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언덕 봤습니다. (스포 있어요)

 

 

 

어제 CGV 압구정에서 보고 왔습니다.

보기 전에 일부러, 영화평이라든가 별점, 주연배우 필모 이런 거 하나도 안 보고

그냥 오로지 옛날에 읽은 '폭풍의 언덕' 그 기억 하나로 보고 왔어요.

 

영화는 어떤 분의 말마따나 굉장히 '날 것'의 느낌입니다. 거의 영화 내내 거친 바람소리가 불고 화면은 어지러워요.

주된 배경워더링 헤이츠 자체도 집도 정돈이 안되어 있고, 넓은 것 같긴 한데 뭔가 구조가 조잡하죠. 구릉도 따뜻한 느낌보다는 거친 바위산

아무튼 제가 소설에서 읽고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음울하고 다듬어지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게 참, 좋았어요.  제가 은근 바라던 분위기이기도 했구요.

사실 캐시와 히스클리프의 사랑을 정면으로 그리기엔 그런 장치가 더 어울려요.

특히 어린 시절의 사랑은 정말.. 어릴 적 바람을 맞아가며 혹은 바람을 타고 언덕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 그대로이니깐요.

목적도 없고, 경로도 없지만, 다만 같이 있다는 것에 모든 걸 걸고 뛸 수 있는...

 

비록 나이 먹어서 머리 굵어진 캐시가 배신;;이란 걸 때리긴 하지만,

끝내 자기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죽는 걸 보면

어릴 적 워더링 헤이츠의 벌판에서 느꼈던 그 격렬한 감정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던 거죠 

사랑에 집어삼켜졌다고 한다면 너무 닭살스러울까요. 하지만 캐시에게는 정말, 그 말이 가장 어울리는 것 같아요,

어릴 적에도 캐시를 보면서 너무 불같아서 '아름답다'고 생각했고 영화에서도 그런 모습들이 잘 표현되길 바랐는데, 

적어도 어린 시절만큼은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도 전체적으로 어린 시절이 좀 더 좋았습니다.

성인시절도 그 나름대로 매력있긴 한데, 돌아오는 길, 자기 전에 되짚어보게 되는 건 어린 시절이네요.

어린 시절엔 그 흔한 키스장면조차 나오지 않지만, 오히려 더 설렜어요.

언덕 위에 부는 세찬 바람에 어지럽게 날리는 어린 캐시의 붉은 머리카락. 살짝 보이는 붉은 뺨.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어린 히스클리프의 조용한 시선. 그때의 히스클리프의 작은 미소...

가슴이 굉장히 뻐근해지더라구요.

그리고 캐시가 히스클리프의 상처를 혀로 핥아줄 때... 

캐시 일에도 미소 외에는 이렇다 할 내색을 잘 하지 않는 히스클리프가 처음으로 눈물을 보이죠. 

아마 그때가 히스클리프 인생의 정점이지 않았을까요.

분명히 그랬을거에요.

 

영화는 참 좋았습니다. 그런데 뭔가 느릿느릿 진행되는데 비해 밀려오는 감정의 무게가 커서...

개인적으로 두 번은 보기 힘들 것 같아요. 좋지만 또 너무 슬퍼서요..

 

근데 여기서 약간 분쟁(?)이 있었어요.

제가 "슬퍼요"라고 하니 선배가 "그래, 이뤄지지 않았으니 슬프다."라고 하시더라구요.

그런데 저는 오히려 사랑은 '이뤄졌다' 라고 생각했거든요.

서로의 마음은 확인할만큼 확인했으니깐..죽었다고 사랑이 끝난 건 아니잖아요.

그럼 뭐가 슬프냐고 물으셔서,

"그냥 그렇게 서로를 강렬하게 원하고 깊이 사랑한 게 너무 마음아프고 굉장하지 않아요?

어떻게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어요? 그거 자체가 너무 슬픈데.." 라고 하니

이해할 수 없다고 하시더라구요. 좋은 거 아니냐고 하시면서.

 

물론 사랑을 하니, 행복하겠죠. 하지만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게 정말 좋기만 한 걸까요?

캐시만 봐도 단명크리....아니 그렇다고 딱히 장수하고 싶다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그런 사랑도 멘탈이 강해야 될 것 같아요. 전 멘탈이 약해서.... 상사병 걸리기 좋은 성격이라 ㅠㅠ 부러우면서도 무서워요.

 

(근데 쓰다보니 '슬프다'라는 어휘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네요. 좀 더 사회성 있는 어휘 없을까요.... 왜 이렇게 갈 수록 어휘력이 처지는지;)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아쉬운 게 있었다면... 성인여주가 너무 귀티가 나고 예쁘다는 거에요 ^^;;

캐시가 저렇게 예뻐지다니 뜨앗. 좀 더 거친 느낌이면 어땠을까 싶기도.

히스클리프를 보고 반짝거리는 눈매나 입술은 참 근사했지만요. 그건 그냥 여주가 이뻐서인것 같아서요..

그리고 성인린턴도 제가 생각한 것보다 너무 잘생겼; 그리고 그 짧은 순간조차 제일 불쌍하더군요 쯧쯧.

 

아참 영화는 캐시의 죽음으로 끝납니다. 

혹시 저처럼 전편을 생각하고 가신 분이 계실까봐;; 하긴 그 러닝타임에 그 얘기를 다 담을 수도 없겠죠.

 

 

 

 

 

    • 기대 이상의 날것이라 좀 놀랐습니다. 조조로 봤는데 아주머니들, 노부부, 혼자 온 사람들로 이뤄진 관객 구성이었는데..
      아주머니들과 노부부는 원작만 생각하고 오셔서 조금 놀라셨는지 중반부 지나서는 화장실 들락날락하고 어수선해지더군요.
      물론 좋았지만 조금 더 친절했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 걸 했습니다. 화면비를 바꿔봤다던가. 네러티브 구성을 바꿔봤다던가.
      등등의..
    • 그러고보니 제가 본 곳에서도 중년 관객분들이 많으셨어요. 다행히 막 왔다갔다 그런 건 없었는데, 보고 나서 화장실에서 그런 영화준 몰랐다야~ 어렵네~ 하고 쏙닥쏙닥하시더라구요 ㅋㅋ 화면비는 처음엔 놀랐다가 보다보니 적응돼서 그러려니 했는는데, 낯서신 분들은 거슬리셨을 수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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