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려는 논쟁. 부끄러운 기억.

1. 대학 새내기 시절 이런저런 세상에 눈을 뜨고 나니 입이 근질거려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아니, 세상에 이렇게 (명백하게) 부조리한 일이 많고 그것이 나쁘다는 게 이토록 완벽한 논리 속에 정리가 되는데 왜 세상은 이걸 몰라주고 바뀌는 게 하나도 없을까? 이런 생각에 가득차 있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너무 부끄럽지만요. 술자리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제가 생각하는 정의를 풀어놓으면서 동의를 받고 싶어 했지만, 또 때로는 그 동의를 통해서 같은 행동을 이끌어 내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죠. 제 생각도 일면에서는 옳은 것이었겠지만, 다른 생각도 일면에서는 옳은 거였고, 어떤 판단을 하는데 있어 필요한 논리적 근거가 제가 선택한 그것들 보다 더 많이 필요한 경우가 (사실은 대부분) 있다는 것을 깨닫는데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2. 종종 그 시절 일기장을 들춰보며 하이킥을 하곤 하는데, 왜 그 땐 그랬지 하고 생각해 보면 그 때 제가 일종의 각성을 한 것이 저에게 너무 커다란 경험이었기 때문 같아요. 마치 그동안 눈이 멀어 있다가 어느 순간 광명을 얻은 것만 같은 충격. 이 충격과 경험이 너무 소중해서 이걸 남들과 나누고 싶어하고, 이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속으로) 답답하고, 자기 안위만 생각하는 속물들이라고 여기기도 하고 그랬던 거 같아요.

3. 언젠가부터 제가 특정한 이야기를 꺼내면 사람들이 주제를 돌려버린다는 걸 느끼게 되었죠. 답답해하다가 그 이유가 제게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제가 이야기르 하는 건 내 생각은 이런데 니 생각은 어때? 라는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은 이러니 니 생각도 이래야 해! 라는 어줍잖은 강의 아닌 강의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강의는 고상한 표현이고 솔직히 상대를 계몽하려했다해야 더 정확한 표현이죠. 내 말이 다 맞으니까 너도 이렇게 생각해야 해. 네 생각을 들어보는 건 중요하지 않다니까.... 제 생각 속에 매몰되어 논리가 괴악해지는 것 조차 눈치채지 못했었어요.

4. 다행히도 이해심이 바다와 같이 넓은 제 친구들은 저의 이 흥분이 지나가길 조용히 기다려 주었습니다. 저도 운이 좋게 빨리 깨닫고 반성하기 시작했었구요. 그리고 누군가와 대화한다는 것, 논쟁한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죠. 그건 상대방을 내 생각으로 설득함보다는 대화를 통해 더 다양한 의견들을 들어보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정리하는 거라는 거요. 물론 이 과정을 통해 누군가의 생각이 바뀔 수도 있겠지만 그건 어떤 설득을 통해서라기 보다 의견들의 교환 속에서 그 사람이 다른 생각을 도출해낸 거라고 생각해요.

5. 이기려는 논쟁은 끝이 없습니다. 나에게는 이만큼이면 충분할 수 있는 근거가 누구에게는 부족할 수 있어요. 누군가의 생각을 바꾸는 주체는 바로 그 누군가 당사자이지 설득하려고 말하는 내가 아닌거죠.

6. 이런저런 일이 많은 듀게이지만, 제가 듀게를 좋아하는 이유는 다양한 생각들을 조리있게 들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진보신당 지지자다보니 사실 듀게에서 마음아픈 글들도 보게 되지만 그것들도 다 좋다고 생각해요. 요근래 듀게에서 벌어지는 논쟁이 안타깝다 못해 보기 흉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걸 보니 좀 속이 상해서 주절거려 봅니다. 조금은 진정되고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는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 정말 좋은 글입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흠짓하면서 읽었어요^^;;
    • 구구절절 동감합니다. 논쟁을 할 때 빠지기 쉬운 함정이, 상대방이 멍청하거나 상대방이 자신의 이득이나 자존심을 챙기려 하기 때문에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지게 된다고 여기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동안 열심히 논쟁을 빙자한 감정 싸움을 하다보니, 상대방이나 내가 멍청한 것도 아니고, 혹은 그쪽과 내가 자신의 이득이나 자존심 때문에 그러한 견해에서의 차이가 나타나는건 아니라는걸 깨달았습니다. 그냥 순수하게 그 사람과 내가 사태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입장이 다른거 였어요. 상대방은 이것이 참이라는게 너무 자명하고 기본적인 사실이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그것에 동의하지 않거나 혹은 그 반대의 상황이 일어났을 때, 두 입장 모두 합리적이라고 할지라도 결론에 있어서 차이가 드러날 수 밖에 없다는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혹은 그래서 저는 아직도 특정한 상황에서의 논쟁을 즐깁니다. 상대방과 내가 어느 지점에서 서로 양보할 수 없는 불일치가 나타나는지, 그것만 확인할 수 있어도 좋은 논쟁인거 같아요. 그런데 그런 논쟁을 하기 위해서는 일단, 상대방은 바보도 아니고 자신의 이익에 눈이 먼 협잡꾼도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게 말이 쉽지 잘 안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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