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 번) 영화화하고 싶은 일본 소설

얼마 전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한 일본 소설을 접하게 됐는데, 이게 길이는 짧아도 생각보다 재미가 있어서 저도 모르게 영화화된 모습을 떠올리며 읽었습니다. 카지야마 도시유키의 <이조 잔영> 이라는 작품인데, 1940년대 경성을 배경으로 일본인 화가와 조선인 기생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예요. 작품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얘기하자면

 

노구찌라는 일본인은 이십 대 중반으로, 일본인이라고는 해도 조선에서 태어나 부모님과 함께 쭉 조선에서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군인이었던 아버지는 전역한 뒤 아내와 여관을 운영중이고, 노구찌는 아버지에 의해 군인이 될 뻔 했지만 근시로 인해 군대는 못 들어가고 원하는 대로 그림을 그리고 중학교 미술 교사로 사는 사람이죠. 그에게 있어 사실 조선은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이고, 조선에게 얼마간 동정적인 혹은 호의적인 감정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본인이기에 조선인들은 그가 품는 호의만큼 노구찌를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아서, 때때로 이방인이 된 듯한 감정도 느끼고 그럽니다.

 

어느 날 주막에 갔다가 우연히 알게 된 세브란스 의전 소속  의사의 소개로 그는 홍몽관이라는 고급 요정에 가게 됩니다. 거기서 김영순이라는 이름을 가진 기생을 만나는데, 이 기생은 술을 따르고 몸을 파는 창기가 아니라 궁중 무용을 제대로 전수받은 무희지요. 홍몽관에서 노구찌는 김영순의 춘앵무를 보고 첫눈에 반하는데, 이 감정은 사실 연애라기보다는 아름다운 존재를 보고 느끼는 예술적 영감에 가까워 보입니다. 집에 돌아와서도 노구찌는 김영순의 춤을 잊지 못하고 매일매일 월급을 탕진해가며-_- 홍몽관에 드나듭니다. 혼자 가서 사오십 분을 기다려 김영순의 춤을 보고 춤을 마친 영순이 나가버리면 또 그 다음날 또 찾아가고 그러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는 영순을 꼭 그려보고 싶다는 결심을 하게 되고, 어느 날 영순에게 잠시 춤을 멈추고 모델 얘기도 할 겸 술을 따라달라고 하지만 영순은 화를 내며 자기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며 나가버리고 춤도 못 보고 돈만 쓰고 황망하게; 돌아옵니다.

 

다행히 노구찌를 홍몽관에 데리고 갔던 조선인 의사의 소개로 그는 간신히 영순에게서, 크로키 정도는 그려도 된다는 허락을 받습니다. 이것도 감지덕지. 노구찌는 조선인 의사와 함께 열심히 홍몽관에 드나들며 크로키를 그리고 그걸 바탕으로 습작을 하나 완성해서 영순의 집으로 찾아가죠. 영순은 대낮에 여염집으로 찾아온 일본인 남성을 무척이나 불쾌해하고, 노구찌는 죄지은 사람마냥 그림만 간신히 건네고 돌아섭니다. 하지만 그림을 보고 마음이 풀어진 영순은 정식으로 유화의 모델이 되겠다고 말합니다만, 원래 궁중 무용은 요정의 온돌방이 아닌 진짜 궁궐에서 춰야만 가치가 있다고 합니다. 처음에 그녀가 조건으로 내건 곳은 경회루. 하지만 경회루는 총독부 관저 근처에 있는 곳이라 어렵고 대신에 덕수궁에서 작업을 하기로 합의를 보죠. 여름에 비가 올 동안은 덕수궁에서 그림을 그리기 어려우므로 때때로 영순은 노구찌의 아틀리에에 찾아옵니다. 노구찌가 느끼기에 영순은 일본어 실력이 유창하지만 일부러 길게 말하려고 하지 않는, 일본에 대한 적대감이 꽤 큰 여성입니다. 그래서 이럭저럭 좀 친해져 간다......싶더니, 어느 날 아틀리에에 있던 노구찌의 아버지가 찍은 사진을 보고 영순은 화를 내며 나가버립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는 노구찌를 만나주지 않아요.

 

영문을 알 수 없는 노구찌는 백방으로 그녀와 연락을 취해보고자 애쓰지만 좀처럼 되지 않습니다. 그는 혹시 아버지의 사진에 문제가 있었나, 하고 아버지에게 사진에 관련해서 묻죠. 그 사진은 노구찌의 아버지가 노구찌의 어머니와 결혼을 앞두고 찍은 약혼 사진으로, 삼일 운동 즈음했을 때 수원 어디선가 찍은 거라고 합니다. 왜 하필 수원인고 하니, 당시 군인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경비대 군인으로 근무했는데 수원에 바로 경비대가 있었다는 거죠. 노구찌는 삼일운동이란 게 뭔지도 잘 몰랐던 젊은 일본인이고, 반쯤 호기심에 조사를 해 보며 충격도 받고 그럽니다. 그러다 알게 된 것이 바로 노구찌의 아버지가 있던 그 경비대는 수원 근처 제암리 학살 사건을 주도했던 군대라는 사실. 뭔가 짚이는 게 있는 노구찌가 총독부를 사칭해서 알아 본 결과, 짐작대로 김영순의 고향은 제암리였던 겁니다. 이후로 노구찌는 김영순의 마음을 돌리려는 계획을 단념한 채 전람회에 그림을 출품, 특선 1등을 차지합니다.

 

그림의 제목은 <이조 잔영>. 그리고 출품날을 전후로 하여 태평양 전쟁이 터지죠. 이 와중에 노구찌의 그림은 조선 기생을 그렸다는 일차 이유, 그리고 '이조'를 언급한 제목이 문제라는 이차 이유로 인하여 수업하다 말고 헌병대에 끌려갑니다. 조사를 받던 도중 그가 가지고 있던 삼일운동 관련 자료로 인해 마구 폭행당하고 유치장에 갇히게 된 노구찌. 기생을 그렸다는 건 문제였지만 손목 한 번 잡아 본 적 없다고 결백(...?)을 증명하여 이건 그럭저럭 넘어갑니다만, 제목은 빼도박도 못하죠. 그는 헌병으로부터 제목을 바꿀 것을 종용받지만 거부당하고, 또 얻어맞고, 또 갇혔다가, 다음 날 좀 나은 대접을 받습니다. 노구찌의 아버지가 군인이었다는 이유로요. 의아해하는 노구찌에게, 헌병대 대장은 부드러운 어조로 이야기합니다. 당신 아버지가 당시 경비대에서 높은 직위에 있던 군인이었고 제암리 사건을 주도하여 공을 세웠다는 사실을. 충격을 받은 노구찌는 끝끝내 <이조 잔영>이라는 그림의 제목을 고수하고 대장에게 얻어맞으며 쓰러집니다. 쓰러지며 그는 자기의 눈앞에 영순의 모습이 희미하게 사라져가는 걸 느끼며 작품은 끝을 맺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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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보니 저만 재밌게 읽은 걸 너무 길게 썼나 싶기도 한데, 이게 영화로 만들면 어쩐지 재밌을 것 같은 거예요. 맑은 이마와 높은 콧대를 가진 도도하고 우수어린 조선인 무기(舞妓)과 풋내기 일본인 청년과의 모습이 눈에 그려지고, 자국인도 그렇다고 타국인도 아닌 기이한 애정을 갖고 그려질 고궁과 주막과 종로의 모습도 재현하면 재밌을 것 같고, 과거에 대해서는 전연  알지 못했던 점령국 청년이 충격에 서서히 빠지는 모습도 흥미롭고요. 연애 감정도 범상한 마음도 아닌 두 사람의 은근한 분위기도 그려내면 재밌겠고, 화가와 모델이라는 섹슈얼한 구도도 관심이 가구요. 내가 시나리오 작가라면 한번 각색해 볼 텐데! 라는 마음이 저절로 들더군요. 그래서 듀게에라도 이 얘기 해보면 좋겠다- 라고 룰루랄라 인터넷을 열었더니 글쎄

 

이미 영화화가 된 적 있네요. 그것도 1967년에 신상옥 감독이. OTL 오영일과 문희 주연에 무려 이순재도 출연......영화는 소설에서 더 나아가 노구찌가 징용열차 안에서 영순과의 일을 회상한다는 내용도 덧붙여 각색되었군요. 저는 왜 몰랐을까요 T_T 그렇죠, 세상 하늘 아래 내가 생각한 건 이미 남이 다 해 놓은 거였어요...... 

    • 그렇더군요 다 남이 해본거더군요 그런데 아닐걸요 내맘과 똑 같을 수는 없잖아요.
    •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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