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야그] 어느 잉여의 삶
공부 때문에 어린아이가 목숨을 잃었네요. 이런 이야기는 끊이지 않는 거 같아 참 들을 때 마다 가슴이 아파요. 그렇게 죽어도 죽어도 세상은 안 바뀐다고 비관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 라는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하게 된다면 조금씩 변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실 어느 시대나 그랬어요. 부모는 많은 것을 자식에게 원했고, 그걸 받아들인 자식이 있었나 하면 반항하기도 했지요. 옛날 조선시대 양반들 생활을 보면 지금과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아요. 어린 자식이 서너 살만 먹어도 한자를 가르치고, 과거시험 요점 문제지를 보여줬지요.
자식들이 글 읽는 흉내를 내면 "우리 애는 천재인가봐!" 하고 기뻐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모든 자식들이 공부에 소질을 보인 것은 아니었어요. 왜 그리 옛 사람들은 아이를 그렇게 심하게 때렸나 몰라요. 이야기하면 우울해지니 안 할께요. 아무튼, 조이건 볶건 공부를 못하는 애는 못하고 잘 하는 애는 안 시켜도 잘 했습니다. 스승도 없이 집안 도움도 없이 과거 9차례 올 킬한 율곡 이이도 있는데요 뭐.
그래도 시골 양반들은 과거 급제야 말로 우리 가문을 일으킨다! 하고 가세를 큰아들에게 올인했는데... 그러다보니 큰아들은 재산만 까먹고 계속 물 먹는데, 공부 포기시킨 둘째아들이 열심히 일해 부자가 되더랍니다. 결국 큰아들은 나이만 들고 세상 물정 모르고, 둘째가 집안의 기둥이 되었는데 이런 집이 어디 한 두 군데 였겠습니까만 서도.
어쨌건, 오늘은 어떤 잉여의 삶을 이야기해드릴께요.
옛날 옛날, 조선시대에 어떤 잉여가 살고 있었어요.
왜 잉여냐고요? 그 때는 다들 닥치고 공부해서 목숨걸고 과거보고 급제해서 입신양명하던 게 삶의 목표였어요. 그런데 잉여는 과거에 관심이 없었거든요.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아버지가 좀 높은 벼슬을 한 적이 있어서 집은 먹고 살만 했다는 거? 다들 터치는 안 했어요. 막내아들이었거든요. 그냥 오냐오냐 하고 키웠는지도 모르죠. 그래서 젊었을 때 뭐 하고 지냈는지 알 수 없어요. 아마, 잉여가 하면서 놀 수 있는 건 다 하지 않았으려나요. 나중에 사람들은 "그 잉여는 공부만 했고 과거에 뜻이 없었던 거야."라고 말했지만... 글쎄요, 정말 그랬으려나요.
친구들이 보다 못해 높은 관리였던 아버지 덕 봐서 작은 동네의 원님 벼슬이라도 얻으라고 했어요. 하지만 이 잉여는 싫댔어요. 옛날 강태공은 80살이 되어서야 취직했는데 자기는 아직 젊으니까 괜찮다고요. 부모님이 들었다면 가슴을 탕탕 칠 거 같은 이야기죠.
그러다가 잉여는 마흔이 되었어요.
아들은 없고, 딸 하나가 있어서 사위를 들였죠. 사위놈은 일찍 부모님을 다 잃은 고아인데 성균관은 못 가고 겨우 사학 다녔고요, 용케 과거는 붙었네요. 하지만 사위놈 성깔이 참 그래서, 처가살이 하면서 툭하면 가출하고 금강산 가고 속을 북북 썩이지 뭐여요.
그래도 살면 정든다고 그렇게 살다가 마침내 손주도 태어나고 오순도순 살았어요. 그런데 갑자기 잉여는 과거시험을 보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왜 갑자기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 알 수 없어요. 아마도 사위놈이 자존심 팍팍 건드린 게 아니었을까요? 어쨌거나 잉여는 무려 46세의 나이에 겨우 과거에 급제하게 됩니다. 이미 다른 사람이라면 명퇴를 할 나이에 처음 취직을 했으니 얼마나 전도유망하겠어요?(...)
그러다 갑자기 전쟁이 터집니다! 그동안 너무 평화로웠기에,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퍽퍽 나가떨어졌어요. 다들 나라 일은 나 몰라라 하고 짐 싸들고 가족만 데리고 도망가는 와중. 잉여는 격전지 한 복판에 가게 되었어요.
잉여는 여기저기 끌어모은 병사들을 이끌고 적군과 싸우려 나갔어요. 저기 평야 저 편, 적군이 새까맣게 몰려오고 있었어요. 이쪽엔 어제까지 농사만 짓다가 끌려나온 사람도 있었고, 제대로 된 무기를 가지지 못한 병사들도 있었어요. 잉여는 한 손에 칼을 들고 부하들 앞에 섰어요. 뭔 일 하려나, 하고 부하들이 숨죽이고 있는 와중. 잉여는 칼을 뽑아들고 외쳤어요.
"돌격!"
그리곤 칼을 꼬나잡은 채 달려나갔어요! 그러더니... 세상에, 적군들과 맞서 싸우는 거여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병사들도 주섬 주섬 무기를 챙기기 시작했어요. 대장이 앞장서서 싸우는데 어떻게 그냥 보고만 있겠어요. 하지만 궁금함은 여전히 남았답니다. 한 병사가 옆의 병사에게 물어봤어요.
"쟤 문과 아니었니?"
어쨌건, 이후로 그 잉여는 전쟁에서 싸워서 여러 번 이기고 훌륭한 장군이 되지요. 만약 그가 젊었을 때 글공부만 죽도록 했다면 눈 앞에서 적군들이 몰려오는데 버티고 서 있을 깡이 있겠어요? 뭐 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칼을 휘두르진 못했을 거여요. 수수께끼에 싸인 권율의 청년시절이 이렇게 윤곽이 드러난다 싶습니다.
...네?
아, 권율이요. 이제까지 한 게 권율 이야기여요. 그, 영의정 권철의 막내아들이자 임진왜란 때 도원수를 지낸, 행주산성의 승리자 권율 말여요. 나중에 그의 사위 이항복은 "울 장인은 과거에 뜻이 없고 공부만 했어!"라고 글을 지었지만 그걸 어떻게 알아요. 직접 보지도 않은 건데. 글공부 하는 대신 산과 들과 시장통을 뛰어다니며 체력을 단련하고, 붓을 휘두르는 대신 그것보다 더 묵직한 무언가를 휘둘렀겠지요.
게다가 임진왜란이 벌어졌을 당시 그의 나이는 56세. 낼 모레면 환갑입니다. 헌데 칼을 들고 휘둘렀다? 문과 급제자가? 사실 왜란이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지방 관아들이 쳐발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지방 수령들이 다들 문과 급제자라서 전쟁에는 문외한인 까닭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같은 문과 출신인 권율은 아니었죠.
그는 싸울 때는 놀랄 만큼 대범했어요. 간이 배 밖에 나왔나 싶을 정도로요.
한양 탈환하겠다며 달랑 2천명 조금 넘는 병사들을 이끌고 단독으로 왜군들이 득시글 거리는 경기도로 북상합니다. 도와줘야 할 이여송은 꼼짝 안 했기에 정철은 위험하다고 말렸지만요. 그렇게 깡으로 올라간 뒤 여기 까꿍 저기 까꿍 온갖 꼼수 다 써서 왜군들 뒤통수를 치고 다녔습니다. 약이 오른 왜군의 총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에가 무려 3만명을 동원해서 조선군들을 쓸어버리려 했는데, 그 때 권율 휘하엔 달랑 2천 3백명의 병사만 있었습니다.
바로 행주산성에...(...)
뭐, 지금도 행주산성 가보면 아시겠지만 험한 산도 없고, 산성도 딱히 요새가 아니라 야트막한 언덕에 있는 기지랄까 그런 곳이죠. 근데 여기 3만명이 쳐들어왔고, 결과는 아시다시피 이겼어요. 어떻게 이겼냐고요? 그야 바다의 해충 불가사리처럼 싸웠거든요. 쓸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다 긁어모아서 악으로 버티며 싸웠어요. 나무로 담벼락을 만들어 세우고, 화살 다 떨어지니까 끓는 물을 퍼붓고, 돌도 던지고, 그 때 갓 만들어져서 쓸만한 지 어떤 지 잘 모르겠는 화차(火車)랑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도 쓰고요(응?). 분명한 사실은 멋있고 근사하게 싸운 게 아니라, 불타 무너져가는 나무벽 사이에 두고 몰려오는 왜군과 백병전 육박전 뜨면서 조낸 치열하게 싸웠고... 그리고 이겼어요.
그렇게 해서 권율이 쳐바른 일본 무장들은 아마 일본사에 관심있는 분들은 한 번쯤 들어봤던 이름도 있을 거여요. 이시다 미쓰나리, 우키다 히데이에, 고니시 유키나가, 킷카와 히로이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쿠로다 나가마사, 오오타니 요시쓰구 등등.
그렇게 이겨서 전쟁의 분위기가 조선 쪽으로 넘어오게 되니, 권율은 이 공으로 도원수까지 되지요.
...이 정도면 승리한 잉여 아닌가요.
권율이 청년 시절에 뭘 하고 지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정말 공부만 하고 지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임진왜란 내내 왜군과 싸우며 드러났던 권율의 깡과 배짱, 그리고 결단력은 어째 제갈공명 류의 불어라 동남풍 쯤의 스케일 큰 전략이나 전술이 아닌, 길목에서 니 편 내 편 하며 갈라서 다이 다이 쌈박질 하던 그것을 연상케 합니다. 그리고 꾀를 내는 것도 뭔가 거창하지 않고... 뭔가 작고 귀여우며 사소합니다. 성 안에 물이 떨어지자 대신 쌀을 말에게 부어서 물 흉내 내며 적군에게 보이는 것도 그렇고. 저거에 속냐? 싶은 것마저 있습니다. 모래자루를 곡식인 것 처럼 열심히 날라 왜군들을 꼬여내어 이긴다거나...
또, 야사이긴 하지만, 우연히 정찰 나갔다가 대규모의 왜군 부대와 마주치자 전혀 겁 안 먹고 "내일 우리 싸울텐데 오늘은 걍 헤어지고 멋지게 싸우지 안켔니? 'ㅅ'" 라고 잘도(...) 설득해서 풀려나오고, 그런 와중에도 "내 채찍 어디 떨군 거 같은데 찾아주라." 라는 뻥으로 일개 일본군 부대를 분실물 수색을 위해 부려먹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니까요.
게다가 감은 얼마나 좋은지. 치고 나가야 하는 타이밍이라던가, 여기가 싸우기 좋은 곳이다라는 걸 귀신같이 알아보곤 했습니다. 그런 뽀인뜨들은 손자병법도 말 안 했고 육도삼략에도 없어요. 느끼는 감이고 찍는 거죠. 그건 이제까지 겪어온 많은 싸움과 눈치에 숙련된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야 알 수 없습니다만.
만약 권율이 과거에만 매달렸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뭐, 잘 급제하고 관리가 되었을 수도 있죠. 하지만 전라도가 왜군에게 먹히고 도성을 못 찾을 수도 있었어요. 솔직히 전쟁 이전, 마흔 살 너머서까지 직업도 없는 잉여 권율을 보면서 사람들이 얼마나 바보처럼 여겼겠습니까.
그러니 당장 결과가 안 나온다고, 인생에 실패했다고 쉽게 절망하지 말아요.
...이렇게 이야기하지만 미래는 언제나 불안하고, 많은 부모들은 그 불안함을 자식에게 덧씌우며 초조해하겠지요. 그게 아니더라도 내 자식만은! 이런 생각도 수이 사라지진 않았을 거여요. 인디아나 존스가 공부 때려친 게 자기 자식이라는 걸 안 순간 "왜 학교 안 보냈어!" 라고 버럭했던 것 처럼 말입니다.
그래도 힘내요. 언젠가 미운오리새끼가 백조로 뙇! 하고 변신하듯이 내 인생이 가장 빛날 수 있는 시대가 갑자기 찾아올 지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