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야그] 부정선거를 '잘' 폭로하는 법 - 정읍환표 사건

 

디도스 사건이 결국 윗선의 문제는 없이 비서 두 사람의 공모로 밝혀졌군요. 암, 어련하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옛날 이야기나 해보지요.
1956년의 이야깁니다. 갓 전쟁이 끝나서 겨우 어수선한 시기였지요. 그 때는야 뭐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발등 위의 불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사건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 즈음, 자유당의 인기는 내리막이었습니다. 5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에서 간신히 이승만이 대통령이 됩니다만 이기붕은 낙선, 부통령에 장면이 당선됩니다.
당시 이승만 나이도 나이인지라, 만약 갑자기 이승만이 이 세상을 하직하면 정권은 부통령 장면에게, 그러니까 민주당에게 넘어가는 상황. 당연히 선거 결과가 걱정스러울 수 밖에 없지요. 그래서 자유당은 참으로 유치찬란하게 부통령 장면에게 "너랑 안 놀아!"를 선언하는 한편, 지방선거에서 필승을 외치게 됩니다.

 

그런 와중 벌어진 게 정읍 환표 사건입니다. 8월 17일 정읍군에서 지방선거가 있었고, 당시 정읍의 선거구는 고부, 소성, 영원, 이평, 덕천 다섯 개 면이 있었습니다. 선거가 끝난 투표함을 수송하는 것은 두 대의 트럭이고, 또 이렇게 투표함을 나르는 코스는 일반에게 공개가 됩니다. 당연히 선거가 잘 진행되는지 감시를 하기 위해서지요.
그런데 당일날, 갑자기 문제가 생깁니다.

2호차가 봉인된 투표함을 싣고 잔다리목이란 곳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2호차의 캬부레타(당시 표기)가 고장났습니다.
어쨌건 차를 거의 고칠 즈음, 갑자기 소송면의 부면장이 운전사와 일행들에게 같이 술 먹으러 가자고 꼬셨답니다. 근무 중에, 그것도 투표함을 나르는 중에 말이죠! 이거 좀 이상한 일이긴 한데 다들 심심했는지 선거지도위원, 투표구위원장, 경호경관 등 17명이 15분 간 드링킹을 했답니다. 근처의 주막(!)에서...

이렇게 신나게 마시는 와중, 누가 자동차 전원선을 끊어버렸답니다. 당연히 이걸 고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수 밖에 없었고, 해서 급히 다른 자동차를 불러 투표함을 나르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경찰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술을 마시는 와중(!), 경찰들은 슬그머니 투표함을 다른 트럭에 싣고 출발해버립니다. 보통 투표함을 나를 때는 고부를 출발해서 소성을 지나 정읍으로 들어가야 했는데, 그 날 따라 어째서인지 전혀 다른 루트를 통해 가더랩니다, 그것도 1호차가 가야할 곳인 덕천까지 들러가면서.

 

각종 우여곡절을 거치다보니 덕천으로 가는 트럭 안에는 오직 경찰만이 타고 있고 민간인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즉, 감시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는 거죠. 그리하여 경찰들은 맨 도로 가에다 투표함 발랑 까놓고 미리 준비해온 다른 투표 용지를 쑤셔넣었고, 형사들이 투표함을 다시 멀쩡하게 봉해서 정읍으로 운반했습니다. 이 모든 행동이 시행된 것은 단 3분.

...뭐 다들 뻔한 결과입니다만. 선거 결과는 당연히 자유당 후보 엄진섭의 압도적인 승리. 당시 차점자로 떨어지게 된 게 무소속의 은종숙이었습니다.

 

이 모든 사건은 그냥 묻힐 뻔도 했지만, 투표 결과가 너무 압도적이다보니 의심을 사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 정읍결창서의 순경 박재표씨가 양심의 가책을 못 이기고 선언을 하면서 밝혀지게 됩니다. 박재표씨는 민주당의 도움을 받아 몸을 숨겼고(!) 경향, 동아일보는 이 사건을 취재, 특종을 때려버립니다.

 

일이 불거지자 모든 경찰들은 그런 일 없었다, 박재표가 거짓말장이에다 정신병자다 - 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변명 중에 특히 압권인 것은 "시간은 고작 20분 뿐이었고, 거기 가는 길에 100미터 마다 인가가 하나씩은 있는데, 환표를 했다면 어떻게 아무도 못 봤겠냐?" 입니다. 참고로 10미터가 아닙니다. 100미터입니다(...) 그리고 당시 낙선한 후보 등을 모두 기소하고, 민주당의 조작이다! 낙선자와 아는 사이다! 라는 연막을 팡팡 뿌린 뒤 박재표 순경에게 수배령을 내려 체포한 뒤 재판에 붙입니다.

당시 치안국장은 박재표를 거짓말장이로 몰아가고, 허위사실을 보도했다는 이유로 신문사(경향, 동아)를 사법처리 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그리고 "전혀 사실 무근"이라고 발표를 했습니다만, 당연히 사람들은 안 믿었습니다.
아 누가 믿어요, 이런 뻔한 일을.

 

하여간 그렇게 해서 그 해 말에 공판이 들어가는데, 박재표 순경은 한 때 자신이 거짓말을 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해 11월에서 피고 입장에서 재판장에서 발언권이 주어진 순간, "가족에게 돌아갈 피해가 걱정되어 본의 아니게 말했지, 내가 한 말은 사실이다" 하고 빠앙 터뜨려 주는 덕에 법정이 발칵 뒤집어집니다.

 

그리고 그 해 말에 있었던 재판에서 박재표 순경은 유죄판결을 받습니다.

적용된 죄목이란 "직무유기" 그리고 "명예훼손". 1년 6개월의 징역이 결정됩니다. 헌데 당시 판사가 내린 판결이 참으로 창의력 대장으로 금메달 감이었지요.

 

"환표는 없었다능. 의심은 가지만 증거는 없다능. 그리고 너 님하는 직무도 유기했다능. 그리고 투표지 사이즈는 원래 것과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건 잘못 잘라서 그랬다능."

 

한 땀 한 땀 손으로 잘라 만든 투표지 수작업의 애로사항까지 감안해준 마음 따듯한 판결이 아닐 수 없습니다... 는 멍멍이 뿔이고.
나중에 정읍의 투표지를 검증해보니 뭐 이거 뭉탱이 표로 나옵니다. 게다가 투표용지가 원래 규격 용지와 사이즈가 다른 데다가 접은 흔적도 없고 깨끗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기록된 투표 숫자와 투표함의 용지 숫자가 다릅니다.
뭐 새삼 이걸 까봐야 압니까... 척하면 딱이지. 꼭 그런 거 있어요. 연기가 풀풀 나는 부뚜막 위에 앉아서 엉덩이 지글지글 구워대면서 "여기 불 안 땠는데?..." 하는 사람들.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게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라는 드립을 치려면 좀 더 창의적으로 하던가.

 

다음 2심 판결이 더 웃깁니다.

 

"환표 사실은 인정하지만 너 님하는 직무를 유기했으니까 모두 유죄."

 

무슨 직무요? 환표 하는 거에 참여 안 했다고? 박 순경 스스로도 그 자리에 자기만 있었던 것도 아닌데, 다른 순경들은 왜 직무유기에 포함 안 되느냐고 항의하기도 했습니다. 사태는 점점 점점 어이가 가출하는 지경으로 흘러가고, 당시 어떤 신문 사설은 이 일을 두고 대충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런 지랄을 왜 해?"

 

결국 박 순경은 대법원에서 명예훼손은 혐의 없이 직무유기로만 6개월 판결을 받았다가, 4. 19 이후에 경위로 복직됩니다. 하지만 군사혁명이 벌어지자 일을 그만두고 연탄장사를 하다가 동아일보 수위로 일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동안 겪은 고생이야 이루 말할 수 없지요. 위로 두 분 형이 있었는데 다들 직장을 잃고 쫓겨나고 감시당하고 그랬다더군요.

그래도 본인은 자신이 한 일에 후회하지 않았고... 실제로도 그를 시작으로 환표사건 폭로는 줄줄이 이어집니다. 56년 8월 함평 환표 사건에다, 같은 해 5월의 보성 환표 사건 등등이요.

허나 이런 사건이 있었음에도 자유당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렸고, 해서 나중에 유명한 3. 15 부정선거를 치르게 됩니다. 이때는 뭐 소심하게 몰래 몰래 투표 용지를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여남은 명씩 떼지어 투표소로 들어가게 해서 조장이 이미 자유당을 찍은 투표용지를 나눠서 넣게 했지요. 그러다보니 이기붕 표가 너무 많아 100%에 육박하게 되니 이거 심했다 싶어 부랴부랴 다른 표로 바꾸는 촌극이 펼쳐지기도 했습니다. 뭐 눈에 뵈는 게 없을 정도로 다급했다는 것인데, 그 다음 결과는 다들 아시지요. 정치에 관심없이 먹고 사는 데 바빴던 사람들에게 "야, 이건 정말 아니자나"라는 생각이 들게끔 했고, 그런 사람들이 하나 둘 목소리를 높이게 되었으며, 자유당 정권은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디도스 공격(이런 이름도 맘에 안 듭니다. 정말 디도스인지 분명하지 않은 거 아닙니까)도 나중에 진실이 어떻게 밝혀질지 누가 알겠습니까. 역사가 증명하기를, 언젠가 폭로가 있을지니 맘 편하지 않게(!) 다음 전개를 기다리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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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근래는 일거리 원고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잘 안 쓰여져서 포기하려다가 다시 힘을 내서 쓰고 있습니다.

...원고의 신이시여, 저에게 힘을. 제발 다른 거 쓰고 싶어효.

 

http://www.facebook.com/historyminstrel

 

    • 꺄~ 재미있게 읽었어요. 내용은 우울하지만 LH님 글 읽는 즐거움에 저도 모르게 환성을..
    • 매번 시의적절한 글 감사합니다
    • 그래서 나꼼수와 트위터에서는 1026 부정선거라는 명칭으로 바꿔야한다고들 하고있어요. 부정 선거가 디도스에 가려지면 안되니가요.
    • 이야기보따리.아응.

      잘 읽었습니다. 정직한 사람은 고생하는 구조, 고쳐질 날 올까요.
    • 지도에도 없고 사는 사람만 아는 지명이 나오네요. 잔다리목.^^
      마치 정읍에 살아보신것 처럼 지역사람들의 느낌이 물씬나게 잘 쓰시네요.
      이밖에도 근현대사에 정읍은 많이 등장하는 편이죠.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정읍발언도 유명하고,
      덕천이라는 곳은 갑오 동학혁명당시 황토현 전투로 유명한 곳이구요.
    • 씁쓸한 재미, 뼈있는 농담을 골계 라고 하던가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훗날 이맘때쯤의 근현대사가 요즘의 사극처럼 역사물로 제작되어 공중파에 방송될 날이 오겠지요.
      장면들이 눈 앞에서 그려지는 느낌입니다.
    • 아 잔다리목 ㅋㅋ

      전 글보다 지명만 보이네요...
    • 가오가오 / 우울한 현대사라도 최대한 즐겁게 써내려가는 LH표 역사 야그입니다. ㅎㅎ

      amenic /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며 저도 글감을 얻지요.

      클로버 / 부정선거 혹은 선거방해 쪽이 적절할 거 같네요. 뭐 그게 정말로 방해한 게 사실이라는 가정하에서 입니다만...

      레사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oem II / 고생은 하지만, 그래서 굉장히 미안하지만, 그 사람 덕에 역사가 움직이니까요. 이 글을 쓰면서도 그 분에게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l'atalante / 오, 정읍분이 계셨습니까? 깜짝 놀랐습니다. 당시 소성에서 덕천가는 길이 너무 좁아 차 두 대가 한 번에 통과할 수 없을 정도였다네요. 어떤 곳인지 아마 생각이 드실 듯 합니다. 정읍발언 덕분에 한국이 분단되는 계기가 되어버렸지요. 나름 역사적인 장소에서 사셨군요, 부럽습니다.

      WO1 / 뼈 너무 먹으면 목에 걸리니 적당히 뱉고 드십시오(...) 지금 이 순간도 언젠가 연구되고 드라마화되겠지요. 보고 싶으면서도 보고 싶지 않기도 한 미묘한 마음입니다.

      아를의방 / 오, 여기 또 정읍 출신 한 분 계신 건지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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