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야그] 농담이 안 통하는 세상
옛날 옛적에요, 저기 서울 필동에 한 냥반이 살았어요. 별명은 장난의 괴수, 농담의 천자, 기타등등이었죠. 이름은 이항복, 하지만 오성이란 별명 아닌 별명으로 유명하죠. 그는 한 평생 살면서 농담과 뻘타와 개드립에 달통했지요. 거 있잖아요. 물에 빠지면 입만 동동 뜰 거 같은 사람. 바로 그랬어요.
근데 그냥 실없는 소리를 한 것만은 아니고, 오도독오도독 뼈가 씹히는 말도 참 잘 했지요.
임진왜란 때였어요. 왜군이 쳐들어왔고 한 달 만에 서울이 점령되고 도성이 불탔지만, 여전히 조정의 사람들은 정신 못 차리고 당파갈라 동인이니 서인이니 하며 피터지게 싸웠죠. 그 꼴을 보고 이 아저씨가 친 농담이 이런 거였어요.
"우왕~ 저렇게 잘 싸우는데 동인더러 동해를 지키게 하고 서인더러 서해 지키게 하면 어떻게 왜군이 한 발이라도 우리나라 안에 들어올 수 있었겠어? >ㅅ<"
그 당시 조선의 정치판을 직접 보진 못했지만 어떤 지경일지 머리속에서 쫙 그림이 그려지지 않나요. 비슷한 걸 대한민국 국회 방송에서 보기도 했고. 확실히 그 정도 막강한 전투력이라면 무엇이 무섭겠어요.
하지만 이런 농담이 죽어라고 안 통하는 사람도 있었지요. 대표적으로 바로 대북 사람들이었어요. 그들은 오성을 아주 무러죽일 듯이 싫어했습니다. 지금 선조실록을 보면 - 이게 대북이 정권을 잡았던 광해군 때 쓰여졌지요 - 행간마다 켜켜이 김장 양념 집어넣은 것 마냥 나쁜 말들이 쓰여져 있어요.
해학이 너무 심하다, 라는 말이 제일 많아요. 그런 다음으론 뭐 포털 사이트 뉴스의 댓글란을 보는 것 같아요. 무능하다느니, 뭐 해쳐먹었다느니, 누구누구의 쫄따구라느니, 온갖 유언비어와 중상모략과 막던지는 코멘트의 느낌이죠.
이 정도면 역사의 기록이 아니라 저주와 악담의 집합이란 느낌이 들어요. 왜 그리도 오성 이항복을 싫어했을까요? 정치적인 문제도 있긴 했지만,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강성투쟁 노선이었던 대북에게는 농담해대는 게 못마땅한 것도 있었겠죠.
농담이란 게 그래요.
진지하지 않죠. 가벼워 보이죠. 하찮아 보이기도 해요.
그렇지만 극한의 상황에서도 긴장을 풀어주고 웃을 수 있게 해요. 그렇지만 언젠가의 비키니처럼 어떤 농담은 누군가에겐 기분 좋아도 누군가에겐 기분 나쁠 수도 있어요. 오성의 농담이 진심으로(?)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저 삐-같은 동(서)인 놈을 까부숴야지 온 세상이 행복해진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정말 기분나쁘게 들렸던 것 처럼.
그러니까, 대북이 이항복을 싫어할 순 있어요. 나쁜 말을 할 수도 있어요.
이순신의 난중일기도 보면 원균 욕 허벌나게 쓰여져 있잖아요. 투덜투덜하는 성미도 여실히 드러나고요. 수백년 뒤 정조를 비롯한 사람들이 "우왕 이거 성웅님의 일기장 >ㅅ< " 하면서 좌라락 복사해서 동네방네 돌려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쓴 덕분이죠.
하지만 난중일기는 개인의 일기장이고, 실록은 역사의 기록이어요. 완벽하게 중립까진 아니라도 공정해지려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거마저 걍 악플로 쳐발랐으니 그 시대가 얼마나 깝깝했겠어요? 이런 팍팍한 인간들이 대권을 잡고 있었으니...
그래도 오성은 굽히지 않고 줄기차게 농담을 했죠. 나이 칠십에 중풍을 앓으면서 북청으로 귀양을 가면서도 드립을 쳤으니까요.
어쩌면 당연하지요. 그는 더 괴로웠을 때도 그랬거든요. 임진왜란 때 - 신하들이 임금을 버리고, 백성들이 돌을 던지고, 먹을 게 없어 임금과 세자가 간신히 허기를 때우는 비참한 피난길에서도 농담을 해서 사람들을 웃겼죠. 그래서 5세 연하남 한음 이덕형의 찌질찌질 땡깡도 여유있게 보듬어 안아줬고요. 이처럼 지독히도 불행한 순간에 농담을 하는 건, 실없는 게 아니라... 정말 용감한 사람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늘 이야기해온 것이지만, 절대로 무지는 죄가 아니죠. 마찬가지로 개그 감각이 없어서 이해를 못하는 것도 잘못은 아니어요. 오히려 동정받아 마땅하죠. 눈이 안 보이는 것이나 귀가 안 들리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그렇지만 그 무지와 무감각을 휘둘러 남을 후려칠 때 그건 나쁜 일이 되어요.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더 그렇죠. 힘을 가지고, 타인을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잘 모르는 건 죄여요. 그 무지를 바탕으로 억울한 피해를 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이 순간까지도 계속되는 거 같네요.
먼 옛날 옛적, 공산당의 공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던 시절에, 외국에서 공부하던 분이 칼 막스의 책을 가져오자 마르크스 책이라며 압수를 하거나 옛날 시집인 모시(毛詩)를 들고 왔더니 모택동 관련 책이냐며 빼앗는, 웃음은 나오는데 웃자니 너무 씁쓸한 사태가 조금 다른 형태로 다시 벌어지는 거지요.
박정근 씨의 보석 석방을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유머감각을 잃지 마시길.
그와 별개로 재판정에서 '모에'의 개념을 한참동안이나 설명해야 했다는 사실에는 좀 웃었습니다.
오늘도 졸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