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읽기] 시에 불리한 시대_브레히트
시에 불리한 시대
나도 알고 있다. 행복한 사람만이
인기가 있다. 그런 사람의 말소리를 사람들은
즐겨 듣는다. 그런 사람의 얼굴은 아름답다.
마당의 뒤틀린 나무는
토양이 좋지 않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 나무가 불구라고 욕한다.
하지만 그것은 옳다.
준트 해협의 푸른 보트와 즐거운 요트를
나는 보지 않는다. 내가 보는 것은
어부들의 찢어진 그물뿐이다.
왜 나는 마흔 살의 소작인 여자가 허리를 구부리고 걷는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가?
소녀들의 가슴은
예전처럼 뜨거운데.
내 시에 각운을 쓴다면
그것은 내게 거의 오만처럼 보일 것이다.
내 안에선 꽃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열광과
칠장이의 연설에 대한 경악이 서로 싸우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 펜을 잡게 하는 것은
두 번째 것뿐이다.
이 시를 처음 읽은 게 대학교 1학년 때 세계걸작시였던가 하는 교양수업이었어요
번역본을 핸드아웃으로 받아서 철해둔 파일을 고이 모셔두었는데 몇년 전에 엄마가 내다 버린 듯.
시를 읽을 당시, 무슨 얘긴지 다 이해하진 못했어요. 저보다 훨씬 성숙한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와서 제가 이 시를
보여줬는데 가져가서 더 읽고 싶다고 친구가 빨간 볼펜으로 종이에 베껴쓰고 나서 그걸 잊어버린 채 우리 집에 두고 갔어요.
새빨간 친구의 필체로 눌러 적은 그 시를 도리어 제가 꾹꾹 여러번 눌러 읽었죠.
행복한 사람만이 인기가 있고 그런 사람들의 얼굴이 아름답다는 첫 문장의 쓸쓸함을 이해할 때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요;
해협을 떠가는 보트도 아름답지만, 절망의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가 아름다운 것을 찬양하는 것은
아름답지 못한 수많은 추악한 것들에 대해 입을 다무는 꼴이 되므로
나는 만개한 과일나무에 대해 도리어 침묵하고 세계의 절망에 대해 말하겠노라는.
아래 시는 더 길고 설명적이에요. 어둠의 시대를 관통하는 작가에겐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본업의 소명조차
기만적인 침묵이 된다는, 지식인으로써의 부끄러움과 분노가 문학시간에 배웠던 일제 식민지하의 시인들과도 비슷한 정서로 느껴집니다.
Ⅰ
참으로 나는 암울한 세대에 살고 있구나!
악의없는 언어는 어리석게 여겨진다. 주름살 하나없는 이마는
그가 무감각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웃는 사람은
단지 그가 끔직한 소식을
아직 듣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 줄 뿐이다.
나무에 관해 이야기 하는 것이
그 많은 범죄행위에 관해 침묵하는 것을 의미하기에
거의 범죄처럼 취급받는 이 시대는 도대체 어떤 시대란 말이냐!
저기 한적하게 길을 건너는 사람을
곤경에 빠진 그의 친구들은
아마 만날 수도 없겠지?
내가 아직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믿어 다오. 그것은 우연일 따름이다. 내가
하고 있는 그 어떤 행위도 나에게 배불리 먹을 권리를 주지 못한다.
우연히 나는 해를 입지 않았을 뿐이다.(나의 행운이다하면, 나도 끝장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말한다. 먹고 마시라고. 네가 그럴 수 있다는 것을 기뻐하라고!
그러나 내가 먹는 것이 굶주린 자에게서 빼앗은 것이고,
내가 마시는 물이 목마른 자에게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내가 먹고 마실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나는 먹고 마신다.
나도 현명해지고 싶다.
옛날 책에는 어떻게 사는 것이 현명한 것인지 쓰여져 있다.
세상의 싸움에 끼어 들지 말고 짧은 한평생
두려움 없이 보내고
또한 폭력 없이 지내고
약을 선으로 갚고
자기의 소망을 충족시키려 하지 말고 망각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라고.
이 모든 것을 나는 할 수 없으니,
참으로 나는 암울한 시대에 살고 있구나!
II
굶주림이 휩쓸고 있던
혼돈의 시대에 나는 도시로 왔다.
반란의 시대에 사람들 사이로 와서
그들과 함께 분노했다.
이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나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싸움터에서 밥을 먹고
살인자들 틈에 누워 잠을 자고
되는대로 사랑에 빠지고
참을성 없이 자연을 바라보았다.
이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나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나의 시대에는 길들이 모두 늪으로 향해 나 있었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는 도살자들에게 나를 드러내게 하였다.
나는 거의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배자들은
내가 없어야 더욱 편안하게 살았고, 그러기를 나도 바랬다.
이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나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힘은 너무 약했다. 목표는
아득히 떨어져 있었다.
비록 내가 도달할 수는 없었지만
그것은 분명히 보였다.
이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나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III
우리가 잠겨 버린 밀물로부터
떠올라 오게 될 너희들.
부탁컨대, 우리의 허약함을 이야기할 때
너희들이 겪지 않은
이 암울한 시대를
생각해 다오.
신발보다도 더 자주 나라를 바꾸면서
불의만 있고 분노가 없을 때는 절망하면서
계급의 전쟁을 뚫고 우리는 살아왔다.
그러면서 우리는 알게 되었단다.
비천함에 대한 증오도
표정을 일그러 뜨린다는 것을.
불의에 대한 분노도
목소리를 쉬게 한다는 것을. 아 우리는
친절한 우애를 위한 터전을 마련하고자 애썼지만
우리 스스로 친절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너희들은, 인간이 인간을 도와주는
그런 세상을 맞거든
관용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생각해 다오.
- 「후손들에게」(1934/1938) 전문
저 역시 참여적인 문학을 부러 더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도, 브레히트의 시는 이해하지도 못하고 꿀꺽 삼켜 버린 생선가시처럼
늘 어딘가에 걸려 있더란 말이죠. 기억 속을 한참을 헤매고 뒤져 찾아 냈습니다.
저는 문학을 위시한 예술이 교훈을 주려 하고 가르치려 들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그릇으로 사용되는 것에
꽤 반감이 있기도 했고, 예술은 현실과 유리된 머나먼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램도 가지고 있었지만,
절망의 시대에 아름다움만을 좇는다면 그것 역시 일종의 '매끈한 이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 아름다움에 대해선 관심이 많았지만 옳고 그름에 대해선 비교적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하는 아름다움이라면 그것이 진실한 아름다움인지에 대해서는 뒤늦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시가 말하는 것처럼 '비천함에 대한 증오도 표정을 일그러뜨리'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