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겨먹은 대로 산다는 것

사람이 생겨먹은 대로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특히 직업, 직장과 관련해서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네요.


재작년 가을 쯤에는 꽤 고민에 빠져 있었어요. 3년간의 군의관 복무를 마친 뒤 갈 곳을 정해야 할 시기였거든요.


저는 굉장히 게으른 편입니다. 쉬엄쉬엄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온라인에 잡문이나 좀 끼적이며 


간혹 재미있는 뭔가가 있으면 좀 공부하다 마는 게 제 생겨먹은 바에 어울려요.


저와 비슷한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런 삶에 그럭저럭 만족하다가도 간혹 불안해질 때가 있습니다.


정체감이죠. 다들 앞만 보고 죽어라 달려가는데, 이러다가 뒤쳐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정체감.


제가 이런 말 하면 싫어하실 분도 꽤 계시겠습니다만, 어쨌든 제 직종에서도 노후를 걱정하는 사람이 늘고 있습니다.


부익부빈익빈, 강자독식은 이 동네에서도 이미 보편화된 일입니다.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은 대략 세 가지 정도 있을 거에요. 


1.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적당한 자리에서 애들 뒷바라지하며 산다. 일이 많다 해도 관심없는 공부를 억지로 할 필요가 없다.


2. 체제에 적극 순응하여 달리는 말에 올라탄다. 돈에 영혼을 팔거나, 노후가 보장되는 교직으로 가는 길을 취하거나...


3. 아예 판을 떠난다. 대표적으로 성공한 예가 시골의사 박경철 원장이겠습니다. 물론, 완전히 떠났다고 보긴 어렵지만요.


전 언제나 이 판을 떠나고 싶어했습니다만, 그러기 위해 들여야 할 노력과 시간이 너무 커 보였어요.


실은 저 같은 사람에게   첫 번째 길이 가장 어울리죠. 일이 많다 해도 대개는 routine으로 반복되는 것들입니다. 


그 분야에서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up to date하게 공부하면 됩니다. 하지만, 생각만 해도 권태감이 밀려듭니다.


솔직히, 권태감보다 더 큰 것은 사회적 성공에 대한 컴플렉스입니다. 시작도 안 해 보고 포기하는 듯한 느낌, 그에 따른 열패감,


이른바 잘나가는 친구들을 보며 느껴지는 초조감, 자랑스러운 남편이자 아빠이고 싶다는 욕망...


이 판을 떠나기 위해 위험부담을 안고 잘 알지도 못하는 것에 투자하기에는 늦었다는 생각...


그래서 2번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 뒤로 1년이 지났네요. 정확히 말하면 8개월간 모교병원에서 "이른바" 연구활동이라는 걸 해 왔습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동안 이것저것 조금씩 공부하며 알게된 것들도 많지요.


하지만, 그 지식들이, 내가 좋아하던 것들을 포기한 대가로서 충분한가, 난 이 일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왜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지도교수님은 일을 많이 시키시긴 하지만, 한국의 여느 대학교수들과 달리 공정하신 분입니다. 전보다 오히려 존경하게 될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 내가 해야 하는 것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들...


저에게는 아무 의미기 없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 하다 보니 이 곳에 1년 더 있게 되었습니다.


보스께서 제가 빠져나갈 수 없는 여러 장치를 마련해 놓으셨더라고요.


언제나 친절과 상냥함을 가장하는 제 전임자도 저를 위해 주는 척 하면서 적극 수렁에 밀어넣더군요. (물론, 객관적으로 보면 도와 주는 것 맞습니다. 의도는 극히 이기적이지만...)


한 번 시작한 것 어쨌든 끝은 봐야죠.


이 의미 없는 일들이 쌓이고 쌓이면 나중에 어떻게 되는지 한 번 보려고요.



지금 가장 부러운 사람들은, 자기 생겨먹은 바를 깨닫고 미련 없이 떠났거나 떠나기로 한 이들이에요.

    • 제 인생과 묘하게 겹치는 곳이 있어 말이 막 올라오는 글이군요. 겹친다고 해서 damian 님의 상황과 제 상황이 일치되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생겨먹은 대로 살기를 거부했어요. 저 자신을 뜯어고쳐야 해서 (성형이 아닙니다 성형이ㅋㅋ) 힘이 들긴 하지만 동시에 쾌락적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신상이 밝혀지므로 꺼려지지만...
      저는 생겨먹은 바를 깨닫고 떠나는 사람들이 부럽지 않아요.
      제가 부러워하는 사람 유형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생겨먹은 바를 아예 모르고 사는 무감각한 사람들, 다른 하나는 생겨먹은 바를 완전히 뜯어고쳐내겠다해서 성공한 사람들인데. 후자가 특히 부럽더군요. 전 이미 내 생겨먹은 바가 어떤 종자인지를 알게 되어서리.

      어쨌든 끝 잘 나길 바라겠습니다.
    • 그쪽 세계는 잘 모르지만 마지막 문장에서 멧 데이먼이 나왔던 라운더스가 생각나네요.랍비가 절대 될 수 없는 자신을 깨닫고 다 포기한 교수와, 그 얘기를 듣고 법조인이 못 될 자신을 알고 포기해서 전문도박사(?)가 된 주인공. 갑자기 생각이 났어요.

      나중에 끝에 조금의 의미라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전 지금 마악 생겨먹은 바를 깨닫고 미련있게 떠나는 중입니다. 생겨먹은바를 깨닫기까지 많이 힘들었어요. 지금도 매우 불안하고 궁금해요 앞날이 ㅋ 전 몇년 후에나 대답을 드릴 수 있겠네요
    • 저는 제가 어떻게 생겨먹은지라도 좀 알고싶어요
    • 자기 생겨먹은 바를 깨닫고 미련 없이 떠난지는 한참 되었는데, 지금 새로운 진로를 놓고 또 고민 때리고 있어요.
    • 저는 완전히 판을 벗어나서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지는 중(경제적으로)입니다.
      먹고 살 수 있으면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만족하고 살려고 하는데 먹고 사는 것 자체가
      지금 문제라..........왜 사나 싶습니다.
    • 저도 비슷한 고민을 해오는 참인지라 댓글을 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이렇다할 야심도 욕심도 없는지라 적당히 먹고 살 만하기만 하면 좋아하는 걸 하면서 슬렁슬렁 가고 싶은데...
      요즘 이 세상, 우리나라는 너무 빨리 돌아가는 것 같아요. 눈이 빙빙 도네요.
      제 능력은 남들 앞서긴 커녕 남을 쫓아가기도 벅차고. 휴우.
      생겨먹은 대로 사는 것도 재능인 것 같습니다.
    • 생겨먹은 대로 사는 것도 재능인 것 같습니다2
      저는 현실이 시궁창이라서...선택이 불가능해서 사실 영혼이라도 팔고 싶네요.
    • 저는 나선에서 내려온지가 한참. 덜 힘들게 덜 피곤하게 사는 법으로 요리조리 피해가고 있습니다. 이런 제 미래가 어떨지 저도 늘 궁금해요.
    • 생겨먹은대로 살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게 제일 편할지도. 인풋대비 아웃풋은 적지만 어쩌겠어요. 재미없는 일은 죽어도 못하게 생겨먹었는데 ... 이렇게 시달리면서 계속 살겠죠. 참고로 전 지금도 회삽니다.
    • 저는 생겨먹은 대로 살고 싶지만 먹고도 살아야겠기에 일은 하되 제 식대로 일하고 있습니다. 나름의 타협점을 찾아서요. 그리고 그렇게 일한 대가를 겸허히 수용할 마음까지 준비해 놓았답니다. 뭐. 나름 괜찮습니다. 제가 제일 힘들 때는 저울질을 할 때였어요. 저울에서 내려와 확실하게 노선을 정하니 인생이 좀 가벼워졌습니다.
    • 저도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 뒤돌아보니 이미 대강은 생겨먹은 대로 살아왔더군요. 저도 엄청나게 게으른 편이라.. 그게 제 인생에 여러모로 피해를 주고 있어서 좀 고치고 싶고 다른건 생겨먹은대로 살면 나름 죽으면서 후회는 안 할듯해요. 그래도 안생겨먹은대로 살려고 치열하게 자신과 싸워 이겨내는 사람들 보면 참 부럽긴 합니다. 어쨌든 자기행복은 자기가 찾는거니까 남과 비교하면 망하는거죠.
    • 생겨 먹은 대로 살려고 했는데 이 길이 내 길이 아닌가 보다를 깨닫고 있습니다. 떠날 준비를 슬슬 하려 하는데 몸이 너무 게으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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