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수창 1승을 기념하는 세 개의 움짤



1.심수창 선수가 786일만에 승리투수가 되었습니다. 승리를 챙기지 못하는 동안 18연패를 이어갔죠. 투수라는 포지션이 그렇습니다. 잘해도 패전을 먹을 수 있고, 못해도 승리를 챙길 수 있습니다. 어떤 선수가 18연패를 기록했다는 것에서 두 가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첫 번째는 그 투수가 지지리도 운이 없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 투수가 꽤나 실력이 좋은 선수라는 점입니다. 만약 정말 공을 못던지는 실력이 형편없는 투수가 있다면, 그는 절대 18연패를 기록할 수 없습니다. 최소한 프로야구에서는요. 메이져리그였다면 진작에 마이너로 강등이 되었을 것이고, 우리나라 야구라고 해도 그런 선수는 2군에서 선수생명을 이어가거나 팀 사정에 따라 방출이 되거나 하지 결코 18번이나 패전을 기록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할 겁니다. 심수창 선수는 786일동안 패전투수가 되거나 노디시전을 기록하거나 승패와 관계없는 중간계투 보직을 소화하거나 했지만, 항상 자신의 공을 던져왔습니다. 그러니까 18번 지고도 그 다음에 승리투수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거죠. 오늘 피칭 내용에서 보았을 때에도 비록 여러번 주자를 출루시키고 적지 않은 실점 기회를 맞았지만, 볼넷을 줄이고 공격적인 피칭을 했기 때문에 승리투수의 요건을 갖출 수 있었다고 봅니다. 6과 1/3이닝을 소화하면서 92개의 투구수를 기록한 것은 나름 경제적인 투구 내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난 일요일 문성현 선수의 경기도 그렇고 일단 볼넷을 적게 주니 야구 볼맛이 납니다. 넥센 투수들이 지닌 최악의 습성이 볼넷이 많다는거였는데 적응이 잘 안되기도 하면서도 이제야 좀 야구다운 야구를 하는구나 싶어요.





2. H2는 야구만화를 가장한 연애만화입니다만, 그래도 야구 오타쿠들이 좋아할만한 요소가 꽤 있죠. 제 입장에서 그런 잔재미를 많이 느낄 수 있었던 부분이 노다와 베터리를 이룬 투수들간의 대화였습니다. 주로 노다와 히로의 대화에서 그런 잔재미들이 많았지만, 저는 키네 빠돌이라서 노다와 키네의 대화를 특히 좋아합니다. 투수와 포수가 마운드에 서서 시덥지 않은 얘기를 나누는건데, 경기와 관련된 그 대화들에서 왠지 짠한 내용들이 많습니다. 슬라이더 사인이었어. 휘질 않은 거야. 너야말로 왜 미트를 움직이지 않은건데? 아마도 휘지 않을거 같았거든. 뭐 그런 것들이요. 만화니까 그런거지라며 생각해 보아도, 뭔가 간지가 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정우영 캐스터가 신기한 장면이 카메라에 잡혔다고 말했을 때 저런 장면이 잡혔을거라곤 생각도 못했습니다. 투수코치는 호투를 한 투수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그 투수의 공을 넘겨 받습니다. 여기까지는 매경기마다 볼 수 있는 장면이죠. 그런데 그 다음 코치는 마운드를 내려가려던 투수에게 뭐라고 말하더니 넘겨받았던 공을 도로 던져줍니다. 투수코치와 투수가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지는 상황에 비추어 봤을 때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대화의 구체적인 내용은 열혈버전, 개그버전, 심심한 버전등 여러가지 장르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마운드 근처에 공을 받으러 온 3루수가 웃으며 내려가는 투수와 하이파이브하는 장면에서 사실 대화의 내용은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 제가 저런 장면을, 슈퍼스타 감사용 같은 영화나, H2 같은 만화에서 봤더라면, 유치하긴,이라고 생각하며 피식 웃어넘겼을 겁니다. 저는 일관된 사람이라 저 장면을 보면서도 유치하긴,이라고 말하긴 했습니다. 그래도 제 눈가가 순간적으로 뜨거워졌던건, 저 장면이 만화나 영화가 아닌, 치열할 승부가 벌어지는 실제 현장에서 나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3. 제 생각에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마무리 투수는 오승환 선수나 정대현 선수 입니다. 그 이유는 오승환 선수나 정대현 선수가 던지는 공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경기를 마무리 짓기에 적합하기도 하지만, 오승환이나 정대현의 성격이 마무리라는 보직에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위기에 몰리든 삼진으로 상대방을 압도하든, 마운드에 선 오승환 선수의 표정에서는 그의 감정을 읽을 수 없습니다.(오승환, 정대현 선수 모두 마운드 밖에서의 표정에서도 그들의 감정을 읽기 어렵긴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그들의 모습에서 그 팀의 야수들과 팬들은 한없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거죠. 오승환 선수의 경우 경기를 마무리 지은 뒤 진갑용 포수와 함께 손벽을 마주치고 하늘로 손가락을 올리는 세레모니 만으로도 마무리의 간지는 확실하게 느껴집니다. 카타르시스가 몰려오죠.


그런 의미에서 손승락은 조금 불안해 보일 정도로 감정의 변화가 표정에 잘 드러납니다. 삼진을 잡으면 펄쩍 뛸 정도로 좋아하기도 하지만, 위기에 몰리면 당황한 기색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기도 하죠. 하지만 오늘과 같은 상황에서 손승락의 행동들은, 뭐랄까 투구 내용 이상의 감동을 전해주는 바가 있습니다. 칠테면 쳐보라는 표정과 기세로 공을 던지는데, 정말로 상대 타자가 그 공을 쳐서 블론세이브 상황에 몰리면 억장이 무너지기도 하지만, 오늘처럼 상대방을 제압하고 동료의 승리를 지켜내는 날이면, 손승락이 던진 공보다도 그의 멋진 액션과 포효가 더 강렬한 전율로 팬들에게 기억되는거죠. 심수창을 가리키며 쭉 뻗은 손가락과 넓은 등뒤로 보이는 1이라는 숫자와 손승락이라는 세 글자. 자꾸봐도 질리지가 않네요. 연출된 상황이 아니라 실제 경기의 한 장면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그림입니다. 






이 외에도 제가 움짤은 구하지 못하지만 오늘 경기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습니다. 8회말 원아웃 상황에서 김민우-박병호 선수의 실책성 플레이 이후에 김시진 감독이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장면입니다. 이정훈 선수가 김주찬 선수를 잘 상대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김시진 감독과 대화를 나눈 정민태 코치가 불펜에 전화를 거는 모습을 보고 저는 경악을 금치 못했어죠. "저 아저씨들 진짜로 할 생각이야. 8월 9일날 사직 구장에서 코리안 시리즈를 할 작정이라고" 라고요. 이 팀은 감독도 만화나 영화를 너무 자주 보는 것 같습니다. 리그의 상황상, 롯데와 넥센이 붙었을 때 급한 쪽은 롯데죠. 4강 싸움이 점점 치열해지는 국면이라 한 게임이라도 놓칠 수 없는 상황이고요. 반면 넥센은 꼴찌만 안하면 다행이지만 전력이나 어수선한 팀 분위기상 그 조차 쉽지 않아 보입니다. 경기 내용은 둘째 치고라도, 승리에 대한 열망에서 어느 팀과 붙어도 넥센은 한참 지고 들어가는게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라고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꼴찌할 거 뻔히 알면서 경기를 챙겨보는 제 마음을 알았는지, 감독, 코칭스테프, 선수 할 거 없이 오늘은 이기고야만다라는 자세가 보였습니다. 마치 한국 시리즈 7차전인냥, 한 타자 상대하는데 있는 투수, 내일 쓸 투수 다 때려박고 한 번 해보자라고 덤비는 감독이나, 플레이 하나하나에서 근성과 아쉬움이 묻어나는 선수들을 보면서, 이거 한 경기 이겨도, 선발 투수의 연패 끊어도 뭐 그게 대수라고 그걸 그렇게 열심히 하는지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심해서 눈물이 다 날지경이더라고요. 그렇게 어찌보면 별 거 아닌 일에 목숨거는 그들의 모습이 이 희망도 없는 야구를 보는 제 모습과 마찬가지로 한심해 보였습니다. 아마 저는 이 팀 구단주는 끝까지 좋아하지 못할 겁니다. 그 아저씨가 언제까지 야구판에 있을지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몇 번이고 더 그 때문에 분노하고 그를 증오하겠죠. 그래도 말입니다, 이 팀을 떠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한심할 수가 있냐고요. 내가 이 야구를 포기하지 못하고 보는 것처럼, 딱 그만큼 한심한 야구를 하는 이들을 보면서 이들을 응원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 오늘 롯데팬의 입장으로 경기를 지켜봤지만, 정민태 코치의 정말 만화스러운 공넘기기와 심수창 선수의 인터뷰.
      특히 그 인터뷰 중에서도, 손승락 선수가 심수창 선수에게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승리를 지켜주겠다고 했다던 부분이-
      너무 청춘만화스러워서 가슴벅차더군요.
      롯데가 지는 경기를 지켜봤는데도, 이렇게 뿌듯한 경험은 처음이었습니다.
    • 아... 글 참 좋네요.
      그깟 공놀이... 응원하는 팀이 지면 힘도 빠지고 의욕도 사라지고, 이런거 왜 보나 하다가도,
      저런 장면들 한 번 보면, 끊을 수가 없어요. 하하.
    • 어떤 야구만화보다도 더 만화스러운 경기였어요
      연패를 끊어주겠다는 동료선수들의 의리, 감독의 신뢰, 그에 보답하는 심수창선수의 호투..
      트레이드당하고 박병호 선수와 방에서 우울한 얘기도 많이 했다고 하면서 눈물 글썽였을 때
      그간의 마음고생이 훤히 보여서 가슴이 정말 아프더군요
      최다연패라는 저점을 찍고 반등에 성공한게 너무 대견하고ㅎㅎ 두산팬이지만 앞으로도 계속 응원할 생각입니다
    • 야구 글 보면서 눈물을 글썽이다니...
    • 어제 하루종일 식중독으로 아픈 몸을 이끌고도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더라구요.
      공을 건네주는 장면에서는 정민태코치가 승리의 공이니까 가져가라고 했다고 인터뷰에서 말하더군요.
      그어떤 영화보다 만화보다 찡하더이다...
      심선수 새로운 야구인생 시작하길.
    • 제가 느꼈던 감정을 고스란히, 정확하게 활자화시켜주셔서 왕 감격중입니다.ㅜㅠ
      진짜 직접 보지 않았다면 "뭐 그래, 유치하게" 내지는 "뻥이지?" 이랬을 상황들인데, 실제로 저런 장면이 나올 수도 있구나, 하고 감격했었어요. 진짜 태어나서 첨으로 스포츠보고 울었다니깐요. 월드컵때도 이런적없는데;;

      인터뷰때 심수창선수가 눈물글썽이는거 보니 아, 이 사람이 그동안 진짜 힘들었구나, 음...마음이 참 여린 사람이었어...뭐 이런 생각들이 마구 꼬리를 물고 떠오르고....따라서 자동적으로 눙무리 좔좔....ㅜㅠ

      김시진 감독+정민태 코치 + 손승락 이하 모든 투수들+야수들 진짜로 이게 팀플레이다! 란 걸 보여줬어요. 이래서 야구를 못끊어요.
      진짜 그 볼 넘기기랑 불펜 막 투입은 팀에 합류한지 열흘도 안된 선수에게 간절히 원하는 첫승을 안겨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압축해서 보여준 장면이었어요. 넥센 아니 히어로즈 근사하네요. 이런 게 야구죠.
    • 오랜 LG팬인데, LG에서 이런 장면 많이 못 만들어줘서 미안하네요.
      심수창 선수 웃는거 보는게 대체 얼마만이야..


      ----
      그리고 글이 너무 좋아요.
    • 눈물 나네요. 좋은글 고맙습니다.
    • 1. 심수창의 18연패에는 승리의 기운이 감돌 때 우리가 찬물 끼얹은 적도 많았죠. 선발로 무실점인가 1실점인가 내려갔던 거 뒤집고, 이적 전 마지막 2연패도 우리가 안겼고.. 그래서 그의 이적 소식에 더 마음이 이상했었어요.
      3. 마무리투수로서 불안정한 면이긴 하지만, 그런 파이팅과 격렬한 감정표현이 손승락의 매력인 것 같습니다. :D

      어제 저녁에 정말 할 일이 많았는데 티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심수창 선수와 같이 울었습니다. 떠난 선수들이 다른 유니폼 입고 있는 모습 차마 볼 수가 없어서 아직도 엘지 경기 중계, 하이라이트 방송, 기사 등등은 눈에 걸리기만 해도 급하게 피하고 있는 중이고 이 상태가 아무래도 오래 유지될 거 같지만, 그래도 새 식구들과 그들을 감싸안은 우리 팀이 제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주네요.
      그놈의 구단주는 뭐...... 그 구단주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긴 한가요? 이번 ㅌㄹㅇㄷ(직접적인 단어 언급만으로도 열불이 나서 자음으로 대체하니 보시는 분들의 양해 바랍니다;) 건 터지고나서 이번엔 진짜 이놈의 공놀이 끊을 거라고 마음먹고도 자꾸 중계채널로 가는 손을 막지 못해 짜증났었는데, 그렇게 갈대처럼 흔들리는 제 마음을 우리 팀이 잡아줬네요. 그래, 어디 한 번 끝까지 가보자. 구단주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라는 심정입니다.

게시판 2012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462,406 01-31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147,940 12-31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122,151 04-01
130354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10 187 12-31
130353 아바타 3를 보고 유스포 2 192 12-31
130352 [핵바낭] 올해 잉여질 결산 잡담 14 334 12-31
130351 아바타: 불 과 재 보고 왔어요 짤막 소감 6 228 12-31
130350 [영화강추] '척의 일생' 8 249 12-31
130349 흑백요리사 2 8~10회, 싱어게인 4 탑 4 결정 6 285 12-31
130348 Lacombe Lucien(1974) 7 131 12-31
130347 [관리] 25년도 보고 및 신고 관련 정보. 15 324 12-31
130346 Isiah Whitlock Jr. 1954 - 2025 R.I.P. 2 138 12-31
130345 [왓챠바낭] 우편배달부 말고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잡담입니다 12 267 12-31
130344 [넷플] 말 많고 탈 많은 '대홍수' 드디어 봤습니다 14 453 12-30
130343 [반말주의] 다들 올해 고생 많았어!! 새해 모두 건강하고 복 터지길 바래!! 12 186 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