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덫과 천일의 약속

요즘 청춘의 덫을 간간이 보고 있어요.

저는 다른 김수현 드라마들을, 물론 몇 편씩 보기는 했지만, 챙겨서 꼭 보진 않았어요.

그랬긴 하지만, 얼마 전까지 방영됐던 청춘의 덫과 천일의 약속을 비교해보면...

저는 작가가 구닥다리다, 구시대다, 구시대의 감성이다, 그래서 천일의 약속이 재미가 없다,

이런 말에는 조금... 동의를 못하겠어요.

왜냐하면 김수현은 시대의 변화를 너무나 잘 읽어내요. 그래서 천일의 약속이 오히려 재미가 없었던 것 같아요.


청춘의 덫은, 다들 아시다시피,

출세에 눈이 멀어 조강지처를 배신한 남자가

그 조강지처에게 복수당하는 이야기입니다.


청춘의 덫에서 선악구도는 굉장히 날카롭습니다. 아마 김수현 드라마의 특징인 것 같기도 한데,

부와 권력을 (부정적인 방법으로) 탐하는 남자 - 악 (청춘의 덫 이종원)

가난하지만 품위와 윤리를 갖춘 여자 - 선 (청춘의 덫 심은하)


이러한 인물상이 김수현 드라마에는 매번 나오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내 남자의 여자에서도, 부와 권력은 아니지만, 

아무튼 완벽한 가정의 모습을 부정적인 방법으로 탐하는 인물이 악역으로 나왔죠. (김희애)

그리고 거기에는 촌스럽지만 품위와 윤리를 갖춘 인물인 배종옥이 나왔고요.


<선>

가난하지만, 가부장적인 질서에 순응하며, 반듯하고 깔끔하고 자존심이 매우 세고, 아름답고 단아한 주인공.

이 주인공은 부와 권력을 탐하지 않습니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원하지 않아요.

(청춘의 덫 심은하)

그리고 이 여성은 이미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어딘가 성격적 결함이 있는 남성(주로 재벌 2세 ㅎㅎ)에게 간택됩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서로 사랑으로서 서로의 단점을 극복하고 완벽해집니다.

사랑이 이런 결함을 봉합함으로써 여주인공은 가부장적인 질서를 완벽하게 아름답게 만듭니다!!!


<악>

가난하지만, 질서에 순응하지 않고, 부와 권력을 절실히 탐하는 인물. 그것을 부정한 방법으로 취하려 함.

(청춘의 덫 이종원)

1970-80년대의 고도성장 시기는 이러한 악역에게 너무나 큰 에너지와 극적 동기를 부여합니다.

이종원이 가난함에서 벗어나 부자가 되고 싶어하는 것은 그 시대 배경상 너무나 당연해 보이고, 그것은 어쩌면 우리 모두의 욕망일지 모르기 때문에

김수현 드라마의 악역은 악역이면서도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만하고, 큰 공감을 이끌어냅니다.


그리고 이러한 악역이 큰 에너지를 가지고 주인공과 대립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죠 ㅎㅎㅎ

그러니까 청춘의 덫... 이거 얼마나 재밌습니까 ㅎㅎ

한 12부 정도까지 완전 폭풍몰입 해서 보았죠 ㅎㅎ


그런데 천일의 약속은 그렇지 않아요.


일단 우리의 주인공, 수애... 위에 말했던,

가난하지만, 반듯하고, 깔끔하고, 자존심이 매우 세고, 아름답고, 단아하고... 그렇습니다.

김수현표 여주인공입니다.


역시, 함부로 부와 권력..을 탐하지 않아요. 그 세계에 속한 남자를 사랑하지만, 그 세계는 자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남자... 지형 역할의 김래원.

그는 충분히 부잣집 남자이기는 하지만, 더 높은 계급의 여자인 향기와 결혼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는 사랑하지 않는데도 향기와 결혼하려고 합니다. 향기가 가진 것들을 가지기 위해서.

이런 주인공은 원래 김수현의 세계에서는 악역입니다.


그 아버지는 예전에 가난했지만 역시 부자인 김해숙과 결혼함으로써 자기 세계를 완성합니다.

그 아버지는 어쩌면 청춘의 덫의 이종원 같은 사람이었을지도 모르죠.

그 아버지는 아들의 결혼을 통해 그 세계를 더 완벽하게 하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지형이 아무 생각이 없다는 겁니다. 처음에 그는 우유부단의 결정체입니다.

마음은 여기에, 몸은 저기에. 그는 그저 부모가 하라는 대로 따릅니다.

그는 사실 전형적인 김수현표 악역의 캐릭터(이종원)로 태어났을 겁니다. 그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죠. 2011년의 세계는

1999년 청춘의 덫의 세계와 다릅니다.

지금은, 자기가 노력한다고 해서 신분상승이 이루어지는 사회가 아니에요.

특히 젊은 세대, 2-30대가 노력으로 신분상승을 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김수현 작가는 아마 그걸 빠르게 파악했을 겁니다.


지형이 향기와 결혼하는 것은 약간의 신분상승이기는 하지만, 그 세계는 이미 부모에 의해 완성되어 있습니다.

그는 딱히 더 신분상승할 필요성도 못 느끼고요. 이미 부잣집 아들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수애와 결혼할 생각도 안 합니다. 처음에 그들은 아예 부딪쳐 보는 것조차 포기해요.

그것은 수애가 부와 권력을 탐하지 않는 전통적인 김수현표 여주인공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지형이 그럴 힘이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지형은 자기의 힘이 부모로부터 주어져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민감하게 의식하고 있습니다. (요즘 잘사는 20대들과 같죠)

그래서 수애의 미덕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그 미덕이 부와 권력에 의해 잘 받아들여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청춘의 덫의 전광렬이나 유호정처럼, 자기가 선택한 가난한 사람을 제대로 주장하지도 못합니다.


지형의 캐릭터가 이처럼 우유부단한 것은, 사실상 작가의 뛰어난 통찰력 때문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현재의 2-30대가 부모의 지원이 끊길 만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을 작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죠.


이처럼 드라마의 2-30대가 힘이 없기 때문에,

사실상 초반의 극적 상황은 이 상황을 좌지우지할만한 힘이 있는 부모들에게 주어집니다.

향기나 지형이, 서연이가 나오는 장면보다

그들의 부모, 특히 김해숙, 이미숙이 나오는 장면이 더 재미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수애를 받아들이는 것도, 지형의 힘보다는 그의 어머니의 힘이 더 큽니다.

김해숙이 맡은 그 어머니는 수애를 만나 보고 수애의 인물됨에 반합니다.

김수현표 여주인공이 가진 그 미덕, 가난하지만 아름답고 단정하고 단아하고 똑똑하고... 머 그런 미덕에 반한 것이죠.

김해숙이 그 여주인공을 자기 품에 끌어안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겨우 드라마는 굴러갑니다. 지형에게는 드라마를 끌고 갈 힘이 없는 거죠.


이런 상황에서 여주인공의 병이 치매라는 것은 굉장히 상징적입니다.


천일의 약속에 나오는 부모들, 이 부자들은 부자일 뿐 아니라 윤리적인 덕성도 함께 갖추고 있습니다.

물론 김수현의 드라마에서는 항상 그렇긴 했지만, 부자이면서 좀 못된 애도 나오긴 했죠.

그렇지만 이 드라마에서 부자는 모두 착합니다. 심지어 향기를 보세요.

원래 부자들은 원래 착합니다. 여기서 서연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임채무는 사실 자수성가한 부자입니다. ㅎㅎ


구도상, 악역이였어야 할 지형도 어쨌든 부자죠. 그는 더 부자인 향기와 사랑 없이 결혼함으로써(부정하게 부와 권력을 탐하기)

원래는 악역처럼 나왔지만, 향기를 거부하고 가난하지만 미덕의 결정체인 서연을 선택함으로써 정화됩니다. 완전히 착한 역이 되죠.

그리고 임채무도 나중에 서연을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천일의 약속은 굉장히 비현식적인 것 같으면서도 현실적입니다.

가난하지만 미덕의 결정체인 여주인공이 치매에 걸려 자기 자신을 잃어간다는 설정은...

마치 지금 이 시대의 한국에서 가난한 사람은 도덕적인 품위조차 하나하나 잃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처럼 보입니다.

모두 서연이, 서연이 하면서 안타까워하죠. 주인공 위주로... 그것은

이제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가질 수 있었던 미덕을 차츰차츰 잃어버려야 하는

현실에 대한 품위 있는 애도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서연이 결국 부잣집 남자와 결혼하고, 그 부자들이 서연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제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가질 수 있었던 도덕적 품위조차 부자들이 흡수해 버리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저는 김수현이 사실은 이 시대에 대해 굉장히 통찰력을 가진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표현 방법은 구식이고, 캐릭터가 구식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는 있지만

자기의 캐릭터를 변하는 시대 상황에 맞추어 그려 넣은 거죠.

이게 김수현의 마지막 멜로라고 했던가요? 그런 기사를 봤던 것도 같고요.

만약 마지막 멜로라면 더욱 상징적입니다.

김수현의 멜로드라마는 항상 위의 선악구도로 진행되어 왔으니까요.

이제 더 이상 그런 선악구도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아마 작가는 알고 있을 겁니다.


천일의 약속이 못 썼을 수도 있죠.

그렇지만 저는 못 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에 맞추어 써야 하니까요. 그게 뭐 김수현 작가의 한계일지도 모르지만요...







    • 매우 매우 동의합니다. 못 썼다는 평가는 작품에 대한 이해의 폭이 좁거나, 김수현에 대한 기대치가 높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 저도 김수현 작가가 시대를 읽어내는 감각이 떨어진다는 생각은 절대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생은 아름다워에는 정말 이 작가 괴물이고 대가구나, 하고 놀랄 만한 순간들이 많았는데, 천일의 약속은 그보다는 타 드라마의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반-드라마적인;; 성격이 두드러지면서 극적인 생기는 많이 떨어진 느낌이 들어서 그 부분이 살짝 아쉽습니다. 흥미롭긴 해요.. 여전히 놀라운 현재 진행형의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시대에 대한 일종의 논평-교육 열정도요 ㅎㅎ
    • 김쌤 작품은 현 시대를 가장 앞서가는 작품입니다. 천일의 약속을 통해서도 그걸 다시 한번 증명했죠.
      이 작품이 과연 70이 넘은 노작가가 쓴 작품인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시대를 앞서가는 작품이였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드라마에서 흔하게 보는 에피소드 위주, 개연성 없는 전개를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등장 인물 1명 1명 모두 소중하고 조심스럽게 전개시킵니다.
      심플하게 이야기해 문 모 드라마 작가나 임 모 드라마 작가의 작품과 비교해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과장된 게 아닐 지 모르겠지만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게 영광스러운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김쌤! 오래오래 사시고 건필하세요, 정말 정말*100만배 존경합니다.
      제가 트위터에도 말했다시피 김쌤 작품을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심 모 감독과 스필버그 감독을 동급으로 보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 스필버그의 작품에서 그의 사고나 극 전개 방식, 연출의 문제를 발견하고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곧 그를 심형래와 동급으로 끌어내리는 것은 아닙니다.

        김수현의 보수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마찬가지죠.

        김수현의 작품에서 다른이가 발견하지 못한 부분을 이야기할 수도, 자신의 관점이 타인과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러나 그것이 곧 김수현의 어떤점을 비판하는 사람은 곧 바보라는 식이어선 상대를 불쾌하게할 뿐이죠. 이거 아니면 저거 . 김수현 까디말라

        눙. 문제 제기하면 역적.이게 어떤 대화를 가능하게 합니까?

        저는 김수현의 글에 가부장적 사고와 청년적인 전복성이 공존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전복적이든 말든 이야기꾼으로서 맛깔나게 이야기를 끌어나간다는 대단한 매력 때문에 김수현의 드라마를 계속 보게 될 겁니다.
        좋아하고 존경하는 작가에게 가해지는 비판은 듣기에 당연히 즐겁지 않습니다. 존경한다. 까지 마라선이었으면 저도 맞아 맞아 나는 욕해도 딴 사람들은 그로디마 모드였을 겁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확 불쾌해져서 웃고 있을 수가 없군요.
        기본적으로 현존 작가 중 김수현을 가장 좋아합니다만, 그리고 어제 보라색안경님의 글이 너무 좋았기에 다시 정독하려 열었다가 루이스님의 스필버그 심형래 운운에 매우 불쾌해져 나갑니다.
    • 루이스/김쌤은 아직 60대셔요ㅠㅠ 아마 67인가 68인가...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게 영광스러운 작가라고 생각합니다.222222222222222222

      본문 내용과 댓글에 모두 적극 동의 합니다!!
    • 잘 읽었습니다. 현실적 젊은이가 주인공이 되면 추동성을 잃는게 재밌는 점이죠. 그래서 요즘 드라마에 나오는 젊은이 캐릭터 대부분이 비현실적이고요. 그러지 않으면 극의 진행이 어렵죠. 다만 수애 캐릭터가 이렇게까지 몰입 되지 않을지 예상했나 모르겠어요. 너무 아쉬워요.
    • 이 글을 읽다가 내가 왜 불꽃의 이영애 캐릭터에 매력을 느꼈나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됐네요. 역시 대단한 작가라는 생각도 다시 하고 가게 되네요. 잘 읽었습니다.
    • 아름다운 글이긴 한데
      '약간' 꿈보다 해몽 느낌도..;
      그리고 힘없는 2-30대, 부와 덕과의 관계.. 이런건 김수현 정도의 대가면 당연히 읽어야겠고, 이게 뭐 특별한 현실인식도 아니죠.
      이걸 작품 속에서 명징하고 우아하게 잘 녹여내느냐가 어려운 문제고, 천일의 약속에선 잘 성취하지 못했다는 느낌이고요.

      그리고 예전의 김수현 작품들의 독특한 설정들은 통찰력, 전복성에서 왔다는 느낌을 줬었는데
      천일의 약속에선 serene님 말씀대로 '타 드라마의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반-드라마적인' 방향성 같은 것에서 왔다는 느낌에
      아무 감동이 없었고 김수현이 주곤 했던 어떤 세련됨이 거세되는 느낌까지..

      분명 자기의 세계(김수현 월드)에서 외부를 흡수하며 진화하는 작가인 것 같지만, 감각이 조금은 낡았다는 느낌을 천일의 약속에선 받았네요.
      (근데 감각이 낡았다는 얘기가 통찰력이 떨어진다, 시대에 뒤떨어진다 뭐 이런 거랑 등가인 건 아닙니다. 천일의 약속 아주 현대적인 걸요.
      그러함에도, 그냥 말 그대로 감각이 조금 낡았다는 느낌..
      아 그런데 '천일의 약속에 한해서' 특별한 통찰력이 안 보이긴 했어요. 물론 김해숙&이미숙 몇몇 씬들에선 감탄하긴 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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