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옷을 입고 싶어요.


오늘 출근길에 성추행을 당했어요. 


지하철 문이 내리고 내리려는 그 틈을 타서 누군가 재빠르게 엉덩이를 잡았다 놓더군요. 


순간적으로 당황스러움이 밀려왔는데 잡은 것 같은 사람을 딱 잡아서 당신이냐고 딱 물었죠. 


그런데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가리키는 겁니다. 


가리킨 사람을 잡아서 또 물어봤죠. 당신이 방금 나 만졌냐고. 


예? 하면서 물론 아니라고 하죠. (만약 했다고 해도 그렇게 말할 사람이 있을까요.)


출퇴근시간에 아주 붐비는 역이라 에스컬레이터 앞이 병목현상처럼 꽉 막혀있는 상태여서, 그 사람을 가리킨 사람도 근처에 있었어요. 


그 사람한테 이 사람 맞느냐고, 당신이 그러지 않았냐고 하니 하는말이, 보지는 못했다는 겁니다. 


가리킴 당한 사람과 동시에 '못 봤는데 어떻게 알아요?' 라는 말이 튀어나왔어요. 


그 후로 어찌 할 틈도 없이 두 남자가 나란히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더군요. 
지목당한 사람은 황당한 듯 먼저 가는 뒤통수를 쳐다보면서 올라가고요. 


그 상황에서 누구를 쫒아가서 붙잡겠어요. 똥밟았다, 하고 생각하고 그냥 가려고 하는데 
보니까 처음에 잡았던 남자가 저랑 같은 출구로 쭉 나가는데, 왠지 종착지(?)가 같은 것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뒤에서 쳐다보면서 가는데 왠지 절 의식하는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길가면서 자꾸 도로쪽을 쳐다보는 게, 주변시야로 제가 따라오고 있는지 살피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아니나다를까 같은 건물로 들어가더군요...건물 앞에서까지 제가 따라오는지 확인하는것같았어요. 


그 사람은 고층 엘리베이터를 타러 가고 저는 저층을 타야해서 갈 길을 가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가기엔 너무 찜찜한 겁니다. 


고층 엘리베이터쪽으로 가니 아직 엘리베이터를 못 탔더군요. 다시 잡아서 물었어요. 아까 왜 못봤는데 봤다고 했느냐고. 


그랬더니 봤다는 거예요. 자기는 제 왼쪽 뒤에 있어서 봤다고. 


그런데 제가 잡을 때 그 지목당한 남자는 저보다 앞에 있었거든요. 
사람도 많은데 어떻게 절 만지고 앞으로 쭉 가냐고 하니 자세까지 잡아보이면서 그 남자가 제 오른쪽에서 만지고 쓱 돌아서 나갔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아까는 왜 못봤다고 했냐고 하니 자기가 왜 거기 끼어드냐는군요. 
오해 받잖아요. 라고 하니 오해받아도 어쩔 수 없죠. 라고 하는데 도저히 거짓말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정말 차분한 표정과 말투였어요. 


일하려고 자리에 앉아도 도저히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고 혼란스러워서 듀게에 글을 씁니다. 
대체 누구였는지, 그리고 가만히 서있는 사람을 슬쩍 만지면 기분이 좋은건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아요. 


어떻게 앞에 서있는 사람을 하나의 인격체가 아닌 그저 하나의 몸뚱이, 성적 대상으로 인식하는건가요. 
그리고 왜 저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길가다가 졸지에 음식물 쓰레기를 뒤집어 쓴 것처럼 갑자기 쏟아져드는 불쾌감을 감내해야 하는건가요. 
바쁜 순간을 틈타 타인에게 쓰레기를 뿌리고 인파속으로 쓱 사라지면 기분이 좋은가요? 


지하철타고 통학하던 고등학교때부터 지겹게 많이 당해온 성추행입니다. 
처음엔 몸이 얼고 수치스러움이 온 몸을 감싸는 충격이었어요. 
지금은 충격보다는 그 뻔뻔스러움에 분노가 일고, 전철을 탈 때마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네요. 


한점 부끄러움도 없이, 눈이 마주쳐도 아랑곳않고 온 몸을 훑어보는 사람들, 모르는 척 자기 손을 허리나 다리께에 갖다대는 사람들. 진절머리가 납니다. 


이럴바엔 차라리 갑옷을 입고 다니고 싶어요. 아무도 제 몸을 볼 수도 만질수도 없고, 설령 그런다고 해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말입니다. 








    • 어휴 속상하시겠어요.

      게시판이라 욕은 못하겠고 그 몹쓸 손을 구두 뒷굽으로 짓이겨버리고 싶어요.

      살면서 수십명의 변태를 만났지만 전부 다른 장소 다른 사람이었던걸 보면 세상엔 변태 성추행범들이 '더럽게' 많은게 분명해요.
    • 첫번째 지목한 그 놈이 범인이라는데 한 표.
      치한 치고 지목당하면 차분하게 반박 못하는 놈 못봤어요.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자기는 죄없는 사람 표정 잘도 짓더군요.
      별달리 증거가 없다는 걸 잘 알거든요. 그런 놈들은.
      나이가 있는 치한-할아버지-들은 지목하면 자기가 아니라고 화부터 먼저 내고 말이죠.
      (나이나 권위로 누르던가, 겁을 줘서 무마하려 든달까)
      하아..이런걸 세세히 쓸 수 있는 제가 울적해요.어디 걸출한? 할머니 치한이 나타나 그놈들 엉덩이며 뭐며 다 마구 만져서 수치심 좀 느껴보게 해줬음 싶다는 괴상한 상상도 하곤 했죠. 기분 푸세요. 똥 밟았다 치시고요. 아침부터 액땜 참 거합니다 그려.ㅡㅡ;;;
    • 지하철 성추행 대응 방법을 찾아 봤는데 별 뾰족한 수가 없네요.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신고하라는 얘기가 고작인데...
      이렇게 누가 했는지도 애매한 경우도 있으니, 더 어렵겠네요.
      http://micon.miclub.com/board/viewArticle.do?artiNo=79942785&listCateNo=603&listPage=22

      차라리 그때 두 놈다 잡아 놓고 신고 하셨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그것도 주위 사람들이 안도와 주면 물리적으로 어려웠을 것 같고... 이번엔 X 밟은 셈치고 잊어 버리시고 다음에 그런 일이 또 없어야 겠지만 혹시라도 또 그런 재수없는 일이 생긴다면 꼭 응징에 성공하시기를...
    • 갑옷..저도 전철탈때마다 투명한 비닐방울 같은데 한명씩 들어가 있음 좋겠다 생각해요..서로 일정거리 유지할수있게.
      기분푸세요! x2
    • 요즘 경찰들이 사복입고 지하철에서 성추행범을 잡는다던데
      Silencio님이 타시는 라인에도 좀 갔으면 싶군요.
      아무튼 아침 댓바람부터 너무 재수없는 일을 당하셔서 속상하시겠어요.뭐라고 위로를 드려야 기분이 풀리실지...
    • 에스테반, 쇠부엉이, Gillez Warhall, 파랑사과, 듀란듀란박사님/

      감사합니다...많은 분들이 토닥여주셔서 위로가 되네요 정말로.
      듀게 대숲에 털어놓으니 글 쓸때보다 지금은 마음도 많이 가라앉았구요.

      첫번째 사람이 의심스러운건 자명한듯해요.
      처음 말 걸때부터 곧바로 다른 사람을 가리킨 것이나, 길을 갈 때 따라오는지 계속 살핀 것 등...
      (만약 그 사람이 범인이라면 한두번 해본 솜씨가 아닌겁니다. 당황조차도 하지 않는 모습이라니...)

      점심시간에 CCTV를 확인하고 싶어서 지하철역 역무실에 갔었는데
      경찰에 신고하고 대동하고 오지 않으면 어렵다고 하더군요. 흠...

      실은 그 사람이 타고 간 엘리베이터가 서는 층에 있는 계열사(길군요 헥헥;) 직원들을 사내 메신저를 통해 열람해봤습니다.
      수백명정도 본 것 같은데;; 그 사람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있네요.
      다만 오전중엔 또렷하던 얼굴이 지금은 흐려졌기 때문에 이 사람이 정확한지는 모릅니다.

      신고하고 CCTV를 보면 정확히 떠오를것같기는 하네요. 고민됩니다.
      오늘 일이 정말 손에 잡히지 않네요. 시간도 훌쩍 가버리고.
    • 그럼 그 사람은 같은 건물에 근무하는거란 말씀이죠?
      비슷한 시간대에 출근하면 또 볼 확률도 있겠네요.
      주의깊게 보시면 현장을 덮칠수도 있겠단 생각도? 아니면 진짜 경찰에 신고하면(이거 성추행전담반같은거 있지 않을까요?
      아예 사복입고 성추행범만 잡아들이는 팀이 있는것 같던데)
      그분들이 그 사람의 또다른 범행때 잡을 가능성도 클것 같고...일단 경찰대동 CCTV 보시는것도 괜찮을듯 싶어요.
    • 듀란듀란박사/ 맞아요. 앞으로도 같은 시간 같은 칸에서 볼 확률이 높습니다. 그 사람이 피해다니지만 않는다면요.
      오늘 끝나고 경찰서에 가볼까 하는데 괜히 심장이 떨리고 팔이 저려오네요. 답글 감사드립니다.
      다녀와서 또 글 남길게요. :)
    • 제가 주변인이라면 따라가드리고픈 맘이 굴뚝이네요.
      부디 용기내시기 바랍니다.
      친한 회사동료중 함께 갈 사람이 있으면 부탁해 보세요.
      누군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기도 합니다.
      잘 다녀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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