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선생님, 야구가 보고 싶어요


1.

영화 퍼펙트 게임은 소문만큼 좋은 영화였다고 생각하지 않고, 좀 참아가며 봐야했던 오그라드는 부분도 많았지만

딱 한 번, 이거 쓴 사람 진짜 야구팬이구나 싶었던 씬이 있었습니다

바로 선배가 후배 갈구는 씬과 벤치클리어 씬을 교차 편집한 부분 말입니다

도저히 이건 아니다 싶어 나섰다가 된통 당한 선동열에게 약을 발라주며 최동원이 말하죠, 왜 괜히 나서서 일을 크게 만드냐, 선배들은 선배들 세계가 있다, 적당히 때리고 맞고 하는.

사실 보통의 상식과 도덕적 감수성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변명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패고 갈구는데 다 그런 세계가 있는 거라니요

야구 경기에서 빈볼이나 고의성 보복투, 그리고 영화에서 윗장면을 은유로 갖다 붙인 벤치클리어링과 같은 관습에 대한 야구계의 태도가 딱 그렇죠

야구를 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짐승같은 사내들이 공으로 헤드샷을 날리고, 우루루 몰려들어 몸싸움을 하는 장면이 굉장히 폭력적으로 보이겠지만 사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받으면 갚아주고, 적당히 몰려들고 부대끼다 들어가는, 야구판엔 야구판만의 세계가 있다는.

예체능의 고질적인 학교 폭력과 야구 경기의 몸싸움을 그토록 낭만적인 어조로 변명하는 건 딱 야구팬의 전형적인 태도죠

근데 그게 또 틀린 게 아니거든요, 심각해질 불씨는 언제나 품고 있지만 대개는 그저 서로 적당히 알면서 취해주는 제스츄어죠

어떻게 포장해도 이상한데, 그게, 그 안에선 낭만적인 어조로 되새기게 만드는 이상한 그런게 또 있다고요


2.

1994년, 전설의 유지현/김재현/서용빈 데뷔 시즌이 제겐 첫 야구였으니 도대체 선택지란 게 있었겠습니까, 어쩔 수 없는 엘지 트윈스 팬이지요

구듀게에선 종종 야구 얘기도 나누고 했었는데 아마 마지막으로 야구 얘길 한 게 2010년 이상훈 사건이었을 겁니다

모르는 분들을 위해 간단히 말하자면 간단히 말해질 수 없는 얘긴데

그래도 말하자면 야구 그만 둔 이상훈 선수에게 구단이 비공식적으로 접촉하여 차후 트러블이 생긴 일이었는데, 아무튼 간단히 말해질 수 있는 얘긴 아닙니다

그 2010년 이후로 저는 주위 사람들에게 공식적으로 선언했습니다 '난 더이상 엘지 트윈스 팬이 아니다'


물론 야구팬이라면 이 시점에서 웃으시면 됩니다. 구단들이 돌아가며 온갖 만행을 저지르는 대한민국 야구판에서 저런 얘기 한 번 안 해본 사람 없으니까요

야구 계속 봤습니다, 응원도 했어요. 

그리고 말했죠, 난 엘지 트윈스의 경기를 보고 이왕이면 엘지 트윈스가 이기면 좋겠고 때에 따라 응원도 하겠지만 엘지 트윈스 팬은 아님 ㅇㅇ

야구를 끊을 수 없다는 걸 너무 잘 아니까 반쯤은 자조적인 농담이기도 했지만 아무튼 진심이었습니다, 야구를 보긴 하지만 더이상 야구에 대해 떠들지 않게 되었고, 게시판에도 야구 얘기를 남기지 않게 되었죠


3.

꼴찌하는 거 하루 이틀 일 아니고, 감독 퇴진 운동하는 거 새삼스럽지도 않고, 선수들 사고치고 다니는 거 이젠 우습고

적당히 무디게 골방 야구팬으로 지낸지 1년

송지선 아나운서 사건이 터졌습니다

그리고 진짜로 야구를 끊었습니다, 2011년 누가 우승했는지도 모르겠군요, 라고 쓰면서도 찾아보지도 않습니다, 2011 야구판은 제게 백지예요


4.

은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유지현으로 시작해서 유지현으로 끝나는 야구팬 인생이지만 그래도, 아니 그래서 더욱 이종범 선수의 마지막이 이런 식은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진짜 말이 됩니까? 아니, 정말로. 말이 되냐고요


5.

보시다시피 2년만에 다시 야구 얘기를 게시판에 꺼내놓습니다, 왜겠습니까, 안선생님, 야구가 보고 싶어요 ㅠㅠ

정말로 묻고 싶습니다, 야구팬 여러분. 이 야구판엔 너무 많은 불의가 있고 너무 많은 상처가 있으며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견디고 계십니까, 어떻게 다시 야구를 보게 되었습니까

사실 새삼스런 얘깁니다, 구단이 유지현을 은퇴시키고, 이상훈을 팔아먹고, 김재현을 놓칠 때 이미 견디고 무뎌지며 10여년을 더 버텼는 걸요

다만, 기대는 있었습니다, 언젠가 김재현을 다시 찾을 날, 이상훈과 화해할 날, 유지현과 우승을 누릴 날, 상처가 회복되고 모든 게 나아질 날에 대한.

하지만 판 자체가 이토록 사악하고 불의한데, 기다릴 것도 기대할 것도 응원할 것도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공놀이일 뿐이야, 하면 또 그냥 그런 것이겠지만

우리가 울고 웃었던 지난 날들에 낭만적인 어조를 지우고 나면 진흙탕 속 짐승같은 개싸움만 남는 겁니다

낭만, 결국은 그겁니다, 낭만을 빼앗길 순 없는 거죠, '어린이에게 꿈을, 젊은이에게 낭만을'에서 바로 그 낭만 말입니다


6.

2012 프로야구가 개막했다는군요

승엽이도 있고 병현이도 있고 심지어 찬호도 있다는데

준혁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군요

무엇으로 버티고 계십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낭만입니까

야구팬 여러분, 말해주십시오

안 선생님, 야구가 보고 싶습니다



    • 그냥 봅니다. 그깟 공놀이 뭐 있나요.

      히어로즈 팬도 계속 야구 보는데 엘지 팬이 계속 못볼 건 뭐 있나요.
    • 제가 작년에 야구 끊으면서 제일 많이 생각했던 게 바로 삼미-청보-태평양-현대-히어로즈 테크트리였습니다. 정말 어떻게 버티는 거죠, 어떻게 낭만을 뺏기지 않을 수 있는 겁니까.
    • 프런트에게 정의의 철퇴가 내리기를 비세요...그수밖엔 없어요.
      팬분께는 죄송하지만, 한 두세구단 프런트에겐 정의의 철퇴가 내리기를 빕니다.
    • 꼭 야구뿐만은 아니죠, 축구쪽에서도 연고지를 하루아침에 바꾸지 않나...
      알수없는 프로스포츠의 세계 -_-
    • 저같은 전 엘지팬분이 또 계셨군요.ㅜㅜ 저도 유지현으로 시작해 유지현으로 끝난 쌍둥이팬 전력이 있습니다. 전 심지어 한동안 야구잡지까지 정기구독햇었죠. 월간 베이스볼..아직 나오나요? 그 잡지보면서 구단뒷얘길 더 알게되서 더 환멸 많이 느꼈댔죠. 근 5~6년 야구 안보다가 결혼이후 아무 연고도 인연도 없던 기아 요새 간간히 응원하며 봅니다. 남편이 좋아하는 구단이거든요.그치만 전같이 열중하고 싶진 않죠. 네.
      Planetes/ 정의의 철퇴까진 바라지도 않아요. 어느날 프런트가 전부 모인 회의실에 괜찮은 중짜 번개 한 번 확 때려줫음 싶은데가 몇군데......
    • 한현희라는 투수가 있습니다. 19살짜리 새파랗게 어린 놈인데 오늘 처음 등판한 상황에서 김동주를 만납니다. 2볼 이후 스트라익 3개를 연달아 꽂아넣으며 김동주를 루킹 삼진으로 돌려 세웁니다. 그 다음 타자 최준석은 헛스윙 삼진으로. 마운드에 올라오는 순간부터 뭐가 그리 신나는지 미소를 감추지 못하더군요. 3만에 가까운 관중이 들어찬 운동장이 19살 현희의 놀이터처럼 느껴졌습니다. 분명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면, 팔려간 선수들을 생각해보면 야구는 슬픔이고 상처입니다. 하지만 한현희 서건창 오재일 같은 선수들을 보면, 야구야 말로 희망이고 미래입니다. 봄 입니다. 사소한 일들은 제쳐두고, 야구나 봅시다.
    • MLB로 버팁니다. 엘지가 오늘 이병규의 역대 7번째의 만루홈런으로 이겼다고 하지만 아무런 감흥이 느껴지지 않아 '아 이제 MBC 청룡부터 이어지던
      그 선이 이제 완전히 끊겼나보다'라고 오늘 느꼈습니다. 그리곤 더욱 MLB로 파고듭니다.
      푸홀스와 추신수의 기록지를 확인하고 탬파베이와 샌디에이고의 모든 선수들의 기록을, 영상을 확인합니다. 그렇게 야구를 봅니다. 견뎌갑니다.
    • 현진이 보면서 벼텼습니다.
    • 엠비씨에서 엘지까지 31년입니다. 물론 중학교, 고등학교 모교의 야구부도 따라다녔죠. 수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것또한 야구의 일부, 이기고 지는것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내일도, 내년도 늘 게임은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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