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야그] 몽클레어와 시바스 리갈

 


대통령의 외손녀가 입은 명품 패딩이 설날의 사이버 세상을 뜨겁게 달궜네요.

유명한 사람이 가진 명품, 특히 외제로서 큰 이슈로 떠오른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죠. 대표적인 것이라면야 장영자 씨의 물방울 다이아몬드가 있겠고, 린다 김의 선글라스가 있겠으며... 또 어떤 대통령이 마지막 자리에서 마셨던 위스키 시바스 리갈, 또 70년대 즈음의 딜럭스 수입차 쯤이 있겠습니다.


명품이라는 것 자체가 가격이 비싸고 희소해서 보통 사람들은 함부로 가질 수 없다는 것. 그리하여 가진 사람으로서 돈 쓰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 자랑할 수 있게도 하지요.

자랑하는 게 딱히 나쁜 것 같지 않습니다. 하다 못해 너구리 라면에서 다시마가 두 개 나와도 자랑하고 싶어지는데 비싼 돈 주고 사면 오죽했겠어요. 피천득의 은전 한 닢에서 나오는 늙은 거지가 여섯 달 동안 고생하고 또 고생해서 다양(大洋) 은전 하나를 갖고 "이 돈 한 개가 갖고 싶었습니다." 하는 것 처럼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은전 한 닢이 있기 마련이죠.
그게 누군가에겐 술일 수도 있고, 명품 백일 수도 있고, 멋진 자동차일 수도 있으며, 스마트 폰이나, 프랑스 정식일 수도 있습니다. 당장 교통사고를 당해 출혈로 목숨이 위태로운 와중에도 지금 입고 있는 청바지가 아까워서 "재봉선 따라 곱게 잘라주세요!" 애원할 수는 있는 거죠.
남들이 보기엔 웃기고 한심할 지라도, 그렇게 웃는 사람에게도 비밀의 화원이 하나나 둘이나 세 개 쯤 있을 겁니다. 저 자신도 당장 다음 달 방값이 간당간당할 때 반지의 제왕 양장본을 냅다 지른 적이 있기 때문에, 타인의 취미생활을 두고 뭐라 할 수 없더군요. 무엇보다, 사람이 자기 돈 가지고 뭘 하든 본인 자유입니다.
분수에 넘친 소비를 하다가 모파상의 목걸이 주인공 같은 꼴을 당하더라도 그건 본인의 책임이죠.

 

그러니까 문제의 패딩이 300만원이든 65만원이든 크게 상관은 없습니다. 아무래도 애 할아버지, 아빠의 직업으로 보관대 인터넷 이리저리 뒤져가며 해외직구를 통해 이러지리 깎고 살 것 같진 않지만, 그렇게 샀다면 참 디테일하게 꼼꼼한 것이고, 그냥 백화점 가서 샀다면 외국 외에도 중간유통업자들과, 백화점 직원들에게 이익을 안겨준 것이니 그 나름으로도 좋은 일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돈 한 푼 안들이고 전 한국에 자신의 브랜드를 광고한 몽클레어 사장님은 정월 대보름달 같은 푸근한 미소를 짓고 있기도 하겠고요.

 

그렇긴 해도 외제 때문에 스타일 구기는 일이 아주 없는 건 아닙니다. 여기에서 위스키 - 시바스 리갈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네요.
이 술은 1979년 10월, 궁정도 안가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죽기 직전 마시고 있었던 위스키입니다. 청와대 비서실장 김계원과 한 병 반 씩인가를 거하게 마셔댔는데, 당시로선 구하기 힘든 술이었죠 당연히. 아까 말했듯이 외국 술 마시는 것은 개인의 자유입니다. 그 사람이 각별히 좋아하는 것일 수 있죠. 막걸리 좋아하는 사람 있는가 하면 소주 땡기는 사람 있고, 특별한 날 기분 좋게 비싼 와인 한 병 뜯을 수 있는 거죠. 위스키도 그렇고.

문제가 있다면, 박정희는 내내 외제품을 축출하고 국산을 쓰자고 나라를 들었다 놨다 했던 사람이라는 데 있지요. 이전에 쓰기도 했지만 외화를 아끼자는 이유로 커피의 수입을 금지하고, 그거 말고도 세상 대부분의 것들의 수입을 금지해서 일반 시민들은 물론, 물감과 악기를 구할 수 없어 화가와 음악가들이 곤란을 겪을 정도로요. 그럴 만큼 엄격하게 수입을 금지했었는데, 정작 본인은 외제 술을 마시고 있었으니 이 얼마나 모순된 건가요.

사실 박정희를 비난하는 사람은 그가 딸 보다 어린 여자들과 술을 마시고 있다는 것을 들곤 하는데, 전 그보다는 시바스 리갈이 더 치명적이었다고 봅니다. (그 날 술자리가 하하호호 했던 게 아니라 엄청 꿀꿀했던 것도 있고) 그는 일평생 "막걸리를 즐겨 마시며 국민 여론을 경청하는 대통령"이라는 컨셉 이미지를 잡았습니다. 자주 시골 농촌을 순시하면서 농부들과 마주앉아 막걸리를 마시고 국수를 먹고 그랬었지요. 그래서 나중엔 고양시를 지역기반으로 하는 박통 막걸리도 출시되긴 했습니다만. 이제 사람들은 시바스 리갈을 알아도 막걸리는 잘 모릅니다.
그래서 인간이란 살아 생전 내내 노력한 것보다 잘 죽어야 해요. 폼생폼사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죠, 그렇게 평생 쌓아왔어도 한 번으로 훅 가니 말입니다...

 

이번 몽클레어 패딩의 가장 큰 문제는 하필이면 재래시장 시찰 갈 때 입었다는 거죠.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이 황제의 위엄과 권위를 천하에 보이고 복종시키기 위해 곳곳을 순수한 것 마냥, 시찰에는 원래 목적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재래시장에 갔다는 것은 '서민의 바쁘고 고된 생활을 돌아보고 위로하기 위한' 장이지요. 만약 그 옷을 입고 박물관이나 극장에 갔다면 상관없겠지요. 헌데 거긴 그 코트 가격의 100분의 1 가격의 옷을 걸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데란 말이죠. 게다가 전 국민과 언론의 시선이 모이는 대통령인걸요.
굳이 비유하자면 장례식장에 파티 드레스를 입고 간 것이요, 데이트 하러 가면서 몸빼바지 입고 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결국 명품 패딩 한 벌로 그건 시찰이 아니라 동물원 구경이 되고 말았습니다."자, 보렴. 세상엔 이렇게 헐벗고 불쌍하게 사는 사람이 있단다~ 너는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공부 하고 유학가렴."이라는. (이건 제 지인의 표현입니다)

물론 그렇게 머리에 총 맞은 생각을 하지는 않겠지만, 그 드레스 코드로는 그런 오해를 만들 가능성 및 위험성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문제는 제대로 된 사전 코디를 못해서 민족의 대명절이자 정초부터터 수 많은 국민들의 에너지를 쪽쪽 빨아먹는 시덥잖은 논란이 벌어지게 한 보좌진을 족쳐야 하는 문제입니다.
그 옷이 얼마든, 외제이건 국산이던 이미 논란이 된 시점에서 대통령의 시찰은 물 건너간 것이고 마이너스이지요. 현 대통령의 보좌진 중에 진정한 안티가 있다는 음모론에 숟가락 하나 살쯔기 꽂고 이만 자러 가겠습니다.

 

모두 좋은 밤 되세요.

p.s : 사실 저는 하얀 패딩 보다도 다른 분이 입은 코트가 취향이었습니다. 이게 훨 비싸 보였지만.

http://www.facebook.com/historyminstrel

 

    • 명절은 잘 쇠셨나요?
    • 몽클레어 짝퉁도 인터넷에 쫙 깔렸던데 설마 그분 손녀에게 짝퉁을 입혔을리는 없고..
    • Weisserose / 감기가 아직... 안 떨어져서 말입니다, 쿨럭쿨럭.
    • 근데 뭐...이명박을 비롯해서 그 손녀의 부모, 보좌진들이 그런 순간에 손녀의 코트메이커에 신경쓸것같지 않아요. 재래시장 가니까 저렴한 걸로 갈아입혀야겠다. 뭐 이런생각도 우습구요.
      그냥 그들의 습관과 생활이 '재래시장'과 단지 마찰을 일으켰을뿐..전 이게 왜그리 논란이 되는지 잘 모르겠네요.
      대통령 손녀쯤 되면 뭐 그런 가격대의 패딩 입을수 있죠. 노무현대통령 손녀가 입든, 이명박 손녀가 입든간에 이런게 왜 문제되는지 잘...
    • 너구리에서 다시마 두개 나와도 자랑하고 싶어지는데 대목에서 무릎 탁! 맘에 쏙 드는 문장입니다
    • 마르타 / 아무래도, 진짜겠죠 뭐. 나는 헐벗어도 자식은 잘 입히고 싶은 게 부모니까 짝퉁은 아닐 것 같습니다. 별로 중요하진 않으니까요.

      리오타 / 대통령이니까요.

      폰타 / 저 두 개 나온 적 있습니다!
    • 이명박이 시장에서 뭘하건 쇼로 보이는 건 당연하지요. 근데 야당에서 대변인까지 나서서 손녀 명품 패딩을 가지고 서민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 운운하는 것도 참 구차하기는 합니다. 대중들의 관심이 이명박 손녀가 명품 패딩을 입었느냐 공지영이 명품 백을 들었느냐로 자꾸 흘러가도록 만들고 있는 자체가 불편하기는 합니다. 어차피 청렴결백하고 소박한 대통령이 아닌건 만천하가 아는데 뭘 기대하나요. 그보다는 오히려 알지도 못하는 명품 브랜드 이야기에, 누가 뭘 입었는지에까지 신경 쓰고 살아야 하는 우리네 모습들이 막연하게 피곤한 듯 합니다.
    • 저도 핵심이 '서민 코스프레' 에 있다 보는데
      간혹 물타기 내지는 논지를 호도하는 의견들이 보이더군요..
    • 서민이 아닌 놈이 서민 코스프레를 하다가 그것도 어설프게 하니 혀가 오토매틱으로 끌끌 사운드를 내는 거죠
    • 분명히 맥락이 다른데도 공지영의 샤넬백과(진퉁짝퉁 문제는 제치고라도)
      이명박 손녀의 몽클레어를 동일선상에 비교하는 건 이해가 안가더군요.
      "몽클레어를 입혔으니 돈 많이 쓴 이명박 나빠요"라는
      단순한 논리로 까는 사람은 거의 없는 거 같은데... :-(

      그럼 뭘 입히는 게 가장 좋았을까 생각해보면...
      그냥 손녀를 안데려가는 게 가장 좋았을 것 같습니다.
    • 딴 얘기지만 옛날에 쌀 부족을 이유로 혼식 장려시대에 쌀막걸리 주조가 금지되었다가 허용되었던게 기억이 나서 찾아보니 63년부터 77년 사이에 금지가 되었었네요.
      박통이 막걸리를 즐기는 이미지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아서.. 뭐 쌀 말고 다른 곡류로 만든 막걸리를 즐겼거나 77년 이후 말년에 그런 이미지로 홍보했었던 모양이군요.
    • 다른 건 모르겠고 괜히 손녀를 왜 데려가서 이 욕을 먹는지 참 불쌍하달지 보기 뭣하달지...
      감기가 좀처럼 안 나으시네요. 피로하면 잘 안 떨어진다는데 잠은 제대로 주무고 계신지요.
    • 한편으로는 이명박의 서민 코스프레에 불편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명품을 입는 사람들이 재래시장을 이용하면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시각도 불편하기는 합니다. 재래시장이 서민의 대명사이기는 하지만 꼭 그렇게 못살고 가난한 사람들만 이용하는 곳은 아닌데 말입니다.
    • 몽클레어는 이전에 신모씨 때문에 홍보 지대로 했기 때문에 이번 건은 그닥 홍보효과가 크지 않을 거 같습니다만, 그리고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브랜드로 자리매김한 브랜드죠! 사실 노스페이스를 위시한 아웃도어 브랜드의 고가 라인과 비교하면 가격차이가 ㅎㄷㄷ하게 나는 건 아니죠. 제 생각엔 보좌진 중에 몽클레어를 아는 사람이 없어서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는 데 한 표 겁니다!
    • 그리고 안 좋은 일(?)로 입에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건 이른바 명품 브랜드 입장에서는 그닥 환영받지 못합니다 몽클레어는 구찌나 프라다같은 이른바 대중적인 명품브랜드가 아닌데 이런 식으로 알려지면 진정한 구매자층은 구매를 꺼리게 되고 이미지만 나빠지는 거죠 몽클레어가 이미지 메이킹 전략을 바꾼다면 모를까 이번 일은 몽클레어에게 그닥 이득이 아니죠
    • 또 모르죠 그집 사람들은 재래시장간다고 나름 신경써서 제일 후진 옷 꺼내 입힌 건지도
    • 촤알리 / 쓰신 댓글을 보고 고민하다가 오늘의 글을 적어봤습니다. 저 나름으로 생각을 적어본 건데, 어떠하신지요.

      네잎클로버 / 저도 의견이 같습니다. 다만 이번 글은 쓰다가 좀 논지가 벗어난 모양이어요.

      evdel / 차라리 신화는 없다해서는 충분히 서민 시늉 안 하고 난 잘났어 라고 뻗댔던 거 같은데, 그게 차라리 나은지도...

      mithrandir / 공지영의 백과 동일선상에 비교하는 사람들은, 비교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리라 생각합니다. 사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사건이긴 해요, 이 건은 말이죠. 애꿎게 전 국민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손녀에게는 심심한 위로를...;

      작은물고기 / 아, 그랬죠! 쌀막걸리가 금지되었었는데 기사를 보아하니 그 막걸리집 주인은 대통령에게 바칠 술을 목욕재계하고(...) 정성스럽게 빚은 모양이더군요. 한 번 그걸로 써봐야 겠습니다.

      에아렌딜 / 손녀가 좀 안쓰럽긴 합니다. 어쩌다 그리 험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는지...

      촤알리 / 그건 하신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도미노 피잣집에 가서 피자헛 시키지는 않는 게 상도덕이라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동네 중국집에 짬뽕 먹으러 가면서 모피 코트를 입고 가진 않겠지요.

      루이스 / 오. 그럴까요? 전 오히려 대통령의 손녀 씩이나 입는 옷이다 싶어 꽤 고급 브랜드로 이미지 잡히겠다 싶었는데...

      clancy / ...웬지 부정할 수 없어집니다, 그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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