, 해질무렵 저걸 꼭 타보라고 하셨던 분의 댓글을 떠올렸습니다.


강변을 따라 걷다 에펠탑의 꼭대기가 보이자 떠오르는 생각이 있더군요. 분명히 작년 말 정도에 에펠탑이 폭파되는 장면을 TV에서 봤었다는 것을요. 한참을 고민했어요. 그러다 그게 TV도 아니고, 영화도 아니고 콜오브듀티 게임 하다가 본 장면이라는 것을 깨달았죠. 체력이 바닥나다보니 정신마저 오락가락합니다. 그래서 파리를 걸어서 헤매는 것은 거기서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체력이 떨어져도 오기로 끝까지 버티는 것 따위 더이상 못하겠더라구요. ㅠㅠ


몬스터 하나 사서 마시고, 호텔 앞의 일식집에서 더럽게 맛없는 스시 한접시를 저녁으로 먹고 들어왔더니 좀 살 것 같습니다.  토끼님 드리려고 길가다가 발견한 Le Norte 라는 제과점의 마카롱 사진을 찍어놨는데, 주소를 안주셔서 어떻게 보내드려야할지 모르겠군요.

    • 저 주시려고 마카롱...


      이 아니고 마카롱 사진!
      하여간 제 주소는요... (마음의 포인터로 긁어보세요)
      게이 프라이드 행진 뇩은 지난 주말이었는데 파리는 한주 늦네용.
      • 오왕. 대댓글이 컴퓨터에서도 되는군요. 사진이 아니라 빨강 파랑 마카롱을 염력으로 보내드렸는데 잘 받으셨는지용? 웹사이트 찾아보니까 동네방네에서 게이 프라이드를 다 하고 있더군요. 몇년 전에 상하이에서도 게이 프라이드를 열려다가 공안들에게 처절하게 탄압받고 무산된 일이 있었는데, 그 사건이 아니었으면 전 게이 프라이드가 뭔지 지금도 모르고 있었을거에요.
    • 파리의 일식과 중식은 꽝이 아닌 곳을 찾기가 힘든데 역시 꽝을 뽑으셨군요.
      • 길 걷다 보니까 비스트로만큼 일식집들이 많더군요. 호텔앞 일식집은 맛으로 선택한게 아니라 가장 가까운 곳 기준으로 선택한거라.... 흑
    • 파리의 일식은 kunitoraya의 우동이 최고지요.
      저는 그 퍼레이드에서 맥주들고 놀고 있었어요. 어쩌면 마주쳤을지도 몰라요.
      • 와아.. 그랬을 수도 있겠네요. 몽빠르나스의 Mai Do라는 베트남 식당에서 쌀국수 먹으면서 구경하고 있었어요. 일식 우동도 땡기는 군요.
    • 본문을 스릴있게 읽었어요. 저번 글에 파리에서 단 한군데는 '오르셰'라고 댓글 달려고했었는데 태공님이 알아서 오르셰로... 갔다가 돌아서다니.orz 게다가 드가 특별전이라니... 창고에 보관하던 작품들 대거 바람쐬러 나오나보네요. 드가 너무 좋아하는데 눙무리납니다. 드가는 발레 그림들이 유명하지만 그밖의 그림들도 특유의 시선으로 세상과 인간 깊이 들여다보는듯한 앵글이 바라보고있으면 나도 이야기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아서 너무 좋아하죠. 시간 있으시거든 꼭 보시길요. 우울한 일요일 아침. 돈이 있으면 지금바로 인천공항으로 달려가서 9:20 에어프랑스를 잡아타고 날아가고싶네요. 우리 인생은 우리가 가진 돈에 의해 결정되는 건가 그런 우울한 생각을 하게 되네요.

      파리가 작지만 (정확한 길을 모른채)걸어서 이동하려고 하는 건 여행자에겐 무리예요. 백퍼 길에서 지치게 되지요. 여행 초반에 많이들 겪는 시행착오^^
      • 배낭여행할 때, 파리를 걸어서 누볐었거든요. 그 흉내를 다시 내보고 싶었죠. 역부족이었지만... 그리고 유명 관광지에서 사진 찍는 취미보다는 사람사는 동네 산책하는게 재밌어요. 오늘 파리를 떠나기 때문에 힘들지만, 파리에 또 돌아오면 그때 아침에 찾아가려구요.
    • 게이....를 보려고 매년 일본에서 날아오신다는 어떤 분을 만나본적도 있는데 굉장한가봐요
      • 저야 한시간 정도 구경하다 말았지만, 굉장히 흥겹더군요. 그런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퍼레이드의 뒤를 호위하는 경찰차 뒤를 슬금슬금 따라가는 수많은 녹색 거대 청소차 군단. 퍼레이드에서 쓰레기가 아주 많이 나오는데, 그 뒤를 바로바로 깔끔하게 정리해버리는 것을 보고 감탄했어요. 트랜스포머 군단 같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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