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얘기에 생각나서

해병대 관련 글을 읽으면서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과 관련된 몇 장면들이 기억이 납니다.

 

대학교 1학년 때 동기였는데 나이는 몇 살 많았고 숫기가 없었습니다.

말주변도, 재치도 없었고 체구는 왜소하고 목소리는 가늘었죠.

말투도 어쩐지 여성스러운 느낌이 있었어요.

 

첫 엠티에서 조를 나누어 게임을 하는데 소위 '블랙홀'이라

그 오빠에게 차례만 돌아가면 흐름이 끊어지고 분위기가 어색해졌던 게 기억이 납니다.

처음에는 그 오빠가 게임을 못해서 흐름이 끊기나보다 했어요.

하지만 그게 아니더군요. 

오빠가 빠지고 게임 못하는 또 다른 사람이 들어왔는데

이번에는 '블랙홀'이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개그 소재가 되어 분위기를 더욱 돋우었거든요.

 

그 사람하고는 인사만 하는 정도의 사이였는데

어쩌다 한 번 밥을 같이 먹은 적이 있습니다.

밥을 먹게 된 계기도, 그 때 했던 얘기도 하나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며칠 뒤, 어떤 선배가 그 장면을 보고 오해를 했는지 남자친구 생겼냐면서 묻더군요.

'어떤 남자랑 둘이서 밥 먹던데?'

'아....'

그 이상의 부정도 변명도 안 했던 것 같아요.

더 이상 담백할 수 없을 정도로 담백하게 밥만 먹고 헤어져서 부정할 필요조차 안 느꼈던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장면은 남자 동기가 당연하다는 투로 내뱉는 장면입니다.

' 감기로 죽은 게 말이 되냐. 당연히 은폐하는 거지.'

남자답게 바뀌고 싶다는 이유로 해병대에 지원한 그 오빠는 군대에서 감기로 죽었다고 합니다.

듣기로는 부모님이 시신을 확인하기도 전에 군대에서 화장을 했다는데

아무리 옛날이고 아무리 해병대라지만  그런 게 가능했을까요?

그 때 소식을 전해주던 남자 동기의 목소리가 묘하게 냉정해서 더 기억에 남아요.

우리는 이 사람에게 정말로 애정이 없었구나.

 

막상 그 때는 별 느낌이 없었고 그 후 몇 년 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 다시 기억이 나더니 점점 더 뚜렷해집니다.

지금의 나라면 게임할 때 느꼈던 그 어색함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텐데.

밥 먹으면서 그 사람에 대해서 더 많이 물어보고 나에 대한 얘기도 더 많이 했을텐데.

'더 남자다워질 필요가 있나요? 나는 지금 이대로 보기 좋은데요'

그 시절 그의 모습을 돌이켜보며 진심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지금의 나라면

그가 이 말을 필요로 했던 순간에 해줄 수 있었을 텐데.

 

시간차를 두고 가능한 일이라면 왜 그 때 가능하지 않았을까요.

 

그 오빠를 생각할 때 꼭 같이 생각나는 사람이 한 사람 더 있습니다.

역시 대학교 동기였는데 동아리 엠티에서 여장을 해보고 싶다고 해서 화장을 했어요.

문제는 그 화장이 너무 잘 어울렸다는 것이죠.

마치 트랜스젠더처럼.

 

갑자기 분위기가 싸하게 식으면서 동아리 선배들이 빨리 화장을 지우라고 하더군요.

제 친구도 '저건 아니다, 야' 라고 말하더군요.

 

뭐, 그 친구가 진짜 그 쪽이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상관 없어요.

도대체 왜 선배들 분위기가 갑자기 싸해졌는지는 지금도 이해가 안 갑니다.

친구 반응으로 미루어 짐작할 뿐이죠.

대학 때 재미 삼아 남자 친구나 남자 선후배들에게 당사자 동의 하에 화장을 해주었는데

나름 흡족해하는 부류부터 화장한 자기 모습을 보고 살짝 기분이 나빠지는 부류까지

다양한 반응이 있었지만 주변 사람이 정색하는 경우는 처음이었습니다.

 

근데 제 눈에는 그게 꽤 예뻐보였거든요.

예쁘다고 해주고 같이 재밌어해줄걸.

그런 생각을 합니다.

화장을 했던 친구한테는 지금 이게 기억도 안 날만큼 사소한 에피소드일 거에요.

그러니까 저는 지금의 그 친구가 아니라 그 때의 그 애한테 미안하다고 얘기하고 싶어요.

그 때 솔직하게 같이 즐거워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요.

 

하지만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지금 와서 미안해하는 것은

그 때의 그들에게도, 지금의 그들에게도 아무 소용이 없지요.

그래서 더 미안하고 아쉽습니다.

지금 가능한 일이라면 그 때 가능했으면 좋았을텐데요.

 

 

 

 

 

 

 

 

 

 

 

 

 

 

 

 

 

 

 

 

 

 

 

 

 

 

 

 

 

 

 

 

    • 무슨 도시괴담같은;;; 군대괴담들이 라니요.... 꽃다운 나이에 피지도 못하고 지는 젊음이 너무 많은 개떡같은 나라에요.
    • 군의문사는 요즘에도 있는걸요. 물론 군대는 부모들이 자기 자식 아까워서 이유가 분명한건데 다른 이유가 있다고 주장한다고 일축하겠지만요.
      그것이 알고 싶다 같은 프로에서 수차례 다루었던 기억입니다. 2007년에도 당시 21구의 시신이 부모들이 의문사를 주장하여 냉동 시신으로 보관중이라며 방송했었어요.
      유명한 김훈 중위 사건을 보세요. 불과 13년 전 일이고 아버지가 무려 3성 장군인데도 엉터리로 자살로 만들어 버렸으니까요. 시간이 흘러 군의문사위원회에서 조사를
      했지만 결국 진상규명불능 처리 되었답니다. 군대가 얼마나 폐쇄적인지 장군 한명으로 육사 동문 몇힘으론 진상 규명이 불가한 동네.
    • 울컥해지는 내용이네요. 안타까운 일이 많은데, 그것들이 오랫동안 고쳐지지 않은 구조의 문제에 기인한다는 사실이 너무 화가 나네요. 김훈 중위 사건은 보면서도... 논리적 사고가 가능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사건이 자살이라고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일인데, '군대이기에', '군대에서의 일이기에' 논리가 그 구조에 무너지고 혼탁해지더군요. 화나요. 정말.
    • 와... 좀 슬프지만 희망이 느껴지는 따뜻한 글이에요.

      성장하셨구나.

      나도 이왕 사는 거 뾰족해지지 말아야지...
    • 글의 곁가지를 건드려서 죄송한데, 남성들에겐 호모포비아가 꽤 강해요. 요즘 인터넷에서 게이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하긴 하지만, 그게 농담일 경우에만 재미가 있는 것이지 그것이 그럴듯해지면 문제는 심각해지죠. 여장을 시켰다가 지우라고 한 이유는 아마 그게 아닐까 싶네요.

게시판 2012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462,405 01-31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147,940 12-31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122,150 04-01
130354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10 187 12-31
130353 아바타 3를 보고 유스포 2 192 12-31
130352 [핵바낭] 올해 잉여질 결산 잡담 14 334 12-31
130351 아바타: 불 과 재 보고 왔어요 짤막 소감 6 228 12-31
130350 [영화강추] '척의 일생' 8 249 12-31
130349 흑백요리사 2 8~10회, 싱어게인 4 탑 4 결정 6 285 12-31
130348 Lacombe Lucien(1974) 7 131 12-31
130347 [관리] 25년도 보고 및 신고 관련 정보. 15 324 12-31
130346 Isiah Whitlock Jr. 1954 - 2025 R.I.P. 2 138 12-31
130345 [왓챠바낭] 우편배달부 말고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잡담입니다 12 267 12-31
130344 [넷플] 말 많고 탈 많은 '대홍수' 드디어 봤습니다 14 453 12-30
130343 [반말주의] 다들 올해 고생 많았어!! 새해 모두 건강하고 복 터지길 바래!! 12 186 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