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택해야 하는 이유

 

 

 

 

저는 길을 잘 잃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데 언젠가 차를 몰고 어딘가로 가다가

완전히 길을 잃고 헤맨 적이 있어요.

약속 시간은 정해져 있었죠.

외곽순환도로를 벗어난 경기도 북부 어딘가였어요.

한적한 시골길이었죠.

오전부터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죠.

이대로는 못 찾을 것 같아서 어느 공터에 차를 세우고 약속한 사람에게 전화를 했어요.

계속 전화를 하는데도 전화를 안 받더군요.

나중에는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가 나왔어요.

중요한 약속이었죠.

돈이 걸려 있는 약속은 언제나 중요해요.

핸드폰과 핸드폰을 발명한 인간을 원망하며 차에서 내렸어요.

 

공터에서 바라본 길 너머에는 연둣빛 논이 펼쳐져 있더군요.

주위에는 그늘도 없고 저는 햇볕을 고스란히 받으며 담배를 한 대 피웠어요.

담배를 피우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어요.

정말 개미새끼 한 마리 지나가지 않는 조용한 시골의 오전이었어요.

자기도 모르게 눈을 찡그리게 만드는 환한 빛만이 쏟아지고 있었죠.

 

저는 제가 지나온 길을 바라보았어요.

콘크리트로 포장된, 크게 굽이치는 길을 따라 몇 채의 집들이 있었죠.

그 길을 계속 따라가면 도로가 나오고, 신호등이 나타나고, 톨게이트를 통과한 뒤에는 도시가 나타나는 거죠.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아직 제가 가지 못한 길이 나타났어요.

살짝 오르막이었죠.

오르막의 끝에는 크고 무성한 나무들이 있었어요.

묵묵히 그 길을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나무들이었어요.

길은 그 오르막에서 끝나고 그 너머는 보이지 않았죠.

 

보이지 않지만 물론 길은 이어져 있겠죠.

왠지 그곳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되더군요.

궁금했어요, 유치한 비유지만 무지개의 끝을 궁금해하는 아이처럼, 문득 그 너머가 궁금했어요.

그리고 그런 상상을 했어요.

그 길 너머에 조용한 길이 계속해서 뻗어있고, 또 그 길을 따라갔을 때 어떤 조용한 마을이 나타난다면,

상점도 없고 관청도 없고 학교도 없고 버스도 없고 그저 사람이 사는 집들만 있는 마을이 나타난다면.

 

정말 그런 마을이 있다면 그곳에서 살고 싶었어요.

약속도 도시도 가족도 친구도 모두 버리고 그냥 조용히 살고 싶었어요.

무엇을 위해 사는지 묻는 일도 없이 그냥 조용히 살고 싶었어요.

 

그럴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냥 한번 해보는 생각이 아니었어요.

그대로 오르막을 넘어서면 정말 그럴 수 있을 것 같았어요.

 

한참 동안 그 오르막과 오르막을 지키고 있는 나무들을 바라보았어요.

왠지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더군요.

우리가 만약 어떤 한 가지 꿈을 선택해 눈을 감고 그대로 그 꿈속에서 살 수만 있다면.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죠.

잠을 깨우는 알람처럼 말이에요.

전화를 받았어요.

그 뒤로는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네요.

길을 묻고, 차를 타고, 사람을 만나고,

지금 여기 이렇게 듀게에 글을 올리고 있죠.

 

 

 

 

그런데 말이에요,

제가 그 길에 서서 오르막을 보고 있을 때

누군가가 나타났다면...

그러니까, 누구라도 상관은 없어요.

초록색 고깔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짚은 아주 작은 노인이건

힙합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선글라스를 낀 젊은 남자건

몸에 붙는 원피스에 빨간 하이힐을 신은 젊은 여자건

누구라도 상관없이 제 앞에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면...

 

그런 마을이 있어,

그런 마을이 있고 내가 널 거기로 데려다주지.

 

물론 저는 그 말을 믿어요.

그럼 그렇게 해달라고 말해요.

초록색 고깔모자를 쓴 노인이라고 하죠.

노인은 제가 정말 거기서 살 수 있겠느냐고 물어요.

저는 고개를 끄덕이죠.

노인은 저를 물끄러미 바라봐요.

 

그런 마을이 있어,

하지만 그건 꿈속에 있지.

일단 그 마을로 가면 다시는 현실로 돌아가지 못할 거야.

너는 단지 네가 선택한 그 꿈속에서 영영 깨어나지 않고 살아가는 것뿐이야.

 

그렇게 말했다면 말이에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러니까 내게는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직장이 있고, 그런 것들은 잠시 잊기로 하고 말이에요.

우리가 이 현실에 남아야 할 이유가 있나요?

저는 그게 궁금했어요.

 

 

 

 

한참 쓰다 보니 문득 저의 이 의문이 어쩌면 인셉션을 보면서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왜 꿈속에서 살지 않은 거지?

사랑하는 부인과 꿈속에서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었는데 왜 굳이 그녀를 꿈속에서 꺼냈을까?

그 꿈속에서는 꿈과 현실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면 말이죠.

림보인지 뭔지 그 속에서는 시간이 무한대로 늘어나고 그 무한대 속에서 그토록 사랑했던 자신의 부인과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왜 마지막까지 꿈속에서 사는 걸 선택하지 않았을까요.

저는 그게 궁금했어요.


나라면 그러지 않았을 거야, 아니 나라도 그랬을까...

영화를 보고 나서도 그 물음은 떠나지 않았어요.

 

꼭 인셉션 얘기를 하자는 건 아니에요.

그게 정말 궁금해요.

우리가 만약 그런 상황에 놓였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아니, 제가 묻고 싶은 건

우리가 현실을 택해야 하는 이유가 뭘까요?

거기 무슨 의미가 있는 거죠?

피와 살로 이뤄진 실체가 여기 있으니까? 

무슨 말이라도 좋아요.

 

그런 상황에서는 우리가 현실을 택하는 것이 정답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요?

그게 제 질문이에요.

 

 

 

 

    • 꿈꾸고 바라는 삶을 위해 치열하게 현실을 살다보니 뭔가 아닌게 되버린것 같은 생각이 자주 들어요.
    • 인식의 차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만약 꿈을 현실 만큼의 집중도로 살아갈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더 행복하다면 꿈을 선택할거에요.
    • 저는 굳이 현실을 택할 것 같지 않아요. 현실을 택한다면 아마 저쪽 세상을 완전히 믿을 수 없기 때문이겠죠. 이쪽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적어도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하니까요.
    • 발자국아래 / 인셉션에서는 거의 그런 설정이죠. 여자는 거기가 현실이라고 생각하잖아요.
      하지만 감독은 현실을 택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별로 고민도 없이 그런 결말을 지은 것 같아요.
      저는 왜 그래야 하는지 그게 궁금해요. 단지 그래야만 사람들이 좋아하는 결말이기 때문에?
      그럼 왜 사람들은 그렇게 현실을 택하는 결말을 좋아하는 걸까요?
    • 사람들이 현실을 택하는 결말을 좋아하는 이유는 아마도 현실과 꿈을 구분하여 인식하는 기준 자체가 현실과 더 밀접하게 상호작용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사람이 판단을 내리는 최종 지점에서 현실이라는 것을 택하기가 쉬운 것은 그 현실과 꿈 사이를 오가며 판단하는 과정에서 사고가 현실쪽에 머무를 확률이 더 높기 때문 아닐까요.
    • 굶은버섯스프 / 음, 더러운 비유 빼고 뭔가 음미할 만한 구석이 있는 말이네요. 곰곰이 생각해 볼게요. 고맙습니다...
    • 모두들 적당히 현실과 꿈에 발 하나씩을 담그고 균형을 이루고 있는데 어떤 계기로 삐끗하면 현실로 기울거나 꿈 쪽으로 더 기울거나 하다가 조금 더 큰 계기가 생기면 완전히 다른 한쪽 발을 빼기도 하겠죠. 저는 인셉션을 보면서 림보에 갇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 댓글 달아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으음, 너무 졸려서 자야겠네요.
      늦게라도 이 게시물 보신 분들은 댓글 달아주세용~
      감사히 생각하고 읽겠습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정말 궁금해요.
    • 꿈속에서 사는 건 아무래도 도피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인셉션에서의 그들의 림보는 도피는 아니었지만, 실상 현실의 진짜 아이들이 있었잖아요. 진짜 자신들의 아이들이 꿈너머에 있다는 생각이 사로잡혀 있는데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게 행복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사실 저도 인셉션을 보면서 림보의 세계로 가고 싶다고 생각을 했어요. 근데 그것도 저한테 일종의 도피적인 생각이었어요. 현실이 참 힘들고 그러니까. 그런데 현실에서는 내가 한 행동들로 인한 수많은 결과들(결코 그게 온전히 나 때문은 아니라고 해도)과 나로 행복하고 힘들어했던 가족들,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손을 탁 털어버리고 내가 꿈꾸는 세계로 갈 수 있을까요. 설령 그 세계에서는 현실의 사람들을 다 잊게 해준다고 해도.(잊게해주어서 가겠다면 그거야 말로 도피)
      지금도 온전히 나혼자만의 철저히 이기적인 생각으로는 가족들 다 저버리고 내가 하고 싶은데로 하고 싶으면 연락 다 끊어 버리고 사라져버릴 수는 있죠. 그런데 그렇게 도망쳐버리면 또 힘들어지면 또 도망가고 싶어버릴거예요.
      저도 굶은버섯스프님처럼 나름 현실을 정리하고 난 다음이면 가고 싶어요. 근데 그게 가능할까 싶네요.
      중간에 가족들 친구들 다 잊는다면 가능하겠느냐고 하셨는데, 그것과 더불어 내가 해 놓은 것들까지 온전히 잊는다면, 그러면 가고 싶어요. 마치 처음인 듯이 새로 태어나듯이요. 아마 잊지 못하겠지만요.
    • 제가 생각한 꿈과 현실이라면. 현실에서 모든 것을 잊고 꿈을 선택할 수 있다면, 그건 이미 내가 아닌 존재가 되어버리지 않을까 싶어요. 비단 가족, 친구와 같이 나를 둘러싼 인연뿐만 아니라 나의 열망, 부끄러운 과거, 내 앞에 놓여진 힘든 현실의 벽들, 달콤한 희망까지 모두 던져버리고 꿈이라는 마을에서 산다면, 그 존재가 과연 나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꿈은 도피라기보다는 현실에서 제가 일구어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왔거든요. 그 꿈이 설사 따뜻한 햇볕 아래 빨래를 개다가 졸음에 고개를 꾸벅이며 베란다에 앉아있는 저라도, 제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부엌의 조그만 창으로 고개를 내밀고 마중하는 미래의 배우자일지라도, 노을 속에 아무 말도 없이 책을 읽으며 앉아있는 제 모습일지라도요. 제게 있어서 꿈이란 현실 안에서 아주 잠시의 순간이라도 맛볼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들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게 현실을 살고있는 지금까지의 저였으면 좋겠어요. 물론 사는 건 때때로 너무나 힘겨웁지만요.
    • 꿈은 완전한 세계지만 그만큼 폐쇄적이니까요.
    • 꿈에서 사는 게 더 행복하다는 보장이 있으면 다들 꿈 속을 선택하지 않을까요? 근데 그 보장이 아무데도 없고... 나중에 후회하면 어쩌나 싶고. 인간의 망설임이란 게 항상 그런 식이죠. -_-;;
      근데 이런 생각도 들어요. 현실을 산다고 하지만 우리가 진짜 현실 속에 살고 있는 게 맞나 하는.
      우리가 받아들이는 모든 현상들은 그 현상 그대로가 아니라 뇌속에서 한 번 해석된 데이터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판단을 내릴 때도 이성과 현실을 근거로 내리지 않아요. 자신의 욕망과 판타지가 더 큰 주체입니다.
      이건 듀게의 연애고민 글들만 봐도 잘 알 수 있습............ (남들 다 아니라는데 끝까지 안 들어!)

      우리는 이미 우리가 만들어낸 가공의 현실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럴 바엔 기왕 그 가공성이 극대로 확장된 림보도... 뭐...
    • 네리아가 그러던데요, 난 슬쩍할 수 있어야 된다고...ㅎㅎ
    • 이런 훈훈한 분위기에 차가운 공돌이가 한말씀 드리면...
      사람은 잠만자고, 꿈만구고 살 순 없습니다. 누군가의 보살핌이 없다면, 영양섭취를 못할테니 림보에 빠져서 몇날며칠 잠만자면 결국 죽습니다. 혹 누군가 자신을 보살펴줘서 잠만자는 내 수발도 들어주고 영양제도 꽂아주고 그러면 히키모코리나 다를바 없구요.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서 자기 힘으로 살아야 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 ㄴ현실에서의 한 나절이 림보에서는 30대 남자가 호호할배가 될 시간입니다! 까짓거...
    • 스릴이 없을 거 같아서 별로예요..
    • 가상이 현실과 똑같으면 굳이 현실을 택해야할 필요는 없을것 같아요.
      현실은 현실과 가상이 똑같지 않으니 현실을 택하는 거겠죠.
      마찬가지로 언덕 넘어의 마을따위가 없다는걸 누구보다도 본인 스스로 잘 알고있으니까 그걸 택하지 못하는거죠.
      막연한 두려움이나 이곳에 있다는 존재감 따위 때문이 아니라 현실같은 가상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에 현실을 택하는게 아닐까요.
    • 꿈은 가짜고 현실은 진짜니까요. 인간은 선천적으로 아름답고 진실한 것을 추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대부분 성형미인을 싫어하죠. (응?)
      가짜세계에서는 모든 게 허망할 거 같아요. 뭔가 더 나아지고자 하는 의지도 없겠고 의미있는 것들이 사라질 테죠.
      그 텅빈 허무함보다는 차라리 괴롭더라도 현실이 나을거 같아요.
    • 함께 꿈 속으로 가줄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갈거에요. 혼자 가면 꿈 속에서 저만 진짜니까..

게시판 2012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462,409 01-31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147,940 12-31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122,151 04-01
130354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10 187 12-31
130353 아바타 3를 보고 유스포 2 192 12-31
130352 [핵바낭] 올해 잉여질 결산 잡담 14 334 12-31
130351 아바타: 불 과 재 보고 왔어요 짤막 소감 6 232 12-31
130350 [영화강추] '척의 일생' 8 249 12-31
130349 흑백요리사 2 8~10회, 싱어게인 4 탑 4 결정 6 285 12-31
130348 Lacombe Lucien(1974) 7 131 12-31
130347 [관리] 25년도 보고 및 신고 관련 정보. 15 324 12-31
130346 Isiah Whitlock Jr. 1954 - 2025 R.I.P. 2 139 12-31
130345 [왓챠바낭] 우편배달부 말고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잡담입니다 12 268 12-31
130344 [넷플] 말 많고 탈 많은 '대홍수' 드디어 봤습니다 14 454 12-30
130343 [반말주의] 다들 올해 고생 많았어!! 새해 모두 건강하고 복 터지길 바래!! 12 186 12-30