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날 밤 사무실로 걸어 들어온 그녀를 보았을 때, 이 정도라면 훅 하고 찌는 한 여름 열기처럼 확 맛이 가버리게 만들만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검은색 정장에 붉은 코트를 입고 있었고, 그녀의 스타킹은 나일론 만드는 회사의 품질 검사 장비에서 성능 검사를 자랑스레 받고 있는 양, 한올 한올이 감동적으로 다리를 따라 선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음을 옮기면서 내 쪽으로 다가 올 때 마다 나는 그녀의 키가 조금씩 더 커지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는데, 알고보니 그것은 착각이 아니라 원근법 때문에 먼곳에 있는 그녀보다 가까이에 있는 그녀가 더 커보이기 때문이었다. 내 앞의 시야를 온통 그녀 혼자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아이맥스 화면에서 펼쳐지는 그녀의 영상이 그 내 눈을 휘감은 넓이 그대로 덮쳐온 것이었으므로, 나는 그녀가 유달리 커 보였던 것이다.
이곳은 여의도에 있는 어느 건물의 29층이고, 지금 시각은 새벽 1시 12분이다. 29층. 1시 12분. 어느 쪽도 맞지 않는 것이었다.
무엇이 맞지 않는가? 지금 29층 자리에 앉아서 올해에 16만대를 팔아 치워야만 한다는 눈동자의 카메라 부분을 붙잡고 있는데, 나는 이걸 사람 눈 대신에 달았을 때, 두 시간에 한 번씩 칙칙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노라고 14시간 26분째 쓰러져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바로 그녀가 이렇게 나타난다는 것이 맞지 않다는 것이다. 이건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뭐가 일어나는 일인가. 거대하게 솟은 이 건물 앞으로는 아침이 되면 수십대의 통근버스가 줄지어 나타난다. 이 통근버스는 마치 인형에 눈 붙이는 공장의 노동자에게 눈 없는 인형들을 끝없이 갖다 바치는 컨베이어 벨트처럼 직원들을 잔뜩 건물 앞으로 퍼부어 놓는다. 그러면 끝없이 늘어선 줄을 따라서 8시부터 9시까지 한 시간 동안 건물 엘레베이터는 꾸역구역 원료를 집어 삼키는 용광로가 되고, 그 수많은 인간들을 얌냠냠 집어 삼킨다. 이런 게 일어 나는 일이다.
이렇게 이 안에 들어선 인간들은 하루 종일 건물 이곳저곳으로 흘러다니면서 지지고 볶고 기름치고 구슬리고 끓이고 다지고 가끔 울면서 목을 잘리기도 하면서 소화 된다. 이제 6시부터 7시까지, 쓰레기 수거차와 함께 섞여 또다시 통근버스들이 줄지어 나타나면, 건물은 토해내기를, 진이 빨린 거짓된 인간의 형상들이, 애초에 선(善)과 미(美)는 빨릴 것도 없었다는 듯한 몰골로 다시 우글우글 걸어나온다. 그리고 이런 날이 20년째 반복되는 동안,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회사 주식 10%를 들고 있는 영감님의 호주머니는 조금씩 조금씩 끝도 없이 계속해서 더 두터워지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이 공간과 이 시간의 가나다요 ABC이며, 허구헌날 매일같이 반복되는 저주처럼 마땅히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즉, 새벽 1시 12분에 건물 29층. 내 앞에는 그녀와 같은 여자가 갑자기 나타 날 리가 없었다. 지금 시각에 건물에 남아 있는 찌꺼기들이란, 결국 두 가지다. 가족에게 애정을 잃고 집에 들어가봐야 짜증스러운 일만 있는데, 딴데서 쓰는 돈이 아까워서 버티는 사람들이거나, 혹은 장차 곧 가족들에게 애정을 잃고 집에 들어가봐야 짜증스러운 신세가 될텐데 벌써부터 돈을 아깝게 생각하게 될 사람들이다. 나 역시 후자에서 전자 쪽으로 급속히 진행하고 있는 무렵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는 어디로 보건데 여기에 나타나는 것이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하얀 얼굴의 눈동자는 진짜 여자의 눈동자였다. 우리 회사 제품은 이제 갈색 눈동자는 상당히 그럴싸하게 만들어낼 수 있지만, 저런 진짜 사람 눈동자와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단순한 텔레비전 화면 빛깔이었다. 내가 지금 426 제품을 붙들고 미쳐가고 있는 까닭도 해외 수출을 위해서 야심차게 만든 파란색 눈동자 제품과 초록색 눈동자 제품이 오류를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아직 세계 어느 회사의 기술로도 저런 진짜 여자의 눈동자와 같은 빛깔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그것은 눈이 벌게 지도록 왠갖 색깔의 눈동자 모양 기계들만 보고 사는 내가 누구보다 잘 안다.
그녀의 그 눈동자에는 전등 불빛인지, 무슨 렌즈인지, 아니면 원래 이런 여자의 눈동자는 원래 스스로 빛을 내는 항성과 같은 힘이 있는 것인지, 신비롭게 반사되는 빛 같은 것이 반짝이고 있었다.
내가 이 사무실에 있으면서 본 아름다운 것 두 가지를 꼽자면, 첫번째가 새벽 3시까지 야근을 하고 집에 갈 때 멀리까지 펼쳐진 야경의 불빛 속에서 차들이 움직이는 모습이었고, 두번째가 연말 특별 인센티브가 지급된다는 이야기가 처음 울려퍼졌을 때, 같은 층 사무실에 앉아 있던 사원들의 가히 성스럽기까지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새벽 1시 12분, 29층, 이곳에 서 있을 때, 그 순간 내가 본 감흥은 그 이상이었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반짝이는 빛은 55년식 텍사스 라이더 캐딜락이 그 광휘를 뽐내며 우주의 심연을 가로지르는 듯 하였고, 그것을 보는 내 표정은 500% 보너스와 같았단 말이다.
"love at first sight" - Wislawa Szymborska http://www.mission.net/poland/warsaw/literature/poems/lovesigh.htm
아래는 웹에서 주운 번역인데, 국내 번역본에 실렸던 버전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첫눈에 반한 사랑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그들은 둘 다 믿고 있다. 갑작스런 열정이 자신들을 묶어 주었다고. 그런 확신은 아름답다. 하지만 약간의 의심은 더 아름답다.
그들은 확신하다. 전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기에 그들 사이에 아무런 일도 없었다고.
그러나 거리에서, 계단에서, 복도에서 들었던 말들은 무엇이었는가. 그들은 수만 번 서로 스쳐 지났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정말로 기억하지 못하는가. 어느 회전문에서 얼굴을 마주쳤던 순간을. 군중 속에서 '미안합니다'하고 중얼거렸던 소리를. 수화기 속에서 들리던 "전화 잘못 거셨는데요." 하는 무뚝뚝한 음성을. 나는 대답을 알고 있으니, 그들은 정녕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놀라게 되리라. 우연이 그토록 여러 해 동안이나 그들을 데리고 장난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면. 그들의 만남이 운명이 되기에는 아직 준비를 갖추지 못해 우연은 그들을 가까이 끌어당기기도 하고 떨어뜨리기도 했다. 그들의 길을 가로막기도 하고 웃음을 참으며 휠씬 더 멀어지게도 만들었다.
비록 두 사람이 읽지는 못했으나 수많은 암시와 신호가 있었다. 아마도 3년 전, 또는 바로 지난 화요일, 나뭇잎 하나 펄럭이며 한 사람의 어깨에서 또 한 사람의 어깨로 떨어지지 않았던가. 한 사람이 잃어버린 것을 다른 사람이 주웠었다. 누가 알겠는가, 어쩌면 그것이 유년 시절의 덤불 속으로 사라졌던 공일지도.
문 손잡이와 초인종 위 한 사람이 방금 스쳐간 자리를 다른 사람이 스쳐가기도 했다. 맡겨 놓은 여행 가방이 나란히 서 있기도 했다. 어느 날 밤, 어쩌면, 같은 꿈을 꾸다가 망각 속에 깨어났을지도 모른다.
샤갈의 자서전 '나의 삶'에서는 벨라와의 재회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녀의 침묵은 나의 것이다. 그녀의 눈, 그것도 나의 것이다. 그녀는 마치 오래 전부터 나를 알아왔고 나의 어린 시절, 나의 현재, 나의 미래를 모두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를 처음으로 보았지만 그녀는 나를 오래 전부터 관찰하고 꿰뚫어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가 내 운명의 여인임을 느꼈다."
김영하는 맞는데 작품이 빛의 제국이었는지는 가물가물하네요. 아마 맞을텐데, 거기 나오는 중학생 여자애가 남자애랑 키스를 하고 난 다음에 나오는 글줄들이 생각나요. 정말로 딱 그 마음...;) 아니면 성석제의 고전 첫사랑도 -_-; 적확히 그 감정이나 정서를 그려내진 않았던 것 같지만. 그리고 김사과의 '풀이 눕는다' 는 확실하게 처음 반한 여자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가 영원히 잊지 못할 그날,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던 9월의 어느 오후, 트립 폰테인은 복도 저끝에서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우드하우스 교장 선생님을 보게 되었다. 트립은 약에 취해 있을 때 선생님들과 마주치는 것에 익숙했고, 자신은 한 번도 당황해 본 적이 없다고 우리에게 말했다. 그는 왜 그날따라 칠부바지에 샛노란 양말을 신은 교장 선생님의 모습에 자신의 맥박이 빨라지고 목 뒤로 식은 땀이 흘렀는지 설명하지 못했다. 어쨌건 트립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가장 가까운 교실 안으로 피신했다.
트립은 자리에 앉을 때 누구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 선생님도, 학생들의 얼굴도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오직 교실 안을 비추는 평화로운 빛, 창 밖의 가을 단풍으로부터 비쳐 들어온 오렌지색 빛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교실은 그가 들이마시고 있는 공기만큼이나 가벼운, 꿀처럼 달짝지근한 액체로 가득차 있는 것만 같았다. 시간의 흐름이 서서히 느려졌고, 그의 왼쪽 귀 속에서는 마치 수화기를 갖다 댄 것처럼 선명한 우주의 옴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그의 피 속에 남아있던 THC (마리화나의 활성성분) 때문에 그랬던 것이 아니냐고 하자 트립은 손가락 하나를 위로 세웠는데, 우리와 얘기하는 내내 손을 떨지 않았던 건 그때 딱 한 번 뿐이었다. "약 했을 때 느낌이야 내가 잘 알지. 하지만 그땐 뭔가 달랐어." 오렌지 색 빛 속에서 학생들의 머리는 소리없이 물결치는 말미잘 같았고, 교실 안의 적막함은 마치 바다 밑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모든 순간들은 영원해." 그가 의자에 앉았을 때 앞 자리의 여자애가 아무 이유 없이 자신을 쳐다보았던 상황을 설명하면서 트립은 이렇게 말했다. 그의 눈에는 여자애의 눈 밖에 보이지 않았으므로, 그 애가 예뻤느니 어땠는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얼굴의 나머지 부분 - 촉촉한 입술과 황금색 귀밑머리, 분홍색 콧구멍이 비쳐 보일 듯한 코 - 이 흐릿한 인상만을 주는 동안, 두개의 푸른 눈동자는 그를 파도에 태운 다음 그대로 정지시켜 버렸다. "그 애는 회전하는 세계의 부동점이었어." 트립은 재활 센터의 책꽂이에서 발견한 엘리엇의 시 전집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했다. 럭스 리즈번이 그를 바라보았던 그 영원한 시간 속에서, 트립 폰테인은 그때를 돌이켜 보았다. 현실 속에서 존재할 필요가 없었기에 그 후의 다른 어떤 사랑보다도 더 진실했던, 그 순간에 그가 느꼈던 사랑은 그의 외모와 건강이 엉망이 된 지금 이 사막에서까지도 그를 괴롭혔다. "대체 뭘 보면 그 기억이 잊혀질까." 그가 말했다. "아기의 얼굴. 아니면 고양이 목의 방울. 뭐가 될 지 모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