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슨한 독서모임]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지금 독서모임을 할때가 아니라 당장 여의도로 가야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지만

 

어차피 육아에  메인 몸인지라...

 

여하튼 시작합니다.

 

    • 그러게요. 지금 이러고 있어도 되나 싶지만 일단 저도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혹시 시위에 참가하실 분은 명동으로 가시면 된다고 합니다.
    • 아.. 여의도가 아니라 명동이군요.. 그저 응원할 수 밖에 없는게 아쉽네요.
      지난번에 읽은 감자껍질 파이 북클럽의 등장인물이 떠올랐어요.
    •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읽기 시작했는데 결국 다 읽지 못해서 아쉽네요 ㅠ.ㅠ
      초반 두 챕터 정도 읽은것 같은데. 인상 깊었던것은 작가가 처음에는 돈이 없어도 있는 척 하려고 했다는 거였어요.
      빵을 숨겨서 들어와서 먹는다던가 하는. (곧 그것도 관두게 되지만)
      • 그런 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도 수십번 기워 낡아빠진 옷깃이라도 계속 달고 다닌다든가 옷의 견장 같은 것을 소중하게 꿰매어 떨어지지 않도록 한다든가 하는 묘사가 뒤에도 나와요. (앗 스포일러 죄송ㅜㅜ) 누구라도 백 미터 바깥에서도 그 사람을 보면 부랑자 신세라는 걸 한 눈에 알지만, 정작 당사자는 최대한 그렇게 보이지 않으려고 한다는 얘기도요.
    • 레옴/ 등장인물 가운데 누구 말씀인가요.
      삼십 대 중반에 쓴 [위건부두로 가는 길]에 비해 이 책은 딱 스물 대여섯의 청년의 쓴 느낌이 역력하네요. 혈기왕성하고 신랄하고..
      • 엘리자베스요.. 전 지금 아이를 봐야해서... 집안에 일이 있어서.. 라고 핑계를 대고 있는게 아닌가 하구요. 엘리자베스는 그러지 않았잖아요 ㅜㅡㅜ
        • ㅜㅜfta 통과될 때 민주당 의원들 출판기념회에 가 있었다고 하던데.. 명동에서 사람들 물대포맞고 연행되고 한다는데 독서모임글에 댓글 달고 있는 게 부끄럽긴 합니다.
    • 앗! 이참에 다시한번 읽어볼려고 했는데 꾸물거리다 모임글이 올라와 버렸네요. 일요일이나 토요일쯤 올라오지 않을까하고 있었는데... 벌써 이주가 흘렀었군요.
      • 격주 화요일 9시에 모임을 하고 있어요.
    • 참고로 이 책[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Down and Out in Paris and London]의 우리말 번역서 제목들은 [파리·런던 방랑기] [파리와 런던의 영락생활]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파리와 런던의 패배자] [파리와 런던의 안팎에서] [파리와 런던의 아래쪽에서]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었는데요, 그 원어인 Down and Out이란 밑바닥의 소외된 삶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책 머리에 인용된 초서의 문장 "오, 통절한 해악, 가난의 상황이여!"같은 건 그냥 "아, 가난이란 크나큰 재앙이로구나"처럼 알아보기 쉽게 써주었으면 좋겠어요.
    • 꽤 오래전에 읽었지만 아직도 기억나는게 가난이 두렵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닥치고 보니 시시하고 지루했다 라고 얘기하는 대목이예요.
      사실 돈이 없으면 할만한게 별로 없기는 하니까 참으로 공감이 가는 말이라고할까요.
    • 비슷한 처지에 같이 굶어가며 감정이입되어 읽던 책이죠. 배고픈데 할일이라곤 <셜록 홈즈의 회상>을 읽는 거 밖에 없었다...
    • 저는 파리 런던 방랑기라는 제목으로 읽었어요. 한참후에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이라는 제목으로 나온거를 다시 구입했고요.
      고3 여름방학 보충수업때 이책을 가지고 갔는데 인기가 쫌 있었지요. 다들 조금 읽어보더니 빌려달라고 난리(?)... 하지만 저도 그때는 도서관에서 빌린거라...^^
    • 1933년 1월 이 책이 출판되자 호의적인 서평들('기묘한 정보' '광기의 세계' '20세기 문명의 자기만족을 동요시킨 책') 덕분인지 나오자마자 그 주의 베스트셀러에 올랐대요. 제1쇄가 1500부였으나, 며칠 만에 제2쇄 500부를 찍었고, 다시 1000부를 더 찍는 등 모두 3000부 정도를 찍었는데, 당시로서는 베스트셀러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 1933년 6월에 미국에서 나온 것도 천 부 정도 팔렸고, 1935년의 프랑스어판과 체코어판도 많이 팔리지는 않았대요. 그 책이 정말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1940년 펭귄사에서 5만 5천부를 찍은 뒤부터였고, 오웰은 그 책으로 큰돈을 벌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박홍규의 평전 [조지 오웰] 참조)
      • 이 책을 쓰고 빈민 생활에서는 벗어났으려나 궁금했는데 큰 돈은 벌지 못했군요.. 그래도 베스트셀러라니 작가로써의 지명도는 올라갔겠죠? 이런 생활을 하게되면, 그게 일종의 체험 수준이더라도 그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같은건 없었을까 읽으면서 궁금했어요.
    • 정말 항상 지니고 다니면서 읽는 책입니다.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와 함께 밥맛을 좋게 해주는 책이에요..
    • 내가 별 의미없이 써버리는 돈들이 정말 요긴하게 쓰여지고.. 밥한끼 하루 잠자리가 갖는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어요.

      지난번 서울역 노숙자 이야기가 다시 떠오르면서 우리나라의 노숙자 분들의 생활은 1930년의 영국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지도 궁금했습니다.
    • 레옴/ 여러 출판사에서 거절당하던 [동물농장]을 42세가 되던 해인 1945년 8월에 출간하고 나서야(2주만에 초판 매진) 명성을 얻고 처음으로 생활비 걱정에서 해방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직후 아내가 죽었고 자신은 계속 폐결핵에 시달리다가 47살에 죽었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로 밭농사, 특히 닭 키우기와 채소 재배를 꼽았고, 또 영국의 음식과 맥주, 프랑스의 붉은 포도주, 스페인의 흰 포도주, 인도의 차, 강한 잎담배(이것들은 모두 당시 영국에서는 싸구려였다고 해요), 석탄난로, 안락의자(이들는 그가 싫어하는 것으로 꼽은 중앙집중식 난방과 현대풍가구에 대치되는 듯)를 좋아한다고 했으며, 민요와 민담에 큰 관심을 보였다(대신 클래식은 안 들었대요)는 등의 얘기로 미루어보아 평생 서민취향을 지니고 산 작가 같습니다.
    • 저는 호텔과 식당의 홀 뒷편(주방종업원들과 청소부들과 웨이터들의 세계) 이야기를 보고는 현재 호텔이나 식당들의 근무환경이 궁금해졌어요. 일전에 한겨레21에서 취재한 기사들에서는 노동강도가 격심하고 보수가 열악하다는 인상은 받았는데, 이 책에 실린 20세기 초의 파리 호텔/식당의 노동과 비교해보면 어떨런지 모르겠습니다. 최소한 그때만큼 불결하진 않길 빕니다.
      • 접시닦이.. 그러니까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식당의 설거지 담당이 가장 열악한 일자리에 속하는건 여전한듯합니다. 일도 힘들고 노동시간도 길고... 불결함에 있어서는 저 책에서 묘사한 정도는 아닐꺼라고 생각해요. 사실 그 호텔 종업원 생활 부분은 이런 말을 하면 좀 그렇지만 (실제로 그런 생활을 하면 전혀 유쾌하지 못할테니) 꽤나 유쾌하게 쓰여진 느낌입니다. 런던으로 돌아와 노숙 생활 하는 부분이 훨씬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들더군요. 킵 같은 숙소가 우리 사회에 있을까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고시원이 좀 비슷할것도 같고...
    • 42세가 되어서야 유명해지고 경제적으로도 나아졌다니 여유로운 생활을 한거는 고작 5년밖에 안되는군요.
      예전에 이거 읽었을때는 작가가 중산층에 어느정도 사는 사람인데 책 쓸려고 일부러 이런 경험을 했을거라 생각했었는데 말이예요.
    • 저도 강하게 인상에 남는게 그 식당 생활하는 부분이기는한데... 불결함의 정도를 따진다면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차이날까 싶기는해요.
      좋은나라 운동본부나 불만제로에 나오는 불량 음식점들을 보면 말이죠.
    • 1) 이 책은 조지 오웰의 자전적 이야기로 화자가 파리에 도착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요, 실제로 작가는 25세부터 1년 반을 파리의 빈민가에서 지냈다고 해요. (그렇다고 이 책이 완전히 사실을 적은 르포는 아니고 종종 과장과 허구가 섞여 있다고 합니다.) 그럼 그 이전까지의 조지 오웰은 어떻게 살았었는지, 왜 갑자기 파리 빈민가로 향했던 건지 궁금해서 한번 찾아봤습니다. (역시 박홍규의 평전 [조지 오웰] 참조)

      조지 오웰은 1903년 인도 벵골지방 출생인데, 아버지는 인도주재 영국 아편국 소속의 공무원이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시골교구목사로 조지 오웰의 아버지에게 유산을 거의 남겨주지 못했고, 아버지는 옥스브리지 출신도 아니어서 엘리트코스 문관이 아닌 기술직 하급 공무원으로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에서 37년간 근무했습니다. 당시는(요즘 우리나라도 대략 그렇지만) 귀족의 자제라도 어느 정도의 재산과 사회적 지위가 없으면 결혼이 힘들었는데, 조지 오웰의 아버지는 39살이 되어서야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외할아버지는 버마에서 티크무역과 선박제조로 돈을 번, 제국의 부유한 상인이었고 30명의 원주민 하인을 거느리고 왕처럼 살았다고 합니다. 고조할아버지는 식민지 자메이카의 대지주였고 역시 수많은 노예의 소유자였다고요. 한마디로 오웰은 대대로 대영제국의 침략자 집안 출신입니다.
      그 가계에 걸맞게 그는 식민지에서 근무할 '인재'를 키우는 학교에 다녔고 졸업 후 19세에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에 속해있었던 버마로 건너가 제국의 경찰로 5년동안 근무합니다. 후에 식민지의 참상을 보고 제국에 회의하나, 적어도 식민지 경찰이 될 때까지는, 24세까지는, 영국 제국주의에 큰 거부감 없이 속해있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혹자는 그가 이튼스쿨 졸업 후 케임브리지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으나 출신성분에 맞는 직업을 얻기 위해 진학을 포기했다거나, 대학진학을 거부했다거나 대학생활과 더 이상의 속물사회 생활을 포기했다고 설명하는데, 제가 읽은 [조지 오웰] 평전을 쓴 박홍규씨에 따르면 이는 잘못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대학생이 되는 것을 자기 신분에 맞지 않다고 생각한 적도 없고-사실 그의 신분이 전혀 그렇지 않았으며- 능력이 없어(167명 가운데 138등으로 졸업. 그 성적으로는 장학금을 받을 수 없어서) 못 갔을 뿐이라고요.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속물적이라고 하면 식민지 경찰이 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속물적인 거고, 그가 버마에 경찰로 부임한 시기는 인도에서 악명높은 암리차르 학살 사건(영화 간디에 리얼하게 묘사된)이 일어난 지 4년이나 지난 후였고 영국에도 크게 보도되었으니 오웰 역시 그 사건을 알았을 거라고요. 만일 당시 오웰이 제국주의에 반발했다면 그런 잔인무도한 학살을 자행하는 제국 경찰에 지원했을 리가 없는데, 그는 당시 경쟁이 치열했던 인도총독부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경찰학원 같은 곳도 다녔습니다.
    • 경찰학원... 그런곳도 있었군요..
    • 킵과 비슷한 곳.. 우리나라 노숙자들이 서울역이나 노숙자 쉼터를 대신해서 약간의 돈을 내고 하루 잘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 생각해보다가..
      쪽방이 있군요...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1495
      공동 침실이 아니라는것과 TV가 있다는게 그나마 나아졌다면 나아진 점이고...
      위의 글에서는 하룻밤에 7천원이니.. 무일푼 입장에서는 싸다고 보기도 어렵네요..
      일수방도 생각해봤는데 이쪽은 주로 유흥업계 종사자가 많이 이용하는것 같고.. 노숙자들은 감당하기 힘든 이자네요..
    • 2) 버마로 부임한 19세의 그가 받은 첫 월급은 400파운드로 평생 총독부 관리를 지낸 그의 아버지의 연금액과 비슷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 액수는 2,3년 사이에 배로 올라 중류 상층부의 신사로서 평생을 살기에 부족함이 없는 액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식민지 근무를 통해 제국주의에 문제의식을 품게 되는데 그의 그런 심경변화는 <코끼리를 쏘다>와 같은 수필이나 [버마시절], [위건부두로 가는 길] 등에 잘 나와 있습니다. 결국 그는 5년만에 일을 그만둡니다. 가족의 희생을 통해 어떻게든 이튼스쿨까지 졸업시켰는데, 이제 겨우 가계가 안정되는가 싶었는데 사표쓰고 나온 아들을 보는 부모님의 심경, 그리고 누이의 심경-그녀도 커피집을 운영하며 조지 오웰을 공부시키는데 일조했다고요- 등이 연상되시죠? 파리와 런던의 빈민가로 향하는 당시 그의 심경이 [위건부두로 가는 길]에는 이렇게 적혀있죠.
      "나에게는 실패가 인생의 유일한 미덕인 것처럼 보였다. 자아발전에 대한 모든 의심은, 1년에 몇 백 파운드씩 버는 인생의 '성공'조차 정신적으로는 추한 것이며 남을 괴롭히는 행위로 보게 했다." 이런 인생관이 평생 어렵게 작가생활을 하면서 인생 자체를 지배했다고 합니다.
      [위건부두로 가는 길]에 실린 그의 또 다른 코멘트 : "나는 실업자 수가 얼마라는 것을 읽고 알고 있었으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전혀 몰랐다. 무엇보다도 먼저 체면을 세우기 위한 빈곤이 최악의 빈곤이란 것을 알지 못했다. 성실한 노동자가 평생 부지런히 일한 끝에 갑자기 길거리로 내몰리는 무서운 운명,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경제법칙에 대한 그의 고뇌에 가득 찬 투쟁, 가족의 해체, 수치심이라는 부식력 강한 의식- 이 모든 것이 나의 경험 밖이었다. 빈곤이란 것은 단지 심각한 기아라고만 생각했다. 따라서 내 마음은 바로 극단적인 사례, 즉 사회적 탈락자-부랑자, 걸인, 범죄자, 매춘부-에게 향해졌다. 그런 사람들은 '하층 사람들 중에서도 최하층 사람들'이고, 내가 접하고자 생각한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당시 내가 마음 밑바닥에서 바란 것은 꽉 짜여진 사회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길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 머리나 마음으로 아무리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몸으로는 편안한 생활을 버리고 그런 길을 택한다는게 쉬운 일이 아닌데 대단하네요..
      전 위에도 썼지만 그게 겨우 체험일 뿐이더라도 두려울것 같은데 말이죠...
    • 3) 그가 왜 파리로 갔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상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은 그냥 파리에 도착한 데서부터 시작하고, [위건 부두로 가는 길] 2부에도 파리생활에 관한 언급은 없지요),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프랑스어판 서문에 보면 런던에서보다 값싼 생활비로 버티며 소설을 쓰고 프랑스어도 배우기 위해 파리로 갔다는 간단한 설명이 있대요.
      당시 영미의 작가들(예컨대 헤밍웨이, 조이스, 베케트 등)이 파리에 많이 머물고 있었지만, 오웰이 그들을 동경해서 파리로 간 건 아니고 당시 환율로 인해 런던에 비해 파리가 생활비가 덜 들었다고 합니다. 오웰이 거기 가서 문학모임에 참여했다는 얘기는 없습니다. <고래 뱃속에서>란 그의 글에 묘사된 당시의 파리.
      "호경기가 계속되던 몇 년 동안, 달러가 충분하고 프랑의 교환 가치가 상대적으로 낮을 때, 예전에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온갖 예술가, 작가, 학생, 아마추어 애호가, 구경꾼, 난봉꾼, 놈팡이들이 파리에 떼로 몰려들었다. 그 도시의 어떤 구역에는 생산 인구보다 예술가들이 더 많았다."
      소설 [버마시절]의 여주인공(? 하여간 주요인물)의 과거 설명에도 이런 분위기가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 흔히들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오블리스 노블리제라는 사회적인 의무 같은걸 요구하잖아요.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요구해야할 무언가가 있을까요? 제가 10여년도 전에 누군가에게 받았던 질문이었는데.. 질문을 받을 당시에는 "무슨 헛소리야.."라는 생각이었고.. 그 이후로 오랫동안은 가난한 사람들은 생존 그 자체만으로 그들에게 주어진 몫을 다하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지금도 여전히 비슷하게 생각합니다만... 한편으로는 이 책에서 자선이나 무료 숙식 제공 시설을 대하는 노숙인들의 태도를 볼때도 그렇고.. 이쪽도 마음에 드는것만은 아닌게 사실이에요. 지난번 서울역 노숙자 숙소 문제에서도 이런 식의 시선을 드러낸 분이 없지 않았다고 느꼈는데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문득 박정희 시대.. 그러니까 노숙자들은 싹 잡아 가두었던 그런 시대에 노숙할 처지가 된 사람들은 어떻게 헤쳐나갔을까 궁금하기도 하구요. 아프리카 구조 활등을 하는 분들의 글을 읽어봐도 무조건 적인 자선은 피하는게 현실인것 같거든요. 그런 자선은 원하는 만큼 무한정 제공할 자원이 없으니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도 하고 기존의 그곳의 경제 체계를 오히려 무너트려서 다시는 홀로서지 못하도록 만들기도 한다구요... 그래도 의식주만큼은 어떤 상황에서도 그냥 제공하는게 우리가 나아가야할 방향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한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이 책이 쓰인 1930년대 영국에서는 공공장소에서의 노숙이 불법이라 경찰들이 와서 계속 쫒아내고 잡아가고 하는 장면들을 보니까, 지하철역사나 공원벤치 등에서의 숙박이 용인된다는 게 참 큰 거구나 싶었어요. 상대적으로 우리나라는 그런 부분에 관대한 편인 것도 같구요. G20 같은 행사 하나 생기면 단속 심해지겠지만...그런데 서초구 같은 강남 쪽에서는 단속이 더 심할까요? 노숙인에 대한 민원 같은 게 더 많이 들어올 것 같기도 한데 한밤에 그쪽 지하철역사나 공원 등엘 안 가봐서 잘 모르겠네요.

      레옴님의 질문과 핀트가 안 맞는 대답일텐데, 일단 적어보자면요, 저는 정말 방치된 아이들, 부모가 없거나 있더라도 학대에 노출되었거나 보살핌을 받을 수 없는 그런 아이들은 대체 어디에 마음을 기대고 살아야 하나, 혹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나가야 하나라는 질문을 최근에 어떤 분께 한 적이 있는데요, 그 분이 기독교신자여서 그랬던지 종교기관의 멘토링을 얘기하시더라구요. 아무래도 종교시설들이 심리학 전공자들, 공무원 등과 연계해서 그런 아이들을 지지해주고 돌봐주어야 하지 않겠냐는, 굉장히 이상적인 얘기를 하시길래 제가 "아, 제가 떠나온 지역엔 '불신지옥' 외치는 교회에서 운영하는 지역아동센터가 있다"고 했죠. 보살핌의 댓가로 전도를 받아야한다면 정말이지 엿같을 거라는 게 제 생각이에요. 이 책 26장에도 잘 묘사되었듯이, '그들이 굴욕감을 주려는 의도없이 좋은 마음에서 주는 것이 확실하고, 그래서 공정하자면 고맙게 여겨야 하겠지만, 실제로는 하나도 고맙지 않'겠지요. 조지 오웰도 이 체험 후에 자신이 바뀐 점들을 꼽으며 자기는 앞으로 구세군엔 기부하지 않겠노라고 하는데, 저 역시 종교적이든 혹은 생활갱생이든 간에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그들을 돕는 것에는 반대입장이에요.
    • 아, 그리고 지난번 [위건 부두로 가는 길]과 연관해서 링크하고 싶은 글이 있어서요, 시간이 좀 늦긴 했지만 적어볼께요. 다음은 한겨레출판사에서 나온 [위건 부두로 가는 길] 156-157쪽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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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에 대한 노동계급의 태도가 얼마나 다른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것과 얼마나 다르며 훨씬 더 건전한가! 노동 계급은 누가 배웠다고 하면 은근히 존경하곤 하지만, ‘교육’이 자신들의 삶에 손을 뻗치면 건강한 본능으로 그것을 간파하여 거부해버린다. 한때 나는 열네 살 소년들이 배울 기회를 박탈당하고 반강제로 가망없는 일을 하기 시작한다는 상상을 하며 한탄을 하곤 했다. 열네 살 나이에 운명적인 일자리를 부여받는다는 사실은 내가 보기엔 끔찍한 일이었다. 물론 이제는 나도 학교 떠날 날을 애타게 기다리지 않는 노동 계급 소년이 천에 하나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그들은 역사니 지리니 하는 웃기고 쓸데없는 것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진짜 일을 배우기를 바란다. 노동 계급이 보기에 어른이 다 되도록 학교에 남아 있다는 것은 한심하고 사내답지 못한 일이다. 집에 매주 1파운드는 갖다줘야 할 열여덟 살 다 큰 사나이가 우스꽝스러운 제복을 입고 학교에 나갈뿐더러 숙제를 안 했다고 지팡이로 얻어맞기까지 하다니! 열여덟 살 노동 계급 청년이 지팡이로 얻어맞는 걸 자신에게 허락한다는 상상을 해보라! 학교에 있는 또래는 아직 어린애지만 그는 어른이다. 새무얼 버틀러의 [모든 목숨의 길]에서 어니스트 폰티펙스는 진짜 인생을 몇 번 슬쩍 들여다본 뒤 자기가 받은 사립학교와 대학에서의 교육을 돌이켜보고는 그게 얼마나 “병적이고 무기력하고 방탕한” 것인지 알게 된다. 노동 계급의 시각으로 보면 중산층의 삶은 병적이고 무기력한 데가 많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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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번 모임에서 이 책을 읽고난 후에 트윗을 통해 하늘타리 블로그의 다음 글을 보게 되었는데, 위에 발췌한 부분이 떠올랐어요. "교육 불평등의 감소는 반드시 좋은 것인가"라는 글입니다. http://skytary.tistory.com/16
      같이 생각해보고 싶어서 전문 가져왔습니다.

      교육 불평등의 감소가 반드시 좋은 것인가에 대한 생각.

      1. 교육 불평등은 개인의 교육 수준에 대한 부모 배경(직업, 소득, 교육 등)의 영향이라 정의된다. 배운 집, 있는 집 자식이 그렇지 않는 집 자식들보다 더 많이 배우게 되는 게 교육 불평등의 개념.

      2. 교육 불평등에 대한 지배적인 경험적 증거는 대중 교육의 확산으로 중하층 아이들이 교육 제도에 편입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교육 불평등은 사라지기는 커녕 감소하지도 않았다는 것 (Shavit & Blossfeld 1993, persistent inequality 테제). 이는 최근 더 업데이트된 자료와 더 정교한 방법론을 통해 실은 불평등이 감소했다는 결과를 보여준 연구에 의해 반박되었음 (Breen et al. 2009; non-persistent inequality, AJS).

      3. 많은 이론들이 왜 교육 불평등이 감소되거나 사라지지 않고 유지되는가, 다른 말로하면 왜 계속 교육을 통해서 계급 재생산이 되는가에 대해 설명을 제공. 대부분의 교육 불평등 이론은 대중 교육 확산으로 인해 이전에는 교육 시스템에서 배제되어 있던 하층 계급 아이들도 교육을 받게 되면서, 상층 계급 부모/아이들의 다양한 차별화 전략과 메커니즘을 통해 불평등이 유지된다는 점에 방점을 두어 왔음. 이는 대체로 불평등은 나쁜 거라는 규범적 지향과도 잘 맞아 떨어짐 (부르디외의 문화 자본/계급 재생산 이론, MMI, EMI 다 같은 맥락에서 이해 가능).

      4. 하지만 이들 시각은 하층 계급 부모/아이들의 적극적 전략의 측면은 고려하지 않았다는 문제점을 가짐. 이 지점을 포착한 이론은 아마 디마지오가 문화 자본이 계급 재생산이 아니라 역으로 계급 이동을 위한 자원으로도 활용될 수 있다고 본 테제(DiMaggio 1982)와 브린-골드소프의 상대적 위험 회피 이론(RRA; Breen & Goldthorpe 1997) 정도가 아닐까 싶음.

      5. RRA 이론의 요는 사람들이 무조건 최대 소득/효용을 얻기 위해 교육 투자를 하는 게 아니라 자기 현 계급 지위에서 떨어지지 않을만큼 투자한다는 것. 즉, 효용 극대화가 아니라 위험 회피가 교육 투자의 핵심 원리이고, 따라서 하층 계급이 단지 돈이 없어 상류층에 비해 자식 교육을 덜 시키는 게 아니라, 그 부분을 배제하더라도 더 교육을 시키려는 유인을 덜 가지기 때문에 안 시킨다는 것. 이게 맞다면 교육 불평등의 유지는 상류층의 일방적인 구별짓기 전략의 결과만이 아니라 하층계급의 합리적 선택의 결과기도 함.

      6. 교육 불평등이 감소한다면 그건 어떤 조건에서 가능한 것일까.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현재 떠오른 이론들 중에서 동원 가능한 스토리들을 적어보자면,

      - 문화 자본이 꼭 교육 시스템을 통한 계급 재생산 뿐만이 아니라 역으로 계급 이동의 모티브가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 (DiMaggio 1982). 하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적 수준에서 개인 행위의 자율성의 공간이 있다는 정도지 거시적으로 교육 불평등 감소를 설명하기에는 부족.

      - 조건의 불평등 즉 부모들 간의 경제사회적, 계급 간 불평등이 줄어들면 교육 불평등도 줄어들 것. 스웨덴과 네덜란드가 그 대표적인 예 (Breen & Jonsson 2005). 덴마크 동료가 덴마크도 그렇다고 우기고 있음.

      - MMI (Maximally Maintained Inequality; 최대한으로 유지되는 불평등) 테제 (Raftery & Hout 1993). 상층 계급의 진학률이 포화상태에 이르러야 교육 팽창이 불평등 감소를 가져올 수 있게 됨. 루카스에게 내용적으로 (EMI; Lucas 2001) 그리고 논리적으로 (Lucas 2009) 모두 비판당함.

      7. 위의 기존 이론들의 설명 외에 RRA 이론으로부터 도출해 낼 수 있는 설명이 있는데 한번 들어보시라. 일단 중하층 계급 자녀들은 상대적으로 교육 과정의 비용과 불확실성을 감수하고 상층 계급이 되어야 할 동기가 상층 계급 자녀들보다 약하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그런 위험을 감수하는 대신 안정적인 경제적 지위가 보장되기만 한다면 계속 교육을 받는 것보다는 노동시장을 택하는 쪽을 선호한다 (이게 RRA의 핵심적 스토리). 그런데 만일 (1) 더 이상 고등교육을 받지 않고는 부모의 계급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던가 (학력 인플레), (2) 부모 계급 (예를 들면 비숙련 노동자)이 더 이상 안정적으로 먹고 살 수 있는 시대가 아니게 되었다던가 한다면? 하층 계급 자녀들은 직업 교육이나 노동시장 진출을 선택하는 대신 진학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되고 그 결과는 교육 불평등의 감소로 나타날 것이다. 반면 (1)과 (2)가 없는 조건이라면 하층 계급 자녀들은 그들의 합리적 선택에 따라 기꺼이 교육을 덜 받는 쪽을 선택할 확률이 높아진다.

      8. 국가 간 비교 관점에서 보면, 미국과 같이 교육 수준에 따른 노동시장 성과의 차이가 매우 크고 사회적 안전망이 부실한 곳에서는 하층 계급 자녀들이 RRA를 하고 싶어도 울며 겨자먹기로 대학을 갈 수밖에 없고 적어도 대학 진학의 측면에서 보면 불평등이 작게 나타날 수 있는 반면, 독일과 같이 직업 교육이 공고하고 그에 따라 하층 계급의 경우도 경제적 안전망이 튼실한 경우 오히려 RRA의 결과로 교육 불평등이 크게 나타날 수 있음.

      9. 통시적 관점에서 보면, 노조, 복지국가의 약화, 노동 유연성의 강화 및 제조업 쇠락과 서비스업의 성장 등의 전지구적 스케일의 노동시장의 구조적 변화가 국가마다 교육 불평등의 감소라는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음. 이런 구조적 변화의 영향이 큰 사회일수록 (예를 들어 영미식의 자유주의적 체제 국가들) 교육 불평등이 감소할 가능성이 높다.

      10. 하지만 관찰되는 현상은 그리 단순하지는 않을 듯. 왜냐하면 가정의 경제적 조건의 불평등이 교육 불평등을 유지시키는 메커니즘도 함께 상존하기 때문. 두 상반되는 메커니즘이 어떻게 상호작용하고 나타나는가에 따라 교육 불평등은 감소할 수도, 증가할 수도 있을 듯. 이 부분에 대한 이론적 정교화 및 경험적 연구가 요망.

      11. 그럼에도 불구하고, RRA 이론의 적용은 결코 간과하기 어려운 중요한 문제를 던져 줌. 즉, 교육 불평등의 감소는 늘 바람직한 것인가, 그리고 늘 규범적으로 지향되어야 할 것인가.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 하지만 이에 대해 생각할 때 반드시 같이 생각해야 할 명제가 하나 있는데, 교육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지위 획득을 위한 수단이란 점. 만일 교육 불평등의 감소(O -> E의 감소)가 사회 재생산의 감소 혹은 사회 유동성의 증가(O -> D의 감소)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러한 교육 불평등의 감소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이고 그것을 어떻게 정책적으로 접근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진지하게 있어야 할 듯.

      12. 한국의 80% 대학 진학이 왜 기회의 균등 및 사회 이동의 증가로 이어지지 않는가에 대한 문제 의식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할 듯. 어려운 문제.
    • 한손엔 빵을 다른 한손엔 성경책을 든 사람들은 저도 싫긴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없는것 보다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시설이라고 만들어 놓고 사실은 착취하거나 학대하거나 사이비 종교이거나.. 하는게 아닌 이상.. 종교라는 팔것이라도 있으면 팔고 밥한끼라도 먿어먹는 쪽이 낫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랄까요.. 종교가 사실 참 무서운건데.. 제가 오히려 종교를 하찮게 여겨서 대충 믿는 척했다가 필요 없으면 헌신짝 처럼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해서 쉽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나마라도 없다면... 정말로 그런 욕심 없이 순수하게 이타적인 마음으로 돕는 사람 또는 기관이라거나 공적인 영역에서 해결해야하는데.. 물론 공적인 영역에서 해결하는게 가장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생각은 되지만 당장 불가능하다면 천원씩이라도 나누어주는 교회가 필요악 정도는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거든요..

      오웰이 말한것 같은.. 스스로의 생활과 자립을 위한 약간의 노동을 제공하는 형태의 노숙자 쉼터 같은곳은 얼마나 유효할까요.. 실제로 이런 노숙자 쉼터가 몇군데 있는것 같긴하던데요.. 박원순 서울 시장님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으신지도 궁금하네요.
      • 박원순 시장님은 마을공동체 복원 같은 구상을 하고 계실런지도 모르죠. 근데 그런 게 뭔지도 모르겠어요, 이젠.

        조지 오웰은 우익도 싫어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좌익도 싫어했고 특히 [위건 부두로 가는 길] 같은 데선 사회주의자들에게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비판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가령 '환상에서 깨어난 중류 계층의 소년이자 전직 제국주의자 경찰관의 하잘것없는 삶으로 독자를 오도한다'는 식으로요.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도 빈곤의 근본 원인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결론으로 제시하지 않았다고, 즉 개량적 자유주의에 그쳤다고, 소시민적 감상에 불과하다는 식의 비판도 받아왔다는데, 저는 근본적인 대책은 아닐지라도 그가 책 말미에 제시한, 스스로의 먹거리를 재배하는 구빈원 얘기는 좋았어요.
        • 개량적 자유주의나 소시민적 감상이라.. ㅜㅡㅜ 제가 딱 그정도 인식을 가지고 있어서 오웰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번 위건 부두로 가는길도 그렇고 진보나 사회주의자들에게 하는 비판들도 참 공감이갔거든요..
    • 아 얼마전에 저도 링크해주신 블로그의 글을 보았어요. 의미심장한 이야기인것 같아요. 그만큼 우리 사회의 불균형이 심하다는 일종의 증거겠죠.. FTA 이후의 세상은 또 어떻게 달라질지...
    • 다음 책은 조지 오웰의 [버마 시절]로 하고 싶어서 첫 댓글 달았는데요, 혹시 다른 책으로 하고 싶은 분(누구라도요) 계시다면 쪽지주세요. 감안해서 목요일에 공지 올릴께요.
    • 경찰학원이 아니라 경찰전문학교입니다. 2년제 전문대학같은 곳이죠. (우리식으로 비교한다면)
      오웰은 이튼에 제학할 당시에는 학업에 그닥 신경쓰지 않아서 성적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는데 - 예비학교 시절의 우수한 성적을 생각한다면 - 제국을 관리하는 경찰학교로 지망한거 보면 나름 가업을 이을 생각이 컸던것 같습니다.

      그리고 올려주신 노동계급의 중산층 교육에 대한 생각에는 오웰 자신의 체험도 들어있는것 같네요. 오웰의 이튼 동기들이 옥스브리지에서 학점을 따기위해 수업을 듣고 리포트를 쓰느라 도서관을 전전할때 오웰은 경찰이 되어 버마지역의 500명에 달하는 수하 경관들을 지휘하고 있었으니까요.-_-;;

      오웰의 승진이 빨랐던데는 그의 뛰어난 어학실력을 생각하지 않을수 없네요. 오웰은 인도와 버마의 지역언어에 능통했고 의외로 수백명을 관할하는 관료조직을 움직이는데도 능숙한 면이 있었습니다. 요컨데 제국경찰 시절의 근무 실적도 나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맘 속에선 천불이 일지는 몰라도 워낙 일을 잘하는 사람이었다고나 할까.

      참고로 일제강점기 조선 총독부의 관리들도 승진 시험의 주요 과목이 '조선어'였습니다. 한국어 실력이 뛰어날수록 승진이 빨랐죠. 드라마에 나오는 한국어에 익숙한 일본 경찰들이 모두 '사실'이었더라구요.-_-;;
    • 예, 경찰학교네요. Bigcat님 감사합니다.:-) 부연설명하자면 총독부 시험 준비반을 거쳐 시험에 합격한 후, 버마의 경찰학교에서 연수를 받았다고 해요.

      오웰이 1921년 12월(열여덟살) 이튼을 졸업할 무렵 그의 가족이 살던 지역은 오웰 집안처럼 인도에서 돌아온 공무원 가족이 은퇴한 후 함께 모여 사는 곳이어서 인도 총독부 시험에 대비하는 학교도 있었대요. 오웰은 그곳에서 6개월간 공부해서 시험을 치렀구요. 당시 총독부 시험은 경쟁이 치열했대요. 그 수준은 지금 영국의 고등학교 졸업시험의 보통 레벨에 가까웠으나, 우리나라의 수능 시험과는 달리 1주일에 걸쳐 치르는 주관식 시험이었다고요. 예컨대 역사 문제로 "만일 넬슨이 트라팔가 해전에서 패배했다면?" 등이 출제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오웰은 마지막 시험까지 남은 27명 가운데 7등이었으나, 마지막 승마 시험 성적이 나빠 합격자 23명 중에서 21등으로 1922년 10월에 인도 총독부 경찰 간부 후보로 채용되었어요. 그는 정식 간부가 되기 전, 버마 랭군에서 기차를 타고 16시간쯤 북쪽으로 가면 나오는 만달레이의 경찰학교에 입학해 10개월간 연수를 받았습니다. 이 경찰학교의 수업내용은 법률, 미얀마어, 힌두스탄어였는데, Bigcat님께서 말씀해주신대로 오웰은 미얀마어를 완벽에 가깝게 구사하였다고 해요. 나중에 프랑스어도 그렇게 수월하게 익혔고 남 가르칠 정도로 잘 했으며, 스페인 내전 참전 당시에는 카탈로니아어를 빠르게 익혀 진급도 빨랐다고 하던데, 어학에 분명 소질이 있었나 봅니다.(박홍규 <조지 오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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