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잡담] 용비어천가와 아부의 전통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한 번 쯤은 들어보았을,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뮐쎄 곶 됴코 여름 하나니.

바로 1447년 간행된 용비어천가의 2장입니다.
1장 아니냐고요? 아녀요. 1장은 해동육룡이 나라샤- 로 시작합니다. 많이들 모르는 이야기죠. 저도 이거 쓰기 전까진 몰랐으니 말입니다.


어쨋든, 수많은 티셔츠와 벽지 디자인으로, 그리고 드라마의 제목으로도 활용되는 용비어천가입니다만, 동시에 권력자들에게 아부하는 말을 비유하기도 하지요. 이 사실을 세종대왕님이 아신다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공중 3회전을 하고 다시 이불 뒤집어쓰고 눕겠지만. 어쩌겠습니까, 사실이 그런 걸.

용비어천가의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조선에서 우리 집안이 제일 잘나가♪...라고 하면 세종대왕님이 우시겠지만 틀린 것도 아니지요. 조선의 건국을 맞이하여, 전주이씨 이성계 집안 우상화 및 독재의 시작... 을 위한 관제 영웅서사시, 속칭 깔때기 문학이지요.

제작에 무려 5년. 집필진에 신숙주, 성삼문, 정인지, 강희안, 박팽년 등등 올... 까진 아니고 집현전 로케로, 국문 더빙이 포함되어 만들어졌습니다. 세종이 직접 제작에 참여할 정도고, 필요한 자료를 전국에서 긁어모아오게까지 했지요. 결정적으로! 제일 먼저 훈민정음으로 만들어진 게 이 용비어천가지요.
전체 내용 중 1/3이 조상님 자랑, 나머지 1/3이 할아버지 태조 자랑, 나머지가 울 아빠 자랑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렇게 되면 그, 아부의 아이콘이 되어도 할 말은 없습니다만...

 

이렇게 자세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뭐냐면요, 어차피 불우한 역사학과나 중세 국어 전공자가 아닌 다음에는야 용비어천가 두 번째 줄 이상을 아무도 안 읽을 거기 때문이어요.
뿌리깊은, 까진 알아도 그 다음 중국 임금이 어떻고 태조가 어떻고 하는 대목을 아는 분도 드물거여요.
왜냐면 재미없고 촌스럽거든요.
읽으셨다면? 당신의 근성과 튼튼한 신경줄에 경의를 표합니다.
그거 진짜 재미없어요. 뭐랄까 어이가 없어서 웃기기까지 해요. 쓔웅- 쓔웅- 콰광~ ...이렇게 요약하면 좀 그렇지만. 아무튼 세종대왕이 그걸로 자기 취미생활... 최초의 훈민정음 시범 케이스를 하지 않았다면 그런 게 만들어졌는지도 몰랐을 거여요.

 

세상 일이 그래요.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하면 아무리 아름다운 예술작품이라도 참 촌스러워지기 마련이어요. 오래 사귄 친구놈을 만나도 잘난척 하는 거 고이 듣기 괴롭습니다. 재미도 없고요. 하물며 조상님, 아빠 찬양인데 어떻겠어요. 그리고 그 아빠님이 참 훌륭한 일도 많이 하셨다면 하셨겠지만... 아유, 제가 말을 말지요.

하늘은 참 공평한 거 같아요. 태종에게 양녕대군 같은 사고뭉치 아들을 줬는가 하면 세종같은 효자를 동시에 줬잖아요. 세종이 얼마나 열심히 아빠와 할아버지를 위해 애를 썼는지 상 줘야 마땅합니다. 생각해보면 해준 게 뭔데 그렇게 열심히 챙겨줬나 몰라요. 어릴 때는 형만 이뻐했고, 좀 자라니까 외삼촌들을 작살냈고, 그 다음엔 처가를 아작내기까지 했는데 말이지요.
하기사 늙은 부모님 챙기고 매번 용돈 드리는 것은 보약 먹여 키운 큰아들보다 천덕꾸러기 셋째 아들인 법이지만요.

그래도 용비어천가는 국가 프로젝트지, 개인 단위의 권력자에게의 아부는 얼마나 유구하던가요. 지금도 많아요. 어느 때는 그 정도가 심하다보니 오히려 개그가 되기까지 하죠. 형광등 100개라던가.

그런데 이런 권력자에게의 아부는 그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힘에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힘이 사라지면 안녕 안녕이라는 것.

조기유학 왔다가 입시에 실패해서 쫄쫄 굶으며 취직처를 찾던 최치원의 자소서가 "청소부라도 좋으니 써주세요 ㅠㅠ"였다가, 사표내서 신라 돌아갈 때는 "님하 안녕" 이었던 것처럼. 사람이 힘있는 사람에게 아부하는 것은 원하는 바가 있는 것이고, 그게 없으면 정말 헌신짝처럼 돌아서는 법이니. 그래서 아부는 허무하고 아류 용비어천가들도 본 투 비 불쏘시개인 법이지요.
이승만 정권 때나 군사정권 시기의 신문지를 훑어보면 아부의 새로운 경지를 보곤 합니다. 박사님께 바쳐지는 한 떨기 목련화 같은 칭송이라던가 땡전뉴스 한 토막 보면... 그래, 모름지기 아부를 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랍니다. 하지만 그렇게 칭송받아온(?) 이들이 결국 어떻게 되었느냐를 떠올리면 그렇게 닭과 친구해도 될 것 겉이 두두두 올라오는 닭살도 한결 완화되는 듯 하고 한결 편안하게 볼 수 있게 되요. 쌤통이다, 라는 생각이 드니까.

그런 거여요 결국.

요 근래 새로 시작한 방송들에서 시도 때도 없이 용비어천가가 흘러나온다며 불평하는 이야기들이 많네요. 염려마세요, 텔레비전을 끄고 누우면 잊혀질거여요. 그보다 더 세련되고 재미난 게 훨씬 많이 있거든요.


p.s : 졸립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 최치원의 자소서가 그랬단 말인가요?! ∑(ㅇㅁㅇ!!!
      뭐 권력층에 있어서는 자신들의 정통성을 내세우는 게 제일이니까, 용비어천가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뭐 자기 집안이 왕가가 됐으니까 우리 좀 잘난듯! 해도 그럭저럭 수긍은 할 수 있....나?) 하지만 진짜 아부의 대가는 정철 아닐까요?=ㅅ=;; 관동별곡 같은 거 보면...-_-;;; 그야말로 요즘 말하는 'xx서킹'...(비속어 죄송...)
      요즘 LH님의 글이 많이 올라와서 기쁜 1인이었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 용비어천가 고전교과서에서 배웠...다고 하면 연식이 나오려나. 물론 교과서에서 겉핥기 수준으로 배운거고 입시에도 안 나왔으니 그리 많이 읽은 건 아닌데 뭐 그래도 재미있었어요. 장군님 축지법 쓰신다와 일맥상통해서 옛날이야기 읽는 기분으로 ㅎㅎ
    • 용비어천가. '뿌리깊은 나무'란 제목은 정말 잘 지었어요. 신하가 잘 버티는 왕조는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으니.. 신하가 좋아서 임금도 명군이 나오고 백성들은 풍족하도다.. 이렇게 해석 되는 군요
    • 흐흐흐 용비어천가 저는 꽤 좋아해요.
      저는 뭐 경기체가도 좋아하니까 용비어천가 좋아하는 게 이상하진 않지만요.이야기가 꽤 재밌더라고요. 국문학도도 역사학도도 아니지만 아무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희 때는 목익도환태태 이렇게 암기도 시키고 용비어천가를 꽤 탈탈 털어서 공부했는데 바뀐 교과과정에선 어떤지 모르겠군요.
    • 쑤우 / 아, 그러게요. 감언이설말고 다른 표현이 있었을텐데 찾아봐야 겠습니다.

      에아렌딜 / 최치원 이야긴 꽤 처절하니 나중에 한번 써보겠습니다. 그렇지, 아부하면 사미인곡인데 깜빡했네요. 정철도 참 답 없는 사람이었지요...

      Shadowland / 네? 용비어천가를 배우셨어요? 고전으로? 저는 그냥 이름만 알고 지나갔던거 같은데... 제 연식도 드려나려나요, 쿨럭.

      Cksnews / 다행입니다 ㅎㅎ

      Weisserose / 실록에는 용비시라고 부르더군요, 어, 그런데 뿌리가 신하들을 이야기하는 거였나요. 전 잘난 조상님 말하는 줄 알았는데...

      안녕핫세요 / 어이쿠, 고전문학 좋아하는 분이 있는 걸 깜빡했네요. 사실 그래요, 나름 재미있죠. 그, 그런데 옛날엔 용비어천가 내용까지 배웠나봐요...? 전 몰랐는데요, 커흠.
    • 용비어천가를 고등학교때 배웠습니다. 물론 내용도 다 배웠는데...그게 전체 내용이었는지는 모르겠고, 아무튼 창업의 공을 세운 임금의 6대조까지 왕으로 추대하는 전통에 따라 이성계의 6대조 선조들 얘기를 듣게됐는데, 이 구조가 재밌긴 합디다. 중국의 위대한 임금들 때로는 금나라 태조까지 비교해가며 이들에 비해 우리 왕조의 조상님들이 전혀 뒤져지지 않는다고 댓구법으로 묘사하니까요.

      뭔가 플루타르크의 영웅전과 상통하는 면도 있어요. 플루타르크는 자기 조상인 그리스의 영웅들이 로마의 영웅들에 비해 전혀 뒤지지 않는다고 하면서 이들을 비교하는 방식으로 전기들을 저술했는데...이 방식이 뭔가 대상을 선명하게 보이게하는 효과가 있는것 같네요.
    • 저요 저요 저요.. 저도 용비어천가 배웠어요.
      저는 하물며 학원에서 고전으로 따로 배우기까지(입시정책이 널을 뛰던 고딩때 했던 쓸데 없었던 대표적인 잉여짓)
      그때 학원샘이 하던 얘기가 LH님이 하신 말씀의 지루버젼이었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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